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도 쉬어가는 신선의 나라, 바람도 숨을 죽이는 오백나한의 고향에 가을이 저문다. 한라산의 최고의 단풍은 영실에서부터 시작된다. 수백 개의 기암이 마치 ‘나한’ 같다고 하여 오백나한이라고 불리우는 영실의 기암괴석에 누군가 군불을 지폈다.
한라산 영실의 기암괴석은 자연현상으로 이루어진 화산의 분출이라 하지만, 해발 1400고지에서부터 1600고지 즉, 영실의 전망대까지 능선에 서 있는 크고 작은 기암은 신의 존재이다.
사성체를 깨닫고 십이인연의 법을 중득하는 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보살을 행하는 자. 이렇듯 오백성자가 모여 있는 한라산 영실은 지금 가을이 빨갛게 타오르고 있다.
석가여래가 설법하던 영취산이 이만큼 아름다웠을까? 삼명과 육통을 성취한 부처님의 제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 영취산. 그 영취산은 오백나한의 제일결집이다.
형형색색의 천태만상 기암괴석의 가슴에는 노란 가을빛이 비춰지고, 아라한의 콧수염에는 빨강 단풍잎이 수를 놓았다. 알록달록 다홍치마를 걸쳐 입은 오백성자 머리위에 구름이 머물러 있다.
누가 소리를 질렀을까? 갑자기 나타난 구름은 어느새 아라한의 몸을 감싸고 신선처럼 사라져 버린다. 한라산의 기상은 마치 신들린 산 같다. 파란 하늘가에 가을 산의 능선이 드러누워 있다가도 어느새 구름이 온 산을 덮어 버리는 신선이 사는 나라. 천태만상의 바위 군상들이 모두 일어서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석실의 풍광은 신비 그 자체이다.
미륵존불암의 머리에도 빨갛게 단풍이 들었다. 오백나한의 암상은 구름으로 목도리를 둘렀다. 가을이 추운가 보다. 빨갛게 익어가는 단풍 잎 사이로 아라한의 군상이 무리를 이룬다.
단풍이 너무나 아름다워 눈물이 나는 1400고지에 서니 가을이 절정이다. 종이가 없던 시절 나뭇잎을 이용하여 부처님의 설법을 적어 후학을 가르쳤다는 ‘패엽경’을 생각하니 단풍잎 하나하나에 부처의 설법이 적여 있는 듯 하다.
구름 따라 무리를 이루는 여행객들이 탄성을 지른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랴,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랴, 정신이 없지만 머리 위에는 벌써 가을을 재촉하는 낙엽이 떨어지니 시간의 덧없음에 가파른 계단길을 뒤돌아 본다.
바람도 숨을 죽이는 영실 자락에 병풍바위는 끄덕도 하지 않는다. 그 병풍바위에도 누군가가 군불을 지폈다. 아른아른 연기가 솟아오르더니 금방 벌겋게 석벽이 달아오르는 계절의 운치. 역시 가을은 사람의 마음까지도 달아오르게 만드는 마술사 같다.
병풍바위 앞마당에는 벌써 가을 잔치가 열렸다, 양탄자를 깔아 놓은 앞마당에는 조릿대가 소곤거리고 한라산에 자생하는 모든 식물 등이 빨간 립스틱으로 짙게 가을 화장을 한다.
양탄자 위에서 홀로 서 있는 아라한의 표정은 수수께끼의 주인공이다. 천사 같기도 하고 악마 같기도 한, 그래서 사람들은 산을 오르며 스스로의 마음을 정화시킨다. 그리고 저마다 그 바위를 가리키며 의미를 부여한다. 자연을 늘 그 자리에 서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 사물에 대하여 나름대로 해석을 하고 '허'와 '실'을 따져 묻는다. 능선에 우뚝 서 있는 바위의 군상들을 마치 오백성자로 착각하듯이 말이다.
떨어지는 단풍잎에 부처의 설법을 적어 자연에 머무는 즐거움. 한라산 영실의 가을 진수는 불타오르는 오백나한의 깨달음에 있다.
덧붙이는 글 | 10월 22일 한라산 영실 산행기입니다.
한라산 영실 단풍 절정은 10월 25일-30일로 예상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