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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일정을 마치고 아타쿠르크 공항에 도착했다. 다음 일정인 카파도키아를 가기 위해 카이세리행 국내선 비행기를 이용하기 위해서다.

광복절, 카이세리행 비행기에서 일본인을 만나다

터키항공의 국내선 비행기는 우리나라의 국내선 비행기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비행시간도 1시간 10분 정도라니 맘 편하게 제주도 가는 기분으로 앉아 있으려니 바로 옆좌석에 능숙한 영어 발음의 동양인 남자가 홀로 앉게 되었다. 혼자서 여행을 다니고 영어 발음이 는숙하니 으레 중국계일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말을 붙였다가 일본인이란 소리에 또 한번 나의 어줍잖은 편견을 마음 속으로 책망했다.

▲ 태극기 휘날리며(일본명 브라자후도)의 포스터
ⓒ 강제규필름
D 자동차회사에 근무하고 있다는 A씨는 열흘간의 휴가를 받고 터키로 배낭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오늘이 며칠인가 꼽아보니 우연히도 8월 15일, 우리나라는 즐거운 광복절이고 일본의 경우는 잊고 싶은 2차세계대전 패전일에 다른 나라의 국내선 비행기 옆좌석에서 같은 지역을 여행하는 여행자로서 만났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문득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A씨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서 그의 표정을 살피니 곧 도착할 카파도키아 여행정보를 읽느라 정신없어 보인다. 아무래도 한 사건에 대해 바라보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의식구조는 달라도 한참 다르겠지….

서로 인사를 나눈 후 A씨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은 의외로 장동건, 원빈, 이병헌 등 한국 영화배우의 이름이었다.

일본의 일반인들이, 그것도 비교적 나이 젊은 일본인 남자가 이렇게 많은 한국 배우들을 거론할 정도니 <겨울연가>로 촉발된 속칭 한류가 2년 전 일본여행 당시보다 더 범위가 확대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2년 전 일본 큐슈를 여행했을 때만 해도 일본인들에게 <겨울연가>라는 한국 드라마가 NHK 방송에서 꽤 인기를 끌며 방송되고 있었고, 그 속의 남자 주인공이 배용준이라는 이름의 배우라는 정도로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2년이 지난 이곳 터키에서 우연히 만난 일본인은 <겨울연가>와 배용준이 아닌 또다른 한국 영화배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격세지감을 느꼈다.

혹 일반인이 아닌 유독 한국영화를 좋아하는 한국영화 마니아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한국영화를 본 적 있느냐고 물었더니 기다렸다는 듯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와 같은 일본에서 개봉되어 히트한 한국영화 목록을 줄줄이 나열하고 있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무서워

한국영화 DVD를 일부러 찾아 보는 마니아는 아니라는 생각에 오히려 일반 일본인들의 한류에 관한 느낌을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도 그가 보았다는 세 영화 모두 남과 북이 소재인 영화라 이웃나라의 분단에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해 영화를 본 느낌을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A씨는 간략하게 그 느낌을 말했다.

한마디로 "무서웠다"는 것이다. 특히 <태극기 휘날리며>는 매우 무서웠다는 그를 보면서 무서웠다는 의미가 도대체 무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한국영화의 약진이 무서웠다는 것일까? 아니면 동족끼리 남북으로 대치되어 있는 상황이 무서웠다는 것일까? 단순히 총알이 오고가는 급박한 전투신이 무서웠다는 것일까?

결국 그가 무서워한 이유는 일본 전후세대로서는 경험하지 못한 총칼이 오고가는 급박한 전투신이라는 것으로 밝혀져 이런 저런 나의 상상을 무색하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한가지 알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전후 일본 사람들에게 이웃나라의 군대이야기나 남북 분단이란 소재는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매우 매력적인 소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국내선과 터키 국내선의 차이는 간식상자

그와 영화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마침 간식이 나왔다.

우리나라 국내선 비행기에 나오는 서비스라면 고작 음료수 서비스뿐인데 이곳 터키항공 국내선은 토카프 궁전 전경 사진을 표지로 한 두툼한 종이상자 하나씩을 손님들에게 간식으로 제공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 안에 뭐가 들었을까 궁금해 하며 상자를 여니 그 속에는 꽤 큰 크기의 햄샌드위치와 터키산 쵸코파이 1개, 비스킷 1봉지와 냅킨 봉투가 들어 있었다. 때 마침 제공되는 음료수와 함께 샌드위치를 먹다보니 똑같은 비행시간인데도 이들과 달리 음료수 하나 달랑 주는 우리나라 국내선 비행기의 서비스가 너무 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솔직히 햄샌드위치와 쵸코파이, 조그만 봉투에 들어있는 비스킷의 원가는 그리 많지 않으리라고 본다. 그래도 주는 것과 안주는 것 사이에서 승객이 느끼는 차이는 엄청 클 수밖에 없다. 더구나 간식으로 제공되는 종이상자의 표지에 그 지역의 유명한 관광지 사진을 인쇄하고 사진설명을 붙여 놓았으니 간식을 먹기 위해 상자를 열 때 사진에 대한 주목도와 광고 효과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높을 것이다. 국내선 비행기 간식상자를 통해서도 자국 관광지 홍보에 열을 올리는 터키를 보면서 과연 관광 면에서는 우리보다 한 수 위라는 생각이 드는 건 나만의 오해일까?

이제 제주도를 이용하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니 우리나라 국적의 항공사 또한 제주도 구간만이라도 제주도 명승지 사진을 넣은 간식상자를 탑승객들에게 제공하는 방법도 제주를 알리는 데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용준과 아줌마신드롬

간식 먹을 동안 잠시 끊겼던 A씨와의 대화는 요즘 일본에서 제일 인기있다는 배용준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는 '배용준' 이라는 이름을 듣자 고개를 저으며 자신은 별로인데 오사카에 살고 있는 자기 어머니가 배용준을 무척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미 일본 내에서 거론되는 '배용준=아줌마'의 분위기를 말하는 것인가 싶어서 배용준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 아줌마들이 많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니까 반색하며 아줌마 소리를 유독 강조했다.

물론 그의 말 속에 내포되어 있는 아줌마라는 느낌은 극성스럽다는 식의 그다지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고 일본언론 또한 한류 전체를 일본의 극성 아줌마가 좋아하는 풍조로 폄하하고 있다.

문득 <겨울연가>가 인기를 끌기 시작하던 시기인 2003년 7월 8일자 <요미우리신문>에 게재된, <겨울연가>의 인기요인을 분석했던 기사의 내용이 얼핏 떠오른다.

대략적인 기사내용은, 그동안 교류가 미미했던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제작한 멜로드라마 <겨울연가>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가 바로 60년대 유행했던 몇몇 자국(일본) 드라마에서 느꼈던 아련한 동질감과 친근감 때문이라는 식의 분석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제 일본인들은 한국드라마를 60년대 복고의 추억에서 한발 나아가 아줌마 부대류로 몰고가려 하고 있지만, 이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한국배우 배용준이라는 이름이 소수의 마니아가 좋아하는 영화배우 한명 정도를 넘어서 이미 일본 아줌마들의 새로운 문화코드 내지는 사회현상으로 확산, 정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영화와 함께 김치와 불고기, 비빔밥 등 한국음식들에 호기심을 보이는 A씨를 보면서 80년대 주윤발, 장국영 류의 홍콩영화에 열광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가 홍콩영화에 열광했듯이 그들도 한순간의 문화 흐름으로서 한류를 생각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이 흐름은 어떻게 진행되어 갈까 문득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터키 비행기 안에서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과 한국 배우와 음식에 대해 옆집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며 소리소문없이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고 있는 한류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어느덧 비행기는 카이세리 공항에 도착했고 A씨와 헤어진 나는 카파도키아의 파샤바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이스탄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터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터키 7박8일 여행기 8번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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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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