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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판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직도 미심쩍은 부분은 있었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이 저와 함께 뜻을 같이해 움직여주지 않는다면 허황된 일이 아닙네까? 다른 이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합네까?"

노인은 입가에 옅게 미소를 띄었다.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가족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소인이네, 자신과 가족뿐만 아니라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군자라고 칭할 수 있네."

장판수는 그 말에 대해 알 듯 말 듯 하면서도 선뜻 내키지는 않았다.

"저 같은 상놈도 군자일 수 있는 겁네까?"
"군자에 어찌 반상(班常 : 양반과 상민)의 구별이 있겠는가? 다만 입으로는 군자의 도리를 읊으면서 행동거지가 그렇지 않은 이들이 많으니 나라가 이 모양이 되지 않았겠는가?"

노인의 말이 딱히 마음에 닿지 않은 장판수는 직접적인 대답을 원했다.

"그렇다면 제가 어찌 해야겠습네까?"

노인은 장판수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음을 알고서는 쉽게 전달할 말을 속으로 짜내었다.

"내 옛날 얘기를 하나 해줌세. 여기 편히 앉아서 잘 들어 보게나."

노인은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장판수를 앉힌 후 옅게 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마치 손자를 어르듯 잔잔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해주었다.

<오래전에 퇴계 이황이라는 큰 선비분이 계셨네. 그 분이 풍기군수로 옮겨가며 서원을 세우고 많은 제자들을 받아들여 학문을 가르쳤네. 서원 가까이에 사는 배순이라는 대장장이가 서원에서 글 읽는 소리를 좋아하여 서생들이 글을 읽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 망치질을 그만 둘 지경이 되었네. 결국에는 일을 그만 두고 서원의 뜰아래에서 청강하자 퇴계께서도 이를 기꺼워하며 놓아두었다네. 몇몇 서생들은 '대장장이가 뭘 안다고 여기서 강론을 듣고 있느냐.'며 비아냥거렸지만 배순은 이를 한쪽귀로 흘리며 글을 읽고 강론을 듣는데 열중했다네. 단지 감히 단위에 올라 퇴계의 말씀을 청강하지 못하는 걸 한으로 여길 뿐이었네. 그러던 어느 때 퇴계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어 보셨네.

-꿈은 자신이 꾸는 것인가?
제자들은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퇴계는 또다시 질문을 던졌네.

-꿈은 잠을 자야 이루어지는 것인 즉 그렇다면 사람이 곧 잠이오. 꿈이니 꿈이 허황된 것은 사람의 본성이 본시 허황돼서 그렇지 않은가?
이황은 그 질문을 제자들에게 던지지 않고 대장장이 배순을 보고 했다네. 배순은 공손히 일어나서 이렇게 답했다네.

-허황되고 망령된 생각은 깨어서도 하는 법입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학문에 정진한다면 어찌 사람의 본성이 허황되다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이황은 크게 웃으며 배순을 불러 다른 제자들과 같이 학문을 닦게 하였다네. 퇴계께서 풍기군수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시자 배순은 대장장이의 솜씨를 발휘해 선생의 철(鐵)상을 만들아 아침저녁으로 분향하며 경모했다네. 수 십년후,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배순은 삼년복을 입고 철상을 모시며 제사를 지냈다네. 모두가 이 배순의 충절을 높이 보는데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이런 배순을 탓했다는구만.

-돌아가신 선생께서 자네를 어찌 대우했나?
-다른 서생들과 같은 자리에 앉게 해 주었소.
-그래서 대장장이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나?
-아니라오. 하지만 선생은 내가 큰 것을 남기고 가셨소.
-그것이 무엇인가?
-군자의 도리는 몸으로 지켜나가는 것이오. 내가 지금 이렇게 선생을 모시는 건 선생을 모시는 게 아니라 선생의 뜻을 모시는 것이오. 당신 같은 이들이 내 곁 모습을 보고 혀를 찰지언정 난 이를 탓하지 않겠소. 하지만 돌아가신 분 앞에서 예의는 차려야 하는 것 아니외까?

그 사람은 배순의 말에 대꾸도 못하고 급히 분향만 하고서는 돌아서 갔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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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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