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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피
이 책은 1945년에서 1970년대 사이를 다룬다. 이 30여 년간은 일본 제국주의에서 해방되어 근대민족국가를 형성한 시기로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공간이라고 저자는 평가하고 있다.

이 무렵에 일어난 주요 사건들을 빠른 속도로 스케치 하고 있는데,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를 넘나들다가 제주4·3을 말한다. 계속해서 국가보안법, 전태일, 김지하의 오적으로 이어지는 궤적을 따라가는 것이 때로 숨이 차다.

모두 사연이 적지 않은 굵직굵직한 일들이라 자칫 주마간산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허나 지은이는 이런 지적에서 자유로워 보인다. 그 나름 역사를 서술하는 접근법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접근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인데, 저자는 이러한 시각을 ‘이중나선’이라고 부른다. 하나는 ‘근대민족국가 형성’이라는 나선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 혹은 국어’의 나선이다. 두 나선은 서로 민족공동체 건설이라는 이데올로기 아래 결속관계를 맺어왔는데, 우리 사회가 양자를 서로 떼어놓고 관찰해왔다고 지적한다.

쉽게 말해, 저자가 바라보는 역사는 말하려는 자와 이를 막으려는 자의 투쟁으로 요약된다. 이런 전쟁과 같은 싸움 속에서 사람들을 종종 말을 잃기도 했다. 제주4·3이나 강력한 독재의 출현은 ‘실어증’을 불러온다. 어떤 말은 아예 입에도 올리지 못하게 하는 통제는 실로 공포였으리라. 술에 취해서도 말 실수를 하지 않을까 긴장을 해야 하는 것은, 비유가 아니라 실제 감옥에 갈 수도 있는 실존의 문제였다.

혹은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억압하기도 하는데, 말의 표현이나 방식을 문제 삼는 것이다. 이는 국어정화운동 혹은 순화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드러난다. ‘독재시대’와 ‘한글사랑정책’을 연결시켜서 그 안에는 독재 권력의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는 분석이 모두 타당한지는 의문이다. 물론 그 시대에는 그것 역시 말하려는 자와 이를 막으려는 자의 투쟁이었다는 점은 수긍이 간다.

결국 저자가 관심을 갖고 파헤치는 것은 ‘권력’이라고 할 수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해 ‘국가’권력과 ‘언어’권력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국가권력을 직접 분석하지는 않는다. 주로 ‘언어 혹은 국어’가 형성되는 과정에 개입하는 국가권력의 얼굴을 들춰내서 권력화 되는 국어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흔히 ‘국어’에는 순수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은 국어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권력관계를 그려내기도 한다. 이는 순수성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가령 한글전용론자와 국한문혼용론자의 대립,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문맹퇴치운동의 배후가 그러하다.

이러한 권력관계는 개개인을 구속한다. 멍에가 되어 언어선택의 자유와 취향을 짓누르고 자기검열을 하도록 만든다. 현실은 잔뜩 오염되어 있는데 부조리한 사회적 현실에는 눈 감은 채, ‘올바른 언어생활’만 강조하는 것 역시 억압이라고 한다.

‘품위’ ‘인격’ ‘교양’이 있어야 한다는 명제 아래 국민들을 ‘순화’ 시키려는 자들은 의도하지 않더라도 지배질서 옹호론자가 된다는 분석이다. 누구를 위한 국어 순화인지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운동은 그 활동 동기와 무관하게 이용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언어를 ‘품위 있는 말’과 ‘비천한 말’로 분리해서, 품위 있는 말은 표준어라는 '선'의 지위를, 비천한 말은 금해야 하는 속된 말로서 '악'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 역시 허구인 경우가 많다고 본다. 일반 대중은 사투리 등 삶에서 체화된 말을 박탈당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책은 10년 전에 나온 <우리 시대의 언어게임>을 개편해서 다시 내놓은 것이라고 한다. 당시 문제의식이 여전히 의미가 있다는 서문에 공감한다. 가령 책에 등장하는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논란은 오늘도 여전히 미디어와 정치권의 중심 의제로 놓여 있으니.

인터넷 세상이라 말의 자유가 무한히 허용되었다는 평도 있지만 표면을 바라본 것에 불과하다. 말을 둘러싼 규제와 암투는 여전하다. 게시판 금칙어는 늘어가고 있으며, 자기가 듣기 싫은 말을 하는 자를 가두려는 움직임 또한 그치지 않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고길섶 지음/앨피 펴냄


스물한 통의 역사 진정서 - '삐라 공방전'부터 '막걸리 보안법'까지

고길섶 지음, 앨피(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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