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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세계의 큰 그릇, 신정희 선생
그릇세계의 큰 그릇, 신정희 선생 ⓒ 전영준
하북면 지산리 574번지, 통도사 뒤 영축산 자락. 거기엔 반세기 동안이나 잊혀져 있던 조선사발을 다시 재현시킨 우리 그릇, 세계의 실로 큰 그릇이 있다. 조선사발의 명맥을 잇는 집념의 장인, 신정희(申正熙) 선생이다. 70평생을 전통도자기 재현에 몸 바친 선생의 우리 그릇에 대한 열정은 이녁의 가마 속 장작불처럼 오늘도 뜨겁게 불타고 있다.

일제 강점기였던 1930년에 경남 사천의 한 갯마을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릴 적부터 집안에서 사용하던 사기그릇과 오지그릇, 질그릇 따위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그러다가 열여덟 살 때, 우연히 한 시인으로부터 깨어진 청자 사금파리 하나를 얻은 것이 인연이 되어 그만 우리 그릇의 신비에 홀리고 말았다.

그 때부터 무작정 전국의 가마터를 찾아 헤매며 옛 조상의 숨결과 손길이 어려 있는 사금파리들을 주워 모으는 가운데 그의 나이 스물이 된 1950년에 한국전쟁을 맞았다. 당연히 그도 전쟁터로 불려갔다. 그러나 그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도 그의 배낭에는 사금파리가 가득 들어 있었다. 군장 검사 때 이것이 발각되어 "너는 사금파리를 가지고 전쟁을 하느냐?"며 호된 기합을 받았지만, 그의 머리 속에는 오로지 도자기밖에 없었다.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결혼을 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딸린 식솔이 생겼다고 해서 사금파리에 대한 그의 집념이 떨쳐졌던 것은 아니다.

아들 신한균과 함께 가마의 불꽃을 들여다보고 있는 신정희 선생(왼쪽)
아들 신한균과 함께 가마의 불꽃을 들여다보고 있는 신정희 선생(왼쪽) ⓒ 전영준

"사람들이 내보고 '그릇 귀신이 들었다'고 하더군. 하기사 그런 말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이제. 가정은 내팽개치고 나돌아 댕기니 우째 그런 말을 안 듣겠소? 오죽하면 집에서는 굿을 세 번이나 했을까. 그러는 중에 어느 날 딸아이가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오는데, 그 때는 정말 눈앞이 캄캄하데. '내가 시방 무슨 짓을 하고 있노' 싶기도 하고…."

딸의 죽음이 순전히 '내 탓'이라며 가슴을 쳤지만, 사금파리에 대한 그의 관심과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집 밖을 나도는 가운데 가정을 꾸려나가는 일은 전적으로 아내의 몫이 되고 말았다. 당시 젓갈장사를 하며 어렵사리 자식들을 건사했던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생채기다. 이제는 40대 중반의 중년이 되었으나, 채 말을 배우기 전 어머니의 등에 업혀 장삿길을 따라다녔던 그 때의 어린 아들 한균씨의 회상을 들어본다.

"아버지는 거의 집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얼굴을 잊을 만하면 집에 오셨는데 오실 때는 항상 낡아 헤진 큰 가방 하나를 어깨에 메고 오셨지요. 행여나 가방 속에 눈깔사탕 한 개라도 있을까 싶어 가방을 뒤져보면 나오는 것이라곤 맨 깨진 도자기 파편인 사금파리들뿐이었습니다. 그 때는 어린 마음에 맛있는 과자가 아닌 사금파리만 가득 가져오시는 아버지가 그토록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아버지를 원망하며 유년시절을 보냈던 한균씨는 철이 든 다음에야 아버지가 하는 일이 지니고 있는 큰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도예가 신정희를 가장 존경하는 신정희의 철저한 추종자가 된 한균씨는 이제 아버지의 대를 이어 어엿한 사기장으로서의 일가를 이루었다. 한균씨뿐 아니라 용균, 경균, 봉균 등 선생의 네 아들이 모두 그릇장이가 되었다니, 지난날 선생의 가솔들이 치렀던 고생만큼 그 보람의 열매 또한 적지 않은 것 같다.

"내 인생에 있어서 도자기는 내 종교나 마찬가지요. 이거를 어디 내가 누구한테 배웠남? 스승도 없이 그저 내 혼자, 내 힘으로 여기까지 왔으니까. 그러니 이건 내가 만든 나의 종교지. 도자기는 내 인생의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렇다. 선생에게는 스승이 없었다. 굳이 스승을 찾자면 전국의 산야에 흩어져 있는 사금파리들이었다. 선생은 그 사금파리의 뿌리를 찾고 그것을 오늘에 재현해 내기 위해 이녁의 청춘을 오롯이 사금파리에 묻어버렸다.

당시에도 도예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선생처럼 옛 조선 사발을 오늘에 되살려 내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사기그릇이라 불리던 밥그릇, 국그릇들과 요강, 화분 따위를 만들고 있었다. 그것들을 만드는 도자기 공장이 이곳저곳에 널려있었고 물레 차는 대장들도 많이 있었다.

그 때만 해도 플라스틱과 스테인리스 제품이 판을 치기 전이라 밥상 위의 주발에서부터 일상의 생활용기들이 대부분 도기들이어서 도자기를 빚는 일이 꽤 쏠쏠한 재미가 있었던 때였다. 그러니 돈도 안 되고 아무짝에 쓸모없어 개 밥그릇 정도로 치부되던 막사발에 연연하는 선생의 모습은 한갓 부질없는 기행으로 비칠 따름이었다. "왜 이 필요 없는 것을 이토록 어렵게 만들려고 하십니까?"라며 노골적으로 충고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선생에게는 돈이 되고 안 되고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조선 사발을 재현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전통의 맥이 여기서 이대로 끊겨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스승도 없이 옛 가마터에서 나온 사금파리 조각만 보고 생짜배기로 달려든 일이라 실패에 실패가 거듭되기만 했다. 만들고는 깨어버리고 깨어버릴 사발을 또 만들고….

선생의 옛 사진첩에서
선생의 옛 사진첩에서 ⓒ 신정희

전문가도 못 알아 본 완벽한 재현

계속해서 유약을 입히고 불을 때기를 수백, 수천 번 되풀이 하던 끝에 마침내 조선 사발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선생은 드디어 마음에 드는 작품들을 들고 서울 인사동 고미술품상을 찾았다.

"아니 이런 귀한 자기(瓷器)들을 다 어디서 구했소? 구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을 텐데…"라며 골동품상들은 다투어 선생이 가져간 작품 전량을 사들였다. '옳다구나, 인자 됐구나' 싶어 날아갈 듯한 심정이었다.

당시 전문 감정가들조차 선생이 재현한 사발과 옛것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다니 선생이 그토록 염원했던 조선 사발의 재현이 비로소 완벽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 때가 1968년 말이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처음 국내에서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의 도예계가 먼저 알고 "일본의 국보 '이도 다완'이 재현되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일본에 알려지고 난 뒤에야 국내에도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선생의 조선 사발 재현 현장이 신문과 방송을 장식했다.

이 때 찾아 온 기자들이 '무슨 일이냐'고 묻는 말에 선생은 무심코 "조선의 '막사발'을 재현했다"고 답한 것이 그대로 옮겨져 국내 매스컴이 일제히 '막사발 재현' '500년만에 되살아난 막사발'이라고 보도했다. 선생은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선 사발 중에서 일본인들이 가장 숭상하던 '이도 다완'이 정말로 '막사발'인 줄 알고 있었다.

"내 무지의 소치였어. 우리 옛 사기장들이 오묘한 솜씨로 빚은 사발을 '막사발'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오. 남들이 부르는 대로 생각 없이 '막사발'이라고 한 것은 나의 가장 큰 실수였어요. 다행히 나의 큰아들 한균이 조선 사발에 대한 오랜 연구와 조사로 '막사발'의 오명을 벗기려고 애쓰고 있는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고 또 고맙기도 한 일이지요."

선생의 국내 첫 전시회는 1979년 6월 15일부터 22일까지 서울 롯데호텔 전시장에서 열렸다. 한국방송공사가 주최한 이 전시회는 해외동포 모국방문돕기 성금모금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지만 그보다도 임진왜란 후 대가 끊긴 것으로 알았던 노란색유약 사발과 연회(練廻)항아리 등을 재현한 기술이 사반세기를 흙에 바친 한 장인의 집념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 이전 일본에서는 75년부터 여러 차례의 개인전과 초대전을 가져 일인들을 매료시켰고 76년 동경은좌 송판옥에서 가진 첫 초대전 때는 일왕의 아우이며 저명한 도예전문가인 고송궁의 찬사를 받았다. 또 77년에는 독매신문주최로 구주 9개도시 순회전을 가지기도 했다.

"우리 조선의 서민대중이 쓰던 사발을 일인들은 모완(慕碗)이라 하여 가보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어요. 우리 국민들은 그저 평범한 밥그릇 정도로 알고 있지만 그들은 내가 만든 전승사발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가락지를 뺀 두 손으로 들어올려 보배처럼 감상하더군요. 남의 나라에서도 우리 그릇을 이처럼 귀중하게 여기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조상의 얼과 생활의 멋이 깃들인 전통자기의 참된 가치를 잘 모르는 것 같아 지난 79년의 첫 개인전에는 사발류 사십여 점과 전통백자를 재현 또는 응용한 항아리와 병 삼십여 점 등 모두 70여점을 선보였는데 전시장에 오신 분들이 모두 감탄을 하시더군. 그게 청춘을 그릇에 바친 나한테는 보람이었지요."

선생의 도자기는 일본에서 크게 각광을 받고 있지만, 이제는 국내에서도 그 가치를 알아주는 이들이 무수히 많다. 일인들은 선생이 재현한 비파색분청사발을 가리켜 '환상의 그릇'이라고 칭했으며, 국내에서는 선생의 노란색 사발을 일러 '전승도예의 개가'로 평가하면서 모두들 경탄해 마지않았다.

70년대 당시 정계의 거물이었던 김종필씨가 일본에 갈 때 선생의 작품을 가져가 선물한 것이 알려진 뒤로 한국 정부도 선생을 한국 도예계를 대표하는 도예가로 인정하게 되었다. 선생의 작품은 한국을 찾는 국빈이나 각국 외교사절들의 선물로도 요긴하게 쓰이게 되었다. 전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선생의 작품이 전해졌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내 가마가 본시 경북 문경에 있었는데 지금의 가마가 있는 이곳 통도사 부근으로 이요(移窯)해 온 것은 1975년이오. 그러고 보니 양산생활도 30년이나 되었구먼. 지난날을 되돌아보니 그래도 '그릇귀신'이 들어 열병을 앓았던 때가 참 소중했던 시절이었어요. 내가 이 열병을 그토록 심하게 앓았기에 오늘날 우리나라에 조선 사발이 되살아났다고 확신하는 거요. 이제 내 나이가 일흔 여섯이나 되었지만, 그래도 '그릇 귀신'의 열병은 다 낫지 않은 것 같소. 아직도 우리는 조선의 옛 사발들을 옛 조선 사기장만큼 빚어내지 못하고 있거든. 다행이 내 자식들이, 또 내 제자들이 나의 뒤를 이어오고 있으니 이제 그들에게나 희망을 걸어볼밖에…."

도자기가 '종교와 신앙'이었듯이 도자기의 길을 종교의 신앙처럼 믿고 나가는 그릇장이가 우리나라에 많이 탄생해 주기를 바라는 선생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도자기는 손으로 빚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만드는 것"이라며 "그릇을 빚을 때 한갓 형태에만 집착하지 말아라. 흙에서 꼬신내를 느껴야 비로소 사기장이 될 수 있다"고 거듭거듭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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