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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예인 최창석씨
ⓒ 최삼경
경기도 여주 가남면 안금2리에서 도예방 '바우가마'를 운영하는 최창석(45)씨는 질그릇보다 투박한 느낌을 준다. 학부에선 사회학을 전공하였고, 도자기와 인연을 맺은 것은 막상 졸업하고 생계가 막막하여 생업의 수단으로 다녔던 것이 전부란다. 하지만 그 당시에 30만원에도 못 미치는 급여를 받으며 다니던 도자기 공장생활이 애증이 버무려진 평생의 업이 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무엇보다 값싸고 질기다는 이유로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닌다는 그를 보고 주민들은 처음엔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고 한다. '저렇게 한복이나 입고, 머리나 묶고 다니며 사기나 칠 모양'이라며 '얼마나 버틸지 두고 보자'는 게 그 의심의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더 열심히 마을일에 나서야 했다고 한다. 마을의 길흉사는 물론 심지어는 퇴비증산 작업에도 나서서 한결같이 일을 하는 그를 보고서야 이웃들은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이제는 동네사람들은 푸근한 미소로 그를 반기고, 그의 초등학생 아들까지 신발가게를 가면 검정고무신부터 찾는다고 하는데, 이것이 또한 의도하지 않은 남다른 조기교육의 결과가 아닐까.

▲ 백자 항아리 작업 모습
ⓒ 최삼경
도자기를 빚는 것은 농부의 마음과 흡사하다고 한다. 그래서 도공들은 손의 결을 따라 흙의 마음이 읽혀질 때까지 반죽을 거듭한다. 여기에다 '성형(成形)'이라 하여, 형상을 만들고, 잿물을 들이고, 가마 속에 굽는 절차를 밟는다. 물론 그 과정마다 도예가들의 정성이 균일하고 세심하게 범벅되어야 함은 언제나 전제가 된다.

동방의 우리나라는 산이 높고 물이 맑아(山高水麗) 고려(高麗)라 하였고, 아침햇살이 곱고도 밝아(朝日鮮明) 조선(朝鮮)이라 하였던가? 그래서였는지 조선조 세종은 특히, 하얀색의 마니아였다고 알려진다. 그래서 조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흰 백색의 자기를 만들고자 여주, 이천, 광주에 관요까지 두었고, 나중에는 영릉이라 하여 그의 무덤까지 이곳에 자리 잡게 되었으니 여주와 세종과의 관계는 묘하고도 질긴 인연이라 하겠다.

하지만 그 산자수명하다는 우리네 땅은 한편으로 반상 간의 차별이 유난했었다. 어쩌면 그 계급사회의 오랜 전통이 손에 물 묻히기 싫어하는 '출세'지향이 판을 치고 '노동'을 천하게 여기게 된 원인은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지금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적 콘텐츠는 거개가 다 이렇게 멸시받던 무지렁이의 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또 무슨 역설이란 것인지. 에밀레종의 주종(鑄鐘) 기술이 그렇고, 고려청자와 조선백자가 그렇고, 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으로 꼽힌 민요 '아리랑'이 그렇다.

지금 세계에서 도자기 시장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과시하는 나라는 중국도 한국도 아닌 일본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많은 도자기술자들을 데려간 일본은 전통적인 장인(匠人)의식에다가 범국가적인 사업으로 고급한 도자기 문화를 일으켰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들도 도자기의 최상을 꼽으라하면 단연 한국의 도자기를 쳐준다고 한다. 평균의 실력은 높되, 최고는 아니라는 것이다.

▲ 전시장 겸 살림집의 벽 전경
ⓒ 최삼경
바로 이 지점에 한국 도예공들의 희망이 감춰져 있는 듯 하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는 옛 명성을 되찾고자 1000여 곳의 도자요가 활발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도자기제작과정은 도토수비(陶土水飛)-성형(成形)-잿물(釉藥)-소성(燒成)의 네 가지 과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한국의 도공들은 예전의 전통적 방법에 집착하고 있다지만, 요사이는 제작과정을 분석한 데이터를 활용한 과학적 방법도 접목되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웰빙 바람을 타고 차와 다기세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도 무자비한 저가의 중국산 공장제품들로 막상 도공들의 살림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재료인 흙도 비용부담 때문에 뉴질랜드에서 많이 수입해 오고 있다고 하니 세계화는 영역과 부분을 가리지 않고 전개되고 있음을 다시 한번 실감케 되는 대목이다.

맨 처음 여주읍 근처에 자릴 잡았던 최씨의 보금자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읍내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곳으로 내몰렸다. 처음엔 가마공장으로 만들었던 곳에 방 하나 더 만들어 아예 식구들이 다 이사했다는 집의 담벼락은 미술을 전공한 아내 덕분인지 예쁘게 꾸며져 있다.

남들에 비해 시작은 늦었지만 한 눈 팔지 않고 걸어온 길은 그에게 여주 민예총 지부장일을 맡기는가 하면, 도자기 축제와 관련해 외국인들을 상대로 한 도자기 아카데미 강사일도 병행케 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굵어가는 아이들의 머리를 보면서 그라고 왜 장차의 가계에 대한 걱정이 없으랴. 다만 가마 안에서의 일은 오로지 가마가 알아서 한다는 가마지사 새옹지마의 원리를 체득해서인지, 굳이 마다하는 술자리를 펴고 기타와 하모니카 연주로 메마른 필자의 가슴을 너그럽게 위무해 준다.

▲ 기타와 하모니카를 연주하는 최창석씨
ⓒ 최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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