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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한 태도에 말 붙이기가 미안했던 이다빈(삼각산초등 5) 어린이. 6살 무렵부터 민화를 즐겼다는데 감각이 뛰어났다.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심각한 표정이어서 인터뷰가 미안했다.
진지한 태도에 말 붙이기가 미안했던 이다빈(삼각산초등 5) 어린이. 6살 무렵부터 민화를 즐겼다는데 감각이 뛰어났다.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심각한 표정이어서 인터뷰가 미안했다. ⓒ 곽교신
정통 회화를 한다는 사람들이 뽄그림(베껴 그리는 그림)이니 최소한의 예술성도 없느니 하며 전통 민화를 깔보는 풍토에서, 어린이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날 대회에서 거둔 풍성한 성과는, 대부분 외로운 작업을 하고 있는 민화 작가들로서는, 그야말로 씨도 뿌리지 않고 열매를 수확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어른들도 마니아 층이 제한적인 터에 어린이들의 민화가 볼 게 뭐 있겠나 싶어 작품 제출 마감 두어 시간 전에야 도착해 취재를 시작했으나, 어린이들 손에서 그려지는 작품들을 보면서 놀라웠다. 동시에 어린이들에게, 아니 '어린 민화 작가님'들께 무한히 미안했을 정도로 민화에 대한 참가 어린이들의 애정은 진지했고 기량은 예상을 뛰어 넘었다. 그림 선이 어른 빰치게 그리는 어린이가 하나 둘이 아니어서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이고 부끄러워라..." 심사위원 전원일치로 즉석 특별상을 만들어 시상한 임근령 어린이.
"아이고 부끄러워라..." 심사위원 전원일치로 즉석 특별상을 만들어 시상한 임근령 어린이. ⓒ 곽교신
심사위원장 송규태 화백은 "어린이들의 민화에 대한 역량과 애정을 확인한 것이 이번 대회가 거둔 큰 성과"라며 "성인층만을 주 대상으로 했던 민화 교육을 어린 학생층으로 확대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해야겠다. 그간 신경을 써주지 못한 것에 대해 어린이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하고 고맙다"며 원로 작가로서 감격스러워했다.

대회를 주관한 가회박물관의 윤열수 관장은 "어린이들의 민화 창작 수준이 이렇게 높을 줄 몰랐다. 민화에 대한 대중 인식 자체를 바꿔야 하지 않나 싶다"며 민화의 앞날을 밝게 보았다.

이름을 가리고 무작위로 심사한 결과 최고등급인 매화상(5명 시상)에 뽑혔을 정도로 작품이 우수했으나, 초등학교 1학년은 대상 수상 자격이 아니어서 예정에 없던 '특별상'을 즉석에서 만들기도. 수상자인 상계동 동일초등학교의 임근령 어린이는 채 어리광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얼굴 표정이 곧 순수한 민화같았던 임근령 어린이는, 민화가 전혀 꾸미지 않은 민중의 정서를 그린 우리 고유의 그림이라는 평설을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민화가 이름없는 민간 작가들의 꾸밈없는 그림이었음과 티가 묻지 않은 어린이의 미감각이 우리 민화와 정서적으로 부합하는 것인지는 단정할 수 없다.

그림에 열중하는 어린이들에게 '민화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이론적인 개념은 거의 모르고 있었고 "옛날 그림"이라고 대답한 정도였다. 그러나 '민화가 왜 좋으냐'는 질문에 대해 "우리 그림이니까요"라고 답했다. 간단하지만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시골미술학원" 어린이의 도회 어린이보다 우수했던 작품
"시골미술학원" 어린이의 도회 어린이보다 우수했던 작품 ⓒ 곽교신
용인에서 진천 쪽으로 차를 타고 20여 분 들어가는 곳에 위치한 시골 학원 미술강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B미술학원 이선미(34) 강사는 작년에 경기박물관을 통해 우연히 접한 민화에 어린이들이 의외로 친근감을 느끼는 것이 신기했다고 한다.

민화라는 명칭도 모른 채 "선생님 옛날 그림 그려요"로 민화 수업이 시작되었고 자신도 민화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는데, 아이들 때문에 민화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단다. 지금은 아이들의 성화에 한 달에 1회 정도는 아예 민화를 그리는 날로 정했다고.

이런 현상에 대해 심사 업무를 총괄한 가회민화아카데미 2기 회장 최남경씨는 "어린이의 순수한 정서가 민화의 순수한 화면 정서와 맞아 떨어지면서 어린이들이 민화의 표현 방식에 친근감을 느끼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참가 어린이가 적을 것으로 예상해 당일 도착만 하면 입장시키려던 계획이 무색하게도 대회 이틀 전에 참가 신청을 마감해야 했다니, 이런 열정이 있는 한 우리 민화의 앞날은 매우 밝을 듯하다. 적어도 이 어린이들이 자라서 활동하는 세대는 우리 전통 민화를 두고 "그림의 기본도 못 배운 최소한의 예술성도 없는 그림이다"라며 홀대하지는 않을 것임을 확인한 의미 깊은 대회였다.

앞으로 어린이 대상의 민화 그리기 대회가 보다 더 많이 열려서 어린이들 사이에 잠재해 있는 민화에 대한 원초적 욕구를 밖으로 끌어내주는 것이 어른들이 할 일이다. 그 잠재 의식이야말로 곧 우리의 진솔한 문화적 에너지 아닌가.

일차 우수작을 선별한 후 최종 수상 결정까지 많게는 세 번의 재투표까지 거친 투명한 공개 심사
일차 우수작을 선별한 후 최종 수상 결정까지 많게는 세 번의 재투표까지 거친 투명한 공개 심사 ⓒ 곽교신
흔히 듣고 보듯이 이런 대회에서 심사의 공정성은 항상 문제다. 실례를 무릅쓰고 심사 현장에 따라들어가 심사 전 과정을 지켜본 결과는 흐뭇했다. 어린이들의 열정에 사심없이 보답하려는 심사위원들의 성의가 열을 뿜었다. 심사위원장 이하 모든 심사위원이 공개리에 한 표씩 거수로 투명하게 표를 던진 형식이어서 특정 작품을 편애할 여지가 아예 없었다. 이런 점은 실질적으로 처음이라 할 수 있는 어린이 민화그리기 대회의 앞날을 위한 좋은 선례로 남을 것이다.

이날 수상작들은 가회박물관에서 도록으로 발간되며 이 시대 살아있는 민화 작품의 하나로 가회박물관이 영구 소장한다고 하니, 이 또한 '어린 민화 작가님'들께 보내드리는 어른들의 정중한 예우가 될 것이다. 오랫만에 꾸밈없이 진솔하게 이어지는 문화 전수의 현장을 본 가슴 뿌듯한 가을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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