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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한 아줌마로 생각할 수도 있다. 드라마 보며 눈물 콧물 훔치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나 또한 10대 때 텔레비전 앞에서 입을 반쯤 벌린 채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드라마에 넋을 빼앗긴 채 앉아있는 친정 엄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으니까.

<장밋빛 인생>을 보면서 계속 울었다. 맹순이가 암수술을 받으러 떠나면서 자신의 체취가 남아있는 집을 돌아보며 '내가 다시 여기 올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는 모습에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남편 반성문을 만나 이혼서류를 건네주며 악수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눈물을 훔치는 장면에서도 더불어 허전함과 허무함에 목이 메었다.

아줌마 드라마의 공식

울 일이 또 남아 있었다. 현재의 처참한 처지와는 상방되는 과거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또 울었다. 그 이름조차 역설적이게도 '장밋빛 인생'이라는 카페에서 젊고 건강하고 행복한 모습으로 반성문에게 열렬한 프로포즈를 받는 장면이었다. 그랬던 것이 10년 전인데,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젊음은 저만치 가버렸고, 건강도 잃고 사랑도 잃었고, 그야말로 상전벽해라 할 만큼 상황이 변해버린 것이다. 도대체 1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너무 울어서 그런가, 드라마가 끝난 후 기운이 다 빠져나가 허탈하고 기진맥진해서 빨개진 얼굴로 넋 놓고 앉아 있었다. 맥박이 빨라지고 호흡이 부자연스럽고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두려움에 휩싸였다. 누군가 내 모습을 봤다면 무슨 일 있는가, 하고 걱정할 수도 있는 모습으로 망연자실해서 앉아 있었다.

▲ <여왕의 조건>의 한 장면. 제목처럼 아줌마로서 꿈꿀 수 있는 최고의 상황을 얻는다.
ⓒ SBS
드라마 왕국 우리나라에서 주시청자는 나와 같은 아줌마라고 한다. 그래서 아줌마가 주인공인 드라마가 많다. 아줌마 드라마는 몇 개의 공식 안에서 만들어졌다.

이야기가 만들어지기 위한 발단은 대체로 남편의 외도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배신을 해야 사건이 만들어질 수 있으니까. 두번째 장치는 돈 많은 왕자를 만나는 것이다. 아련하고 그리운 첫사랑의 기억을 공유한 첫사랑이 왕자로 나타나기도 하고 젊고 잘생긴 남자가 왕자가 되기도 하는데, 기본적으로 돈은 많아야 한다. 셋째는 가정에만 은둔해 있던 아줌마들이 사회에 성공적인 컴백을 하고, 그 원수 같은 남편에게 통쾌한 복수를 한다.

아침드라마 지존의 자리를 꽤 차고 있는 <여왕의 조건>은 이 공식에 꼭 들어맞는 드라마다. 아줌마들에게 판타지를 제공하면서 아줌마들의 비위에 잘 맞아 아줌마들에게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내고 있다. 주변 아줌마들의 반응은 정말 대단했다. 밖에 볼 일이 있어 나가야 하는데 아침방송 <여왕의 조건>과 겹치면 이만저만 고민되는 게 아니어서 "오늘 그 못된 놈 망하는 날인데" 하면서 미련을 못 버리는 모습을 많이 봤다.

공포든 판타지든 효과는 현실로부터의 이탈

돈 많고 잘 생기고 젊은 남자를 만나 로맨스를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사회적으로 성공까지 하게 되는 여주인공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얻는다. <여왕의 조건>이야말로 아줌마가 꿈꿀 수 있는 최고의 상황인 것이다. 아줌마에게서 가장 결여된 것이 로맨스와 사회적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을 때, 이 둘을 충족시켜주고 있다.

▲ <장밋빛 인생>은 주인공의 상황과는 역설적인 제목.
ⓒ KBS
<장밋빛 인생>은 <여왕의 조건>과는 반대의 길을 가는 드라마다. 판타지 대신 공포를 선택했다. 기존 아줌마드라마들이 판타지를 통해 대리만족감을 심어줬다면 <장밋빛 인생>은 공포체험을 통해 현실에 대한 안도감, 자신에 대한 만족감을 주는 효과를 내고 있다. <조신설화>에서 악몽을 꾼 조신이 꿈에서 깨어나 안도감을 느낀 것과 같은 효과가 <장및빗 인생>을 보고 났을 때 일어난다.

아줌마가 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으로 데려가 간접적으로 불행을 체험하게 해준다. 아줌마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이혼으로 가정이 붕괴되는 상황이나 병이 들어 아직 혼자서는 살아가기 어려운 어리고 미숙한 아이를 남겨두고 죽는다는 설정을 통해 간접적으로 불행을 경험하게 하고 있다.

'정말 다행이다. 내 남편은 바람 안 피우잖아. 그리고 난 건강 하나는 걱정 없잖아. 그래, 난 운이 좋은 편이야.'

기존 드라마와는 다른 공식의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신선하다. 판타지에 조금 식상하기 때문에 새로운 맛을 보고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도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공포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공식으로 보면 될 것 같다. 공포영화를 보는 이유가 두려움과 공포를 간접 체험하는 것처럼 아줌마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경험을 간접체험해 보면서 현실에 대한 위안을 색다른 방법으로 얻어 보는 것이다.

공포든 판타지든 효과는, 현실로부터의 이탈이다. 내가 처한 삶에서 벗어나 주인공의 처지가 돼보는 것이다. 주인공이 돼 성공에 들뜨기도 하고, 왕자를 만나 설레기도 하고 <장밋빛 인생>에서처럼 철저한 비극에 가슴을 뜯으며 고통을 느끼기도 한다. 허나 이런 모든 감정은 현실의 자신과는 거리가 있는 감정이기에 슬픔도 기쁨도 여유를 갖고 즐길 수 있는 수준이다.

이렇게 드라마 속으로 푹 빠져들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재미가 있어야 한다. 공포든 판타지든 재미가 있으면 드라마를 감상하는 시청자에게는 몰입과 현실 이탈,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으로부터 떠났다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것만한 스트레스 해소가 없기에 아줌마에게서 드라마는 막강한 오락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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