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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내가 산의 높이를 얻기 위하여 아래쪽 언저리에서 발걸음을 떼고 있을 때 물은 계곡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물도 계속 길을 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물은 가끔 걸음을 멈추고 한자리에 고인다. 잠시간의 휴식이다. 물의 휴식은 맑고 투명했다. 올라간다는 것은 사실 저렇게 물처럼 내려오기 위해서가 아닐까. 흥겹게 졸졸거리며 산을 내려가다 가끔 걸음을 멈추고 계절따라 바뀌는 계곡의 정취를 즐기는 여유가 물의 걸음에 있다. 나는 올라가는 길의 초입에서 내려가는 길의 내 걸음걸이를 배운다.

ⓒ 김동원
덕주사의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초입에서 이 나무를 만났다. 나무는 흙이 고운 대지가 아니라 바위 위에서, 그것도 아득한 높이로 제 생명을 키워놓고 있었다. 나무가 딛고 선 바위는 공중으로 들려있어 아래쪽이 휑하니 비어 있었다. 바위는 생명이 뿌리내리기엔 몸이 너무 굳고 그 체온 또한 너무 차갑다. 가끔 이끼들이 바위의 냉기가 안쓰러워 그 위를 옅게나마 덮어주기도 한다. 그처럼 바위는 보통은 그저 이끼들이 이부자리를 겨우 펴는 자리였으나 나무는 그곳에서 무성한 생명을 가꾸었다. 나무의 삶은 힘들었을 것이나 보는 이는 그 삶의 생명력이 경이롭다.

ⓒ 김동원
가을 바람의 스산함이 산을 쓸고 가면서 한때 타는 듯 붉었던 단풍도 색이 바래고, 가지도 제 잎과 안녕을 고한다. 그러나 마지막 길은 아쉬운 법. 나무가지가 바람의 등에 실려 대지로 향하던 단풍잎 하나를 불러세웠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들의 얘기가 사각거리며 내 귀를 간지럽혔다.

ⓒ 김동원
한 아이가 산길을 올라간다. 아이는 맨발이었다. 나는 힘겹게 돌계단을 오르는데 아이는 징검다리를 건너듯 이 돌과 저 돌로 발을 옮겨놓으며 날듯이 가볍게 산을 오르고 있었다. 여기가 산이 아니라 개울인가? 나는 흠칫 놀라 주변을 돌아보아야 했다. 물대신 낙엽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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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뿐만이 아니라 아이의 아빠도, 또 엄마도 맨발이었다. 아이의 가족은 마애불이 있는 곳까지만 맨발로 산행을 하였다. 마애불 앞에서 엄마가 아이의 사진을 찍어준다. 그들이 맨발로 산행을 할 때 덕분에 나는 산길이 낙옆이 흐르는 물길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 김동원
월악산의 마애불. 덕주사 쪽에서 1.3km 정도 올라가야 볼 수 있다. 왜 부처님은 우리가 사는 곳으로 내려오지 않고 이렇게 산속 깊이 계신 것일까. 한걸음 한걸음 발길을 옮겨 어렵게 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면 갑자기 우리는 부처님을 내가 얻어낸 듯 뿌듯한 가슴이 된다. 말하자면 부처가 준 부처님이 아니라 내가 얻어낸 부처님이다. 산 속 깊이 은거하게 된 부처님의 깊은 뜻은 바로 그런 부처를 주려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제 생각이 맞는 건가요? 그 뜻을 물어보고 싶었으나 부처님은 말이 없었다.

ⓒ 김동원
마애불의 앞쪽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한그루 서 있었다. 은행나무와 높이가 엇비슷했을 때는 숲의 나뭇가지 사이로 노란빛이 저만치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 김동원
내가 완연한 높이를 가지자 저만치 아래쪽의 은행나무도 제 모습을 완연히 드러냈다. 좀전에 내가 있던 자리이다. 그곳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높이를 가지니 내가 있던 자리가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결국 높이를 얻으러 가는 길은 알고 보면 나를 보러가는 길인지도 모르겠다.

ⓒ 김동원
항상 높은 곳에 오르면 말라죽은 고사목을 만나게 된다. 나는 나무의 운명이 슬퍼서 이렇게 물었다. 나무야, 나무야, 어쩌다 네 운명의 마지막은 그렇게 되었니? 나무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거의 평생을 대지 깊은 곳으로 뿌리를 내리고 물을 길어올려 살아가고 있었지. 땅만 내려다보고 살았다고나 할까. 그러다 어느 날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었어. 파란 하늘이 머리 위에 한가득이었고, 구름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지. 그날부터 나는 하늘을 마시며 살고 싶었어. 그렇게 하늘을 호흡했더니 몸이 점점 말라 결국은 오늘의 나에게 이르렀지. 내 인생의 절반은 물을 길어올려 가꾸었던 초록빛 생명이었고, 나머지 인생의 절반은 하늘을 맘껏 호흡하며 하늘의 푸른빛과 흰구름, 혹은 붉은 노을을 대지로 실어나른 바쁜 삶이었어.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내 삶의 마지막은 찬란하기 이를 데 없었어."

ⓒ 김동원
제일 꼴찌로 산을 내려왔다. 호젓한 산길을 터덜터덜 홀로 걸었다. 길을 따라 물처럼 낙엽이 흐르고 있었다. 나도 내려가다 잠시 그 길에서 물처럼 엉덩이를 깔고 앉아 다리의 피곤을 달래며 쉬곤 했다. 내려가는 산길은 그냥 길이 아니라 내가 가는 길의 배웅이기도 했다. 배웅은 매우 극진하여 산길의 동행은 내가 산의 아래 자락을 벗어날 때까지 내내 계속 되었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 동시에 게재했다. 블로그-->김동원의 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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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갖고 돌아다니면 세상의 온갖 것들이 말을 걸어온다. 나는 그때마다 사진을 찍고 그들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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