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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암의 기침소리에 연못에 투영된 남간정사가 통채로 흔들리는 듯하다.
ⓒ 한석종
우리 문화에 내재된 미의 성격을 얘기할 때 '자연의 질서에 포근히 순응하는 자연미'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정원이나 누각의 형성된 위치와 건물 배치 등을 통해 우리는 바로 이러한 자연미의 한 전형을 수월하게 맛볼 수 있다.

누정이란 무엇인가

누정(樓亭)은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일컫는 말로 넓게 보아 헌(軒), 당(堂), 대(臺), 각(閣) 등도 이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누각이 자연 풍광을 폭 넓게 바라 볼 수 있도록 높은 언덕이나 바위 또는 흙으로 쌓아올린 대(臺) 위에 지어진 것이라면, 정자는 사방이 터진 수려한 경관을 배경으로 규모는 누각보다 작으면서도 벽이 없는 기둥과 지붕으로만 지어진 것을 말한다.

누정은 왕조 시대에 주로 남성들을 위한 공간으로서 누(樓)가 학문을 연마하거나 연회, 풍류 또는 군사적 목적의 공적인 용도로 쓰인 반면, 정자는 1인 또는 소수가 사색이나 풍류를 즐기기 위한 사적인 공간으로 지어졌다.

누정은 흔히 마루로만 되어 있으나 중앙이나 귀퉁이 한켠에 온돌방이 딸린 경우도 적지 않다. 정자와 비슷한 것으로 모정(茅亭)이란 것이 있는데 이는 농사일을 하는 농부들이 주로 휴식을 위해 농경지나 그 주변에 세운 것이다.

▲ 남간정사의 배치도
자연 속으로 마실 나온 우암

남간정사(南澗精舍)는 조선 후기 노론의 거두로 당대 최고의 정치가이며 대유학자인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이 대전의 소제동에 거주하면서 후학을 가르치기 위한 서당을 건립한 곳이다. 이 명칭은 주자를 사모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주부자(朱夫子)의 '운곡남간(雲谷南澗)'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남간정사는 숙종 9년(1683)에 세워졌고, 정조 때 한 차례의 중건과 이후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서 그는 기호학파의 유림들과 제자들에게 주자학을 강론했으며, 병자호란 때의 치욕을 씻기 위한 북벌책의 산실이 되기도 했다.

우암은 성리학과 예학의 대가로 당대에 그 학문을 따를 자가 없었으나 성격이 올곧고 두루 원만하지 못하여 주변에 많은 정적을 가졌지만 지극히 자연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의 성격과는 상반된 버드나무의 유연함을 좋아했으며, 국화와 연꽃의 향기를 가까이 했다. 이러한 우암의 자연관은 <기국정사실기>(杞菊亭事實記)에 잘 나타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수맥을 피해서 집을 짓는데 왜 우암은 바로 물 위에 집을 지었을까? 물 위에 집을 지은 것은 청간을 만들기 위함이었고 이러한 발상은 뒷계곡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가능했으리라.

또한 남간정사의 특징은 물에 접한 주추의 높이가 제각기 다른데 이는 물의 수량을 고려하여 그 높이를 각기 달리했다고 볼 수 있다. 우암은 유학의 대가로 음양에 대한 학문적 깊이가 깊어 양인 물과 음인 땅을 다 받아들인다는 기본철학의 바탕 위에 이 건물이 지어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 남간정사 솟을 삼문앞에 단을 지어 흐르는 계류
ⓒ 한석종
자연 속에 흡수되는 건축

남간정사의 앞마당에는 곡지원도형(曲池圓島形)의 작은 연못이 자리잡고 있다. 고봉산에서 흘러내린 계류가 낙수를 만든 다음 이 연못으로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온다. 연못으로 흘러드는 물길이 하나 더 있는데 남간정사 뒤편의 샘물이 차고 넘쳐 대청 밑을 지나 앞쪽 연못으로 합류한다.

그래서 앞쪽에서 바라본 건물은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듯하다. 남간정사의 출입구가 앞쪽 아닌 뒤쪽에만 있다는 점도 특이하다. 더욱이 작은 폭포 옆과 연못 한복판의 섬에는 수백 년 묵은 왕버들이 이리저리 몸을 비틀고, 연못가에는 자연 그대로의 바위가 고스란히 자신을 드러내고 있어 자연미를 한층 더해 주고 있다.

이러한 조경 기법은 우리 나라 전통 정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수법이다. 담으로 둘러싸인 남간정사의 공간 배치는 연못과 기국정으로 이루어진 정원 영역, 남간정사와 후원으로 이루어진 교육 영역, 남간사의 사당 영역으로 구분해 놓았다.

남간정사는 꽃산을 배산으로 한 북고남저(北高南底)의 터에 자리를 잡고 남간정사에서 바라다 보이는 후원에는 사당인 남간사와 연결되는 경사지에 대나무 숲과 그 옆에 샘을 조성하여 맑은 물을 사시사철 공급했다.

남간정사의 정문이 되는 솟을 삼문 앞에는 동쪽 더퍼리골에서 흘러온 계류가 단을 지어 서쪽으로 흐르고 있다. 따라서 남간정사는 계류를 건너 드나들게 되고 이 계류를 경계로 하여 자연스럽게 공간이 구획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계류를 건너 남간정사에 들어가게 되면 우측에 지난날 소제동에서 옮겨다 놓은 기국제가 자리하고 있다. 이 공간에서 기국제를 끼고 우측으로 돌아 다시 작은 다리를 건너면 담장에 붙여 지은 협문이 있고, 이 문을 통해 들어가면 정사의 주 건물을 만나게 된다.

후원은 정사건물 위편 언덕에 세워진 남간사(南澗祠)에 오르는 경사진 공간에 조성되어 있다. 남간정사 건물이 위치한 강학소 역시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으나 연못 쪽으로는 트이도록 하여 연못과 정사가 같은 공간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구성했다.

따라서 남간정사 400여 평의 영역은 기능에 따라 3개의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 가운데 위치한 정사건물이 남간정사 전 영역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 시간에 순응하며 허리를 굽히는 고목
ⓒ 한석종
서로를 사랑하고 배려한 건물과 정원

남간정사는 숙종 9년(1683)에 건축되었으나 지금의 건물은 정조 20년(1796)에 중건한 것이다. 정사 건물은 정면 4칸, 층면 2칸이며 중앙의 통4칸은 우물마루의 대청이 있다. 대청 왼편에는 통2칸의 온돌방을 드렸고 대청 오른편은 1칸×1칸의 온돌방과 그 앞에 누마루를 대청보다 높게 만들고 그 아래는 함실로 사용했다.

건물의 구조를 보면, 연못에 면한 부분은 팔각 주초석을 사용하고 물이 흐르는 대청 밑부분은 팔각 장초석을 사용했으며, 이들 주초석 위에는 원주를 세우고 그 기둥머리는 초익공 계통의 공포로 꾸며져 있다. 기둥 위에 홈을 파서 창방과 대들보를 함께 끼워 맞추었다.

지붕은 겹처마의 팔작지붕이며 대청은 연등천정으로, 온돌방은 우물반자로 마감했다. 가구(架構) 방식은 전후 평주 위에 대들보를 걸고 그 위에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종보를 받치고 종도리는 제형대공으로 지지된다.

처마가 길게 내어지는 경우 그 처짐을 보완하기 위해 세운 기둥을 '활주'라고 부르는데, 남간정사의 네 모서리에 모두 활주가 세워졌다. 활주의 단면은 원형이며 활주를 받친 초석은 네 개 모두가 서로 다른 모양이어서 아마도 중수하는 과정에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대청과 우측 누마루의 창호는 모두 4분합 띠살 들어 열개문이고 온돌방으로 통하는 문은 팔각 정자살의 불발기 들어 열개문이다. 좌측 온돌방의 창호는 모두 띠살문으로 외여닫이 내지는 쌍여닫이이며, 북쪽창은 작을 들창문으로 되어 있다.

남간정사의 후면에 약 30도의 경사를 갖는 비탈면 중앙에 계단을 설치하고 계단 위에 남간사를 배치했다. 그리고 계단 양쪽 비탈면에 조경했는데, 이는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후정(後庭)처럼 석축을 쌓아 계단식으로 처리하지 않고 그 비탈 경사면을 그대로 이용한 특징이 있다.

기국정(杞菊亭)은 원래 소제방죽 주변에 있던 송시열의 별당으로, 정자 주변에 국화와 구기자를 심은 것을 본 유림들이 정자의 이름을 기국정(杞菊亭)이라 부르는 데서 유래되었다.

도시가 확장되면서 소제호가 매몰되자 1927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됐다. 화강석을 다듬어 쌓은 기단 위에 방형(方形) 주초석을 놓고 방형(方形) 기둥을 세운 기국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대청과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간사(南澗舍)는 1924년 기국정과 함께 소제동에 있던 우암고택에서 이전한 사당이다. 남간정사 뒤의 계단은 통해 진입하게 되며, 정면 4칸 측면 3칸의 평면에 팔작지붕으로 구성된다. 건물의 기단은 잘 다듬어져 있고 방형 주초석 위에 민흘림 기둥을 세웠으며, 기둥머리에는 장식이 없는 경사진 양봉을 끼우고 창방 위에 굴도리를 얹어 주심도리와 대들보를 사개맞춤했다.

정면 4칸 모두 쌍여닫이 장판문이며, 이 상부에 띠살문을 가로로 길게 달아 창으로 삼았다. 일반적으로 사당은 정면을 3칸으로 만드는데, 남간사는 4칸으로 만들어 그중 동측 3칸은 사당으로, 서측 1칸은 벽으로 막아 제기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남간정사의 세살문을 열고 대청과 누마루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면 뒤로는 대나무 숲과 샘이 보이고 앞으로는 못과 수림이 한데 어우러져 정원과 건물이 서로를 사랑하고 배려한 흔적이 역력한 그야말로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 남간정사 마루 밑에서 흘러 나오는 물길
ⓒ 한석종
자연의 그림자가 쉬어가는 공간

우리 나라의 조경에서 돌을 다루는 기법은 '자연스러운 인공의 가미'가 주요 특징이다. 전남 담양에 있는 소쇄원도 계류에서 흘러나온 물길에 약간의 인공을 가미하므로써 더욱 자연스럽게 만들어 더욱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정사 앞의 못은 장축이 26m, 단축은 7m 규모이며 자연 지형에 따라 축조한 곡지 형태로 지안은 자연석을 쌓아 마감했다. 연못의 수원은 정사 뒤의 샘물과 동쪽에서 흘러들어온 개울인데, 샘물은 정사의 대청 밑을 통하여 연못의 동북쪽으로 흘러들게 했고, 개울의 물은 바위벽으로 끌어들여 연못의 동북쭉 모서리에서 폭포로 떨어지게 했다.

그러하니 남간정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대청마루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와 동쪽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를 더불어 들을 수 있고 한편으로는 못에 투영된 자연의 그림자를 동시에 맛 볼 수 있다. 이는 동시에 시각과 청각적인 요소로 경관을 완상하기 위한 것으로, 못에 비쳐지는 그림자는 자연이 연출하는 실물경관과는 구별되는 또 다른 자연을 느끼게 하는 특별한 경관요소가 된다.

연못과 입수로 주위에는 왕버들과 왕벚나무, 말채나무 등이 어우러져 울창한 수림대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연못의 동쪽 지안 가까이에는 큰 바위가 여러 개 드러나 암경(岩景) 또한 뛰어나다. 그러나 남간정사 주변이 개발되는 과정에서 계류와 못이 분리되어 지금은 과거의 경관을 그저 상상할 수밖에 없어 더욱 아쉽기만 하다.

또한 남간정사의 물이 좋아 차맛이 가히 일품이었다고 전해오는 그 샘물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이끼가 끼고 이제 물빛은 뿌옇게 흐려져 있다. 이러다간 그 맑던 샘물이 언젠가는 물길마져 끊길지도 모른다.

건물도 사람의 손떼가 묻지 않으면 쉬이 퇴락하게 된다. 남간정사의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정신을 일깨우는 남정네들의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쉴세없이 들려오고 샘물에 다시 생기가 돌아올 때가 그 언제일까?

▲ 남간정사 담너머로 보이는 외부 경관
ⓒ 한석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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