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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얘기가 그렇습네까?”

장판수는 여전히 노인의 말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는 투였지만 노인은 그리 개의치 않았다.

“여기서 대장장이 배순의 말에 왜 그 사람이 아무 말도 못했는지 아는가?”

장판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글쎄 모르겠습네다. 아무래도 무례함을 사죄하는 의미에서 그런 게 아니겠습네까? 하지만 배순이 좀 미련해 보이는 것도 사실입네다. 그 선생의 뜻과 학문이 얼마나 깊은지 저 같은 무식쟁이가 알 도리는 없지만 미천한 대장장이가 굳이 생업을 내팽겨치며 앞길을 보장해주지 않는 학문에 매달릴 것은 없지 않습네까?”

“그렇다네.”

“그러하면 이런 얘기를 해주신 뜻은 뭡네까?”

“배순이 학문에 매달린 뜻은 단지 선생의 뜻과 학문을 숭상한 것이 아니었네. 사람이 살아가는 법도를 듣고 그에 감흥되었기에 선생의 사후에도 사당을 차려 모신 것이 아니겠나? 남들은 그 외향만 보고 비웃기도 하지만 배순은 지극히 사람의 법도를 다한 것이지 그 생업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네. 철상을 만들어 모신 것은 대장장이 배순만이 할 수 있는 도리가 스며든 것이 아니겠나?”

“그렇다면 도리에 맞게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에 충실하라는 말입니까?”

“바로 그거네. 사람들에게 그것을 깨닫게 해야 하네. 그래야 그 사람들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깨닫게 될 걸세.”

잠깐 동안 노인의 말에 의문을 가졌던 장판수는 다음 순간 머릿속에서 한줄기 광채가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감사합네다. 어르신! 제가 나갈 길을 가르쳐 주셨습네다!”

장판수는 노인에게 넙죽 절을 올리며 허리춤에 있는 칼집을 끌러서 내려놓았다.

“이 칼은 더 이상 필요 없습네다. 이제는 제가 칼로 도리를 할 수 있는 때는 훌쩍 지났습네다.”

노인은 내려놓은 칼을 집어 들어 다시 장판수에게 건네어 주었다.

“이럴 필요는 없네. 칼은 가지고 가게나. 몸이 건사해야 뜻을 이룰 것이 아닌가? 순간적인 기분에 들떠 행동하지 말고 신중히 생각해서 몸가짐을 가져야 하네.”

다음날 이른 새벽, 장판수는 노인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린 후 길을 떠났다. 그날은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할머니가 모습을 드러내어 장판수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람이 좀처럼 드나들지 않은 궁벽진 곳이니 두 번씩이나 여길 찾아온 자네가 가니까 섭섭한 모양이었구먼.”

푸근한 웃음이 담긴 노인의 말에 장판수는 다시 한번 인사를 올리며 다시 올지 모를 길을 떠났다. 노인이 살던 깊숙한 골짜기를 돌아 나와 굽이굽이 산길을 걸어 올라오다 보면 도무지 길이라고 할 수 없는 산등성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이미 한번 가본 길이었지만 되짚어 찾아 가기도 어려운 길이었고 행여 방향을 잘못 잡으면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쓰러져 산짐승의 밥이 될 수도 있었다. 장판수는 험난한 길을 걷고 또 걸으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내가 가진 칼 한 자루로 세상을 뒤엎을 수는 없다. 하지만 좀더 큰 뜻으로 사람들을 위하는 일은 할 수 있다! 그것이 내가 어렵게 산길을 가듯 내가 살아가는 힘이다.’

남한산성에서 풍산으로 가는 길은 함경도로 접어들면서부터 고되었지만, 풍산에서 의주로 가는 길은 장판수에게 매일 매일이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가도가도 도무지 인가는 찾아볼 수 없었고 끼니는 산짐승도 잡지 못해 부드러운 풀잎파리를 찾아서 씹어 먹거나 운이 좋으면 산열매, 버섯을 따먹는 게 다반사였다. 어쩌다 마을을 찾아 하루 밤을 신세지려고 해도 사람들은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다.

“거 팔자 한번 좋구만. 사람들이 청나라로 모조리 끌려가는 판국에 거지꼴로나마 유람이나 하고 있으니 원.”

아예 이렇게 노골적으로 장판수에게 비웃음을 보내는 이도 있었다. 그나마 이런 말을 할 힘이 있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될 지경인 것이, 대부분의 마을에서 사람들은 살아갈 기운조차 잃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래도 여긴 오랑캐들의 발길이 덜 닿아 괜찮지 한양에서는 사람들이 잔뜩 잡혀가지 않았슴둥?”

지나가는 말로 들은 어느 함경도 산동네 사람의 말속에는 어쩐지 남의 얘기를 하는 것만 같은 냉소가 배어있었다. 양반들은 갓이고 탕건이고 내던지며 맨몸으로 도망을 다녔고 병사들은 청나라 군대의 깃발만 보고도 오금이 저려 숨기 바빴다는 말은 점잖은 편이었고, 왕이 청의 황제에게 싹싹 비는 것도 모자라 댓돌에 머리를 짓찧으며 피를 철철 흘리며 절을 올렸다는 소문도 있었다. 가끔씩은 오랑캐들의 만행을 성토하다가도 사람들은 제풀에 손을 내저으며 맥이 풀린 채 앞으로 살아갈 일만을 걱정했다. 조선은 임진년의 왜란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암울한 기운이 전역을 뒤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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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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