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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사지 부토와 앞의 문인석? 부도 앞에서 시중을 드는 듯한 모습으로 서 있다.
고달사지 부토와 앞의 문인석? 부도 앞에서 시중을 드는 듯한 모습으로 서 있다. ⓒ 이승열
아주 오래 전 아직도 바람이 맵던 초봄, 여주 고달사지에 간 적이 있다. 해외여행이 막 시작되며 너도나도 외국의 이색풍경에 반해, 코딱지 만한 나라에 뭘 볼 게 있냐고 자기 비하가 만연했던 시절이었다. 단풍놀이, 먹고 마시고 흔들리는 관광버스가 여행이란 단어가 같은 뜻으로 쓰이던 시절이기도 했다.

해박한 지식과 구수한 입담으로 좌중을 휘어잡았던 신병철 선생님의 안내로 시작된 문막, 여주 지방의 폐사지 답사는 십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는 아름다운 여행이다. 여행이 끝난 뒤 여행의 느낌을 사자성어로 정리한다는 선생님은 강원도와 경기도의 경계인 여주, 문막 폐사지 답사을 ‘상전벽해’라는 말로 정의했다.

보라색 꽃망울을 알알이 터트릴 준비를 하고 있는 한라부추. 예전에는 군락을 이루었는데 이젠 찾아봐야 할만큼 개체수가 줄었다.
보라색 꽃망울을 알알이 터트릴 준비를 하고 있는 한라부추. 예전에는 군락을 이루었는데 이젠 찾아봐야 할만큼 개체수가 줄었다. ⓒ 이승열
지금이야 산 넘고 물을 건너야 닿을 수 있는 국토의 중심에서 잊혀진 궁벽한 오지지만, 고려시대 이곳이 행정, 문화의 중심지로 지금으로 치면 엄청난 규모의 다운타운을 형성하고 있었을 것이라 했다. 불교를 배척한 조선시대부터 절이 깊은 산 속에 자리잡은 것에 반해, 고려시대에는 절이 종교를 뛰어넘은 모든 생활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한다. 실제로 이곳 폐사지에서 발굴된 불경의 뒷면에 당시의 전답, 인구 등의 기록이 남아 있어 이곳이 번성했던 다운타운 지역이었을 것이란 가설을 가능하게 한다.

흥법사지, 법천사지, 거돈사지를 차례로 둘러본 뒤 섬강을 건너 해질녘 만난 고달사지는 여행의 마지막 쉼표를 찍는 장소로 충분했다. 초봄 들판을 가득 메운 노란 꽃다지의 물결, 황량한 봄바람이 부는 논바닥에 덩그라니 놓여 있던 귀부와 이수, 그리고 석불대좌. 석불대좌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던 노란 산수유꽃 군락.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도감과 실물을 비교하며 귀부의 모양이 물고기에서 용의 모습으로 변하는 과정, 짝 잃은 유물들이 현해탄을 건너다 일제의 패망으로 다행히 돌아왔으나 아직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경복궁 뜰에 방치된 이야기. 그 단단한 화강암을 떡 주무르듯 해서 온 산하에 펼쳐놓은 옛 사람들의 부처를 향한 끝없는 경건함. 끝이 없었다.

늠름하게 생긴 국보 4호 고달사터 부도. 부도 안에 사리함을 넣고 화강암에 창문살 무늬를 낸 후 열쇠로 꽁꽁 잠가버려 부도를 지켰던 옛 사람들의 해학. 옥개석 아래 돋을 새김의 아름다운 비천상, 부도 끝에 핀 귀꽃. 십 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남아있는 고달사지의 이미지들이다.

국보 4호, 고달사지 부도의 늠름한 모습.
국보 4호, 고달사지 부도의 늠름한 모습. ⓒ 이승열

부도의 아름다운 조각들. 사리함을 안치하고 창살을 내고 자물통으로 잠가 놓았다. 돌 위에...
부도의 아름다운 조각들. 사리함을 안치하고 창살을 내고 자물통으로 잠가 놓았다. 돌 위에... ⓒ 이승열

부도의 깊은 조각들. 여의주를 문 용, 서로 엉킨 꼬리 등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부도의 깊은 조각들. 여의주를 문 용, 서로 엉킨 꼬리 등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 이승열
입장료를 내지 않고도 국보를 볼 수 있다는 감동, 언제나 오만한 ‘접근금지, 만지지 마시오’란 팻말만 대하다가 가까이서 오감을 통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권위적이지 않았던 유물, 행복한 답사였다.

여행은 늘 하나의 이미지로 기억에 새겨진다. 고달사터는 내게 노란 산수유 사이로 늠름한 부도가 어우러진 곳이다. 상방하원식 고려초 무덤가를 빽빽이 수 놓았던 보랏빛 부추, 투명한 억새가 구색을 맞추며 가을햇살을 더욱 강조하는 곳이다. 지난 주 아직 한라부추는 꽃망울을 터트리지 않고 있었다. 알알이 사방으로 튕겨나갈 듯 가을 햇살을 꽃망울 속에 담고 있었다.

성격 급한 밤송이가 군데군데 떨어져 있어 해바라기 하며 풋밤 속껍질을 손톱 끝으로 벗겨 오도독 오도독 씹는 재미도 쏠쏠했다. 몇 년 전부터 시작된 발굴 작업이 아직도 진행되고 있었다. 느티나무 아래 누워 오수를 즐기는 인부, 굴삭기로 열심히 땅을 파고 있는 인부, 추석 비 소식에 발굴터를 덮고 있는 인부, 옛돌들과 사람들이 어우러져 따스한 가을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고려시대 불교의 영향을 받은 호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상방하원식 무덤은 고달사지 부도에서 500미터쯤 올라가는 산등성이에 있다. 사람의 왕래가 뜸해 명주실 같은 거미줄이 꽤 튼튼하게 길 중간 중간에 쳐 있다. 산삼이라도 발견될 만큼 세상의 모든 소리가 단절된 햇살만 내려앉는 곳이다.

상방하원식 고려 초 무덤. 밖은 네모진 불단처럼 안은 원으로 묘역을 구성했다. 해바라기 하기 딱 좋은 곳이다.
상방하원식 고려 초 무덤. 밖은 네모진 불단처럼 안은 원으로 묘역을 구성했다. 해바라기 하기 딱 좋은 곳이다. ⓒ 이승열
이곳에 앉으면 괜히 감상적이 되고 삶은 통속적으로 변한다. 무덤 주위 철책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도 보고, 무덤 위에도 올라가 보고 싶다. 어린 시절 비석에도 올라가고, 묘등에 올라서 미끄럼도 타고 그랬는데. 그땐 늘 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고 어우러져 함께 있었다. 삽자루 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쫒아 오던 동네 어른들이 생각난다. 불교의 영향을 받아 불단처럼 사방으로 쌓아놓은 돌들, 철문으로 막은 어두컴컴한 묘역 내부, 가끔은 진부하지만 내 삶과 죽음도 함께 생각한다.

이만큼 큰 대좌에는 얼마나 큰 부처가 봉안되었을까? 연꽃무늬가 세세하다.
이만큼 큰 대좌에는 얼마나 큰 부처가 봉안되었을까? 연꽃무늬가 세세하다. ⓒ 이승열

비석을 잃은 귀부와 이수. 용왕의 아들 중 힘자랑하기 좋아하는 놈이 환생하여 무거운 비석을 짊어지고 있다 한다.
비석을 잃은 귀부와 이수. 용왕의 아들 중 힘자랑하기 좋아하는 놈이 환생하여 무거운 비석을 짊어지고 있다 한다. ⓒ 이승열
추석 전 잠시 짬을 낸 고달사지에서의 초가을 한나절, 차가 막히기 전에 집에 당도하려면 슬슬 일어나야 한다. 부도지까지 나무 터널을 이룬 올라왔던 계단을 버리고 비탈길로 내려가면 망망한 들녘 한가운데 귀부와 이수가 있다. 가을철 절정을 이룬 빨간 물봉선과 노랑종달이꽃 또한 개울가 가득하다. 멀리 발굴 작업에 참여 중인 인부들이 바삐 움직인다.

그 사이 고달사지에 새 절 고달사가 당당히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구부정한 자세로 굽어보며, 영 자비심을 베풀 것 같지 않은 눈매 싸늘한 부처가 날 노려보고 있다. 도피안사의 씩씩한 부처님, 빙그레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던 서산마애불에 익숙해서인지 영 눈을 맞추기가 어렵다.

현재 발굴작업 중인 많은 폐사지들이 문화재청과 조계종이 분규 중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서산 보원사지, 이곳 고달사지. 양주의 회암사지 발굴터는 8단지 중 3단지까지는 조계종 소유, 나머지는 국가 소유라 발굴에 어려움이 많다고 했다.

발굴 작업이 한창인 문화재 위에 떡 하니 자리 잡은 새 고달사에서 무엇인가를 태우고 있는 모양이다. 불심이 가득했던 고달사터에 오늘은 연기가 가득해 눈과 코가 모두 매캐하다. 플라스틱과 21세기의 온갖 물질을 포함한 지독한 연기가 혜목산 소나무에도, 조각 깊은 귀부에도, 여의주를 물은 용의 얼굴에도 골고루 스며들고 있다.

새로 생긴 절 고달사의 부처님. 세월이 흐르면 정겨운 모습으로 변할까?
새로 생긴 절 고달사의 부처님. 세월이 흐르면 정겨운 모습으로 변할까? ⓒ 이승열

초가을 혜목산을 덮기 시작한 매캐한 연기. 불을 발견하면서 부터 공해가 시작되었다.
초가을 혜목산을 덮기 시작한 매캐한 연기. 불을 발견하면서 부터 공해가 시작되었다. ⓒ 이승열
아까 오금리에서 만났던 낭랑하게 음악을 울리며 계몽성 멘트를 날리던 여주군 환경과 쓰레기차를 생각했다. 개인이 쓰레기를 소각해 연기를 내는 것은 불법이란 생각도 잠시 했다. 이럴 때는 전화를 해서 신고를 하는 것이 민주시민의 올바른 자세인가? 혜목산의 푸르름을 하얀 연기가 온통 뒤덮은 모양이 언뜻 안개 속의 풍경 같다. 차라리 안개였으면 좋겠다.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모호하게, 현실과 꿈의 경계가 허물어지도록.

고달사지에 고달사를 세우고, 진전사지에 진전사를 세워야만 고승들의 가르침이 전해지고 불법이 이 땅에 고루 퍼지는가 모르겠다. 이미 폐사지가 되었다면 그 곳에는 폐사지가 될 만한 연유와 전설이 간직되었으리라. 세월의 이끼가 끼어 뒹구는 돌들, 전설, 폐사된 사연 모두 소중하고 후대에 물려줘야 할 유산이다. 폐사지에 서 있는 현대식 건물, 어울리지 않는 불상을 이제는 그만 봤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갖고 길에 드니 벌써 귀향중인 차들로 고속도로가 가득하다.

덧붙이는 글 | 그래도 여전히 고달사지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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