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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한국간질협회장
허균 한국간질협회장 ⓒ 오마이뉴스 이성규
간질하면 먼저 무엇이 떠올릴까? 아마도 발작, 경기, 거품을 열거할 것이다. 그리곤 너무나 자연스럽게 "보기만 해도 너무 혐오스럽더라"라는 느낌을 털어놓을 것이다.

간질우의 발작증세를 맞부닥쳤을 때 일반인들은 반사적으로 혐오스러움을 표시하거나 혹은 두려움을 나타낸다. 때론 "저래서 어떻게 사회생활을 할까"라고 측은함을 표시하며 혀를 내차기도 한다. 심지어 기피하거나 눈앞에서 마주하기조차 꺼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사회적 통념은 비단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하늘병', ' 몸쓸병', '지랄병'이라는 속칭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 간질환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배타적 사회문화의 희생양이 돼 왔다. 그들은 늘 사회 속 그늘에만 머물러야 했고 정상인과의 대면 자체를 피하며 살아야 했다.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그랬다.

오랜 오해와 편견 속에서 굳어져 온 통념은 21세기에 접어든 오늘 날에도 개선의 여지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 반면 치매와 같은 질환은 언제부터인가 공적 보호의 틀 안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그렇지만 간질환자에 대한 차별만큼은 좀처럼 변화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여전히 사회는 그들을 또 다른 '시선의 감옥'으로 내몰고 있다. 단지 보기에 혐오스럽다는 이유에서다.

허균 한국간질협회 회장(아주대 의대 교수·신경과)은 강고한 콘크리트벽처럼 굳어진 간질에 대한 편견과 오해와 20년째 맞서고 있다. 지난 19일 수원 아주대병원 연구실에서 만난 허 회장은 30일 개최될 '간질환우를 위한 사랑의 문화공연'을 준비하느라 무척 분주해 보였다. 기자와 마주앉은 그는 간질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에 대한 얘기를 먼저 꺼냈다. 또 얼마나 간질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지를 검증해보려는 듯….

"평범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발작할 확률은 9%입니다. 그만큼 발작은 굉장히 흔한 증상이라는 말입니다. 그 가운데 발작이 계속 반복되는 증세를 가진 사람은 전인구의 1~2% 정도입니다. 현재 치매환자가 1% 정도이고 앞으로 15년이 지나면 전 인구의 2~3%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것과 비교하면 거의 비슷한 수준입니다."

유병율 1~2%. 의학적으로도 이 수치면 흔한 질병 축에 속한다. 하지만 치매와 유병율이 비슷하면서도 차별의 정도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다고 허 회장은 설명한다. 비교대상의 적절성 여부를 떠나 간질환자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그만큼 심각하게 왜곡돼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난치병? 치료받으면 80%가 1년 내 발작 사라진다"

허균 한국간질협회장
허균 한국간질협회장 ⓒ 오마이뉴스 이성규
그는 간질이라는 질환이 나쁜 병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생물학 적으로 뇌에서 잠시 스파크가 발생해 일어나는 단순 병세라는 것이다. 유전병이라느니, 불치병이라느니 하는 세간의 선입견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잘못 알려진 정보 때문이다. 그는 "선진국의 모든 의료 시술이 한국에 적용된다는 가정 하에 발작이 생기고 나서 제대로 진단받고 치료를 받으면 80%가 1년 내에 발작이 사라진다"며 불치병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했다.

오늘까지 멀쩡하던 사람도 당장 내일 간질환자가 될 수 있다고 허 회장은 말했다. 교통사고나 뇌경색, 뇌출혈, 뇌염 등을 앓아 뇌손상이 발생하면서 주기적인 발작 증세를 겪을 수 있다는 것. 그 비율만 전체 간질환자의 약 30% 정도라고 한다. 선천적이라느니 하는 그릇된 고정관념을 빨리 털어내라는 얘기였다. 간질환자가 마치 매일매일 경기나 발작증상을 일으킬 것으로 착각해서도 안 된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이러한 오해가 불식되기는커녕 하나의 정설처럼 굳어져 온갖 사회적 차별을 낳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유전병이라는 소문 때문에 간질우가 배우자를 만나지 못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허 교수에 따르면 간질우의 미혼율은 40%에 육박한다.

아울러 취업에서도 상당한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2000년 보건복지부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간질우들의 무직률이 무려 55.9%에 달한다. 간질우의 절반 가량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간질환자에게 제일 힘든 것이 결혼이다. 유전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전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혹 결혼했다가도 경기를 일으키면 이혼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취업도 너무 힘들다. 아예 뽑지를 않는다. 뽑았다가 발작을 일으키면 나가라고 한다. 정부차원의 지원시스템이라도 갖춰져 있으면 불만이라도 토로할 텐데 오히려 손해를 짊어져야 한다."

결국 이러한 인식은 낙인효과를 불러와 간질우들을 더욱 움츠리게 하고 있다. 마치 신체 일부에 주홍글씨를 새기고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때문에 일부는 사회 속에 고립된 채 폐인이 되거나 빈곤에 허덕이다 길거리에 나앉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나마 적절한 치료를 통해 경기 증세의 조절이 가능한 사실상의 정상인들은 간질환자라는 사실을 숨기며 남모르게 삶을 살아야 한다. 이 가운데에는 의사나 아나운서와 같은 전문직 종사자도 포함돼 있다.

허 회장은 공공의료가 잘 갖춰져 있는 뉴질랜드의 예를 들었다. "그곳에선 간질을 질병으로 보지 않을 정도"라며 그와 같은 문화가 정착하지 못한 한국의 현실에 못내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비유를 들었다.

"회식 자리에서 과음하고 주사를 부린 사람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않나. 그러한 현상에 대해서는 열려있으면서 왜 간질환자의 경기에는 그렇게 닫혀 있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

경련발작을 회식자리 주사 정도로 생각하고 이해준다면 간질우의 정상적 사회생활이 충분히 가능한데, 그러한 관용을 왜 베풀지 못하는 것인지 허 회장은 답답해했다

"차별해소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노출 꺼리는 간질우들

허균 한국간질협회장
허균 한국간질협회장 ⓒ 오마이뉴스 이성규
좌절을 겪고 분노만 토해낸 것은 아니다. 허 회장은 우선 간질을 장애 범주에 넣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간질협회와 간질우 모임인 장미회 등도 헌신적으로 나섰다. 그 결과 2003년 7월 간질을 장애인 범주로 포함시키는 성과도 이뤄냈다.

하지만 "이제 차별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지"라는 생각에 다다를 즈음 자신이 성급했음을 곧 깨달아야 했다. 정작 움직여줘야 할 주체인 간질우들이 멈칫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러내는 순간 혐오스런 시선과 마주쳐야 하는 그들로선 '커밍아웃' 자체가 두려울 수밖에 없는 탓이다. 혹시나 감내해야할지도 모를 불이익도 그들이 침묵하게 되는 까닭이다. 속상하는 마음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의사의 신분으로는 한계가 있다. 환자들이 직접 나서지 않는 한 간질우를 둘러싼 불합리한 구조는 깨지지 않는다. 본인들이 직접 외로움을 호소하고 내뱉어야 한다. 능동적으로 활동해 줬으면 좋겠다."

그와의 인터뷰는 이렇게 간질우에 향한 당부의 말로 마무리됐지만, 그 당부가 이번 행사의 성공으로 이어질지에 대해 그는 여전히 확신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간질우들이 사회의 혐오적 편견의 벽을 깨고 '시선의 감옥'으로부터 탈출을 감행할지 그래서 더욱 궁금해진다.

간질우의 당당한 '커밍아웃' 프로젝트 성공할 수 있을까
오는 30일 서울 시청앞 광장서 제1회 간질우 문화행사 개최

한국간질협회와 대한간질학회, 사단법인 장미회는 오는 30일 오후 2시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2005 간질환우를 위한 사랑의 문화공연’을 개최한다. 모토는 ‘OUT OF THE SHADOW'.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자는 의미다.

이미 수십회를 거쳤을 법한 이 행사는 의외로 협회와 학회가 개최하는 첫 번째 행사다. 그 이유에 대해 허균 한국간질협회장은 “그만큼 간질에 대한 사회의 왜곡된 인식이 뿌리 깊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답했다.

이 행사 기획자이기도 한 허 회장은 “2003년 장애인 범주 확대 사업을 추진하면서 공적인 무언가가 뜨지 않는 한 사회적 편견은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기획 취지를 설명했다.

이를 위해 그는 이미 한 두 달 전부터 이 행사의 준비에 매달려 왔다. 그는 지난 23일부터는 일주일간을 ‘간질주간’으로 선정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그는 행사 장소를 시청 앞으로 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간질우들은 부끄럽더라도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야 한다. 그 하나의 아이디어로 대로변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이 행사가 간질우들의 ‘커밍아웃’을 알리는 첫 번째 행사로 기록될 수 있을지 아직 미지수다. 주최 측은 내심 간질우들의 당당한 드러냄을 기대하고 있지만, 간질우들이 과연 두터운 사회적 편견의 벽을 깨고 광장 앞에 모습을 드러낼지 낙관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허 회장은 “간질에 대한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인식을 덜어주기 위해 다양한 노래와 음악을 준비했다”며 “이를 통해 과감하게 스스로를 노출했으면 한다”며 간질우들의 많은 참여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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