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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사앞 검찰 깃발과 태극기.
ⓒ 오마이뉴스 권우성
불필요한 논란을 피하기 위해 한가지만 분명히 해두자. 강정구 교수의 발언에 대한 법적 판단은 법원에 맡기면 된다. 한국전쟁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주장들이 국내외 학계에서 존재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고, 크게 보면 강 교수의 해석도 그 가운데 한 부류일 뿐이다. 그렇다면 강 교수의 주장을 평가하는데 있어 가장 바람직한 것은 학계내에서 상호비판과 토론과정을 통한 평가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사회적으로 수용되기 어렵고 이미 뜨거운 논란거리가 된 것이 현실이라면, 그에 대한 법률적인 판단은 법원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시간이 걸려야 결론이 나게되어 있는 문제이다.

따라서 지금 화급한 문제로 떠오른 것은 강 교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편에 서있던 검찰의 문제가 더 긴급하고 중대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막 말로, 강 교수 개인의 주장이 무엇이든간에, 그의 발언 하나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일부 신문들이 연일 대서특필하지만 않는다면, 그냥 제기되었다가 사라지는 수많은 주장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검찰은 다르다. 대한민국 검찰이 어떤 가치와 정신을 갖고 존재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는 나라에 중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문제이다. 우리가 이제 강 교수의 발언 보다 검찰을 향해 눈을 돌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의 본질, 변하지 않는 검찰의 모습

천정배 장관의 지휘권 행사로부터 김종빈 검찰총장 사표 수리로 이어진 과정을 정권과 검찰간의 대결로 해석하면 문제의 본질이 호도될 위험이 크다. 그것은 검찰이 지휘권 행사의 부당성을 '정치적 중립의 훼손'으로 설명하며 본질을 왜곡시켰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문제의 본질은 시대가 변해도 변할 줄 모르는 검찰의 모습에 있다. 혹시 검찰은 '시대가 변한다'는 말을 '정권이 변한다'는 말과 동의어로 해석할지 모르겠지만, 전혀 다른 의미이다. 검찰이 변해야 하는 것은 정권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세계적으로 시대의 정신과 가치가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우리 검찰도 이제는 발맞추어 한다는 이야기이다. 매우 단순하지만, 근본적인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지금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파문을 일종의 정치적 싸움 수준으로 생각하는데서부터 검찰의 잘못은 시작되고 있다. 검찰이 변화하고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은 여야의 문제도 아니요, 특정 정권의 문제도 아니다. 공안사건에서도 인신구속을 신중히 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지휘권 행사가 정권과 여당의 편에 선 것으로 받아들였다면, 그것이야말로 검찰의 인식이 갖는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다.

이번 과정에서 무엇보다 유감스러운 것은, 검찰조직의 보호에만 모든 관심을 쏟는 검찰의 모습이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공안사건에 대한 검찰의 접근은 어떠해야 하는가, 인신구속은 어떤 기준 위에서 처리되어야 하는가 같은 의제들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오직 '검찰 지키기'에만 나선 모습은 검찰조직의 목표와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드러내고 있다.

법에 근거한 지휘권 행사는 과연 검찰총장이 그만두어야 할 정도로 부당한 일이었을까. 강 교수에 대한 수사를 하지말라는 지휘를 내렸다면 그런 항의가 설득력이 있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인신구속에 신중을 기하기 위해 불구속 수사하라는 지휘를 내린 것은, 검찰 내부의 이야기를 빌어도 "명백히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이런 사안을 가지고 검찰이 그토록 반발하는 것은, 결국 그 누구도 검찰에 대해 간섭하지 말라는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좋다. 단 그같은 주장이 사회적으로 수용되려면, 우리 사회에서 검찰이 절대적인 정당성을 갖고 있다는 전제가 성립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있는 검찰의 모습은 어떠한가.

송두율 교수 사건때 검찰이 과잉대응을 했음은 법원의 판결을 통해 확인된 바이다. 보수여론이 들끓은 공안사건이라는 이유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 고백하고 청산할 과거사를 찾지못하고 있는 기관이 또한 검찰이다. 더 나아가, 대표적인 조작의혹사건으로 꼽히는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진상조사에도 자료협조를 거부하며 비협조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 검찰이다.

다른 영역에 관해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공안사건에 관한한 가치와 잣대가 거의 변하지않은 것이 지금 검찰의 모습이다. 강 교수 문제와 지휘권 행사에 대한 검찰의 과잉반응은 공안사건에 대한 검찰의 무(無)변화가 낳은 필연적 결과이다.

세계는 물론이고 한반도에서도 냉전이 붕괴되고 있는 지금도 1980년대식 잣대를 들이대며 공안사건 수사를 하는 검찰의 입에서, 어떻게 간섭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것인가. 그럴 자격이 있는가를 먼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과거 냉전시대의 사고에 갇혀 그것만을 정의라고 신봉하고 있는 검찰에 대한 '간섭'은 더 필요하면 했지, 없앨 일은 아닌 것 같다.

검찰은 '보수 3각 연대'의 일원?

▲ 지난 4월 4일 김종빈 신임 검찰총장 취임식에 참석한 검찰간부들. 시대의 변화 속에서 공안사건에 대한 검찰의 접근은 어떠해야 하는가, 인신구속은 어떤 기준 위에서 처리되어야 하는가 같은 의제들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오직 '검찰 지키기'에만 나선 모습은 검찰조직의 목표와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 묘한 일이 있다. 검찰과 관련된 일들이 불거질 때마다 정치권에서는 한나라당이, 언론에서는 조·중·동이 검찰의 편을 들고 나선다. 아니 편을 드는 정도를 넘어, '한나라당 - 조·중·동 - 검찰'의 3각 연대라도 형성되는 듯한 분위기가 되고 만다.

모략인가? 번번이 그러지 않았던가. 노무현 정부 초기에 검찰인사 문제 때 그러했고, 송두율 교수 수사 때 그러했으며, 공직부패수사처 설립문제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대한민국 보수의 '대표선수'들은 매번 검찰의 든든한 지원세력이 되주곤 할까.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이 3각 커넥션이 갖는 의미를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지금 대한민국 검찰이 우리 사회에서 서 있는 지점은, 굳이 긴 설명 안해도, 이 하나의 장면으로 설명이 되고도 남는다.

강 교수 발언 파문으로 시작된 이번 사태는 결국에는 검찰의 문제로 귀결되고 있다. 누구의 통제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 실제로 공수처 설립, 검·경 수사권 조정 같이 검찰조직의 권한과 관련된 문제가 제기되면 검찰은 가히 조직적인 저지에 나서왔다. 검찰이 조직적인 힘을 무기로 버티면 무엇하나 변화될 수 없는 것이 그간의 상황이었다. 검찰이 우리 사회의 절대선이고, 최고의 권력기관이 아닌한 이래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다.

지휘권 행사 파문에서 검찰이 보여준 모습은, 오히려 검찰개혁이 왜 필요한가를 충분히 설명해주고 있다. 얼마전 퇴임한 유지담 대법관의 퇴임사의 한 대목이 생각나서 여기에 옮긴다.

"이제 35년을 몸 담았던 법원을 떠나면서 제가 무엇보다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권력에 맞서 사법부 독립을 진정코 외쳤어야 할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에는 침묵하였으면서, 정작 사법부에 대한 경청할 만한 비평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때 이를 외면한 채 '사법권 독립'이라든지 '재판의 권위'라는 등의 명분으로 사법부의 집단이익을 꾀하려는 것으로 비쳐질 우려가 있는 움직임에도 냉정한 판단을 유보한 채 그냥 동조하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환송을 받기보다 용서를 구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진정 이 소리를 해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우리 검찰은 '경청할만한 비평을 겸허히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있는지, '검찰권 독립의 명분으로 집단이익을 꾀하지'는 않고 있는지, 여러 가지 물음이 떠오르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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