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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회원들이 소설 <푸른노을>의 주인공 이금주 회장과 공동집필자인 황일봉 남구청장과 이운선씨에게 감사의 꽃다발을 전하고 있다.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회원들이 소설 <푸른노을>의 주인공 이금주 회장과 공동집필자인 황일봉 남구청장과 이운선씨에게 감사의 꽃다발을 전하고 있다. ⓒ 이국언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 유가족이 겪어야 했던 한과 아픔을 그린 소설이 현직 구청장과 공무원의 손에 의해 출간됐다.

한 전쟁 피해자의 생애를 통해 진정한 평화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화제의 책은 <푸른노을>(영민문화사/ 231쪽/ 9천원). 역작을 내놓은 공동 집필자는 황일봉 광주 남구청장과 직원 이운선(41·총무과)씨다.

<푸른 노을>은 실제 인물을 소재로 한 이야기다. 일대기 주인공은 결혼 직후인 23살 때 일제의 강제징병으로 남편을 잃은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이금주(86) 회장.

소설에는 이금주 할머니의 성장 과정, 특히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마지막 남은 혈육 외아들과 함께 살아야 했던 한과 눈물의 세월이 가슴 절절히 녹아 있다. 특히 슬픔을 딛고 지난 88년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를 결성한 이후,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벌여 온 법정투쟁 과정을 고비 고비 생생한 육성으로 전하고 있다.

"일본의 태도보다도 정부의 무관심과 냉대가 더 원망스러웠다"는 주인공의 말을 통해서 그동안 우리 사회가 얼마나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를 외면해 왔던가를 상징적으로 묻고 있다.

"침략전쟁 피해자 모두의 이야기, 일본에게 일침 줄 것"

황 청장은 그동안 광주유족회 전쟁 피해 할머니들과 남다른 인연을 맺어 왔다. 특히 고령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10년 넘게 나라를 대신해 법정 투쟁을 펴온 데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이를 사료로 남기기 위해 직접 소설 창작을 구상했다. 아울러 공동 필자 이씨도 1여년 전부터 자료 수집과 인터뷰를 위해 수십 차례 발품을 들여 왔다.

지난 14일 오전 11시 남구청이 주최한 '제3회 한국 콩 축제' 행사장에서 개최된 출판기념식에는 태평양 전쟁 피해 유가족 등 200여 명이 참석해 이날 소설 출간을 함께 축하했다.

이금주 광주유족회장은 인사말에서 "소설 속 이야기는 전쟁으로 처참한 고통을 몸소 겪고도 60년이란 세월을 치유 받지 못하고 시름 속에 살아야만 했던 우리 전쟁피해자 모두의 이야기"라며 "한 나라를 무참히 짓밟고도 반성하지 않는 일본인들에게 뜨거운 일침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최봉태 사무국장은 축사에서 "우리 나라에서 그동안 강제동원 전쟁피해자들은 2등 국민 취급을 받고 살아왔다"며 "진상규명위원회에서도 사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피해자 한 분 한 분의 소중한 기록을 역사적 남기는 작업에 나설 계획"이라고 말했다.

축사가 이어지는 동안 감정이 북받친 듯 이금주 광주유족회장이 눈시울을 적시고 있다. 옆은 최봉태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 사무국장.
축사가 이어지는 동안 감정이 북받친 듯 이금주 광주유족회장이 눈시울을 적시고 있다. 옆은 최봉태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 사무국장. ⓒ 이국언
14일 출판기념회 자리에는 일제 전쟁 피해 유가족 등 200여 명이 참석해 모처럼 훈훈한 시간을 가졌다.
14일 출판기념회 자리에는 일제 전쟁 피해 유가족 등 200여 명이 참석해 모처럼 훈훈한 시간을 가졌다. ⓒ 이국언

슬픔 딛고, 강제동원 진상규명에 '한 평생'
<푸른 노을>의 주인공, 이금주 할머니는...

평남 안주가 고향인 이금주(86) 할머니는 남편이 징병으로 떠나던 날, 그날 밤 구둣발자국 소리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남편 김도민은 평북 강계 출신으로 6대 독자였다. 전쟁 막바지 일제의 마수가 드디어 이 단란한 가정에까지 뻗혀 왔다. 남편에게 징용장이 날라 온 것.

당시 '묻지 마라 갑자생'이란 말이 있던 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결혼 만 2년이 못되고 생후 8개월 된 아들이 있을 때였다.

"자신이 독자여서인지 아들이 생기자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어서 커서 '아버지'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싶다며 하루에도 몇 번씩 애기 몸을 손 뼘으로 재보곤 했습니다. 남편이 떠나던 날 아들은 무심코 잠들어 있었습니다. 한동안 잠들어 있는 아들 모습을 들여다보더니 아기 손을 가만히 쥐면서 '건강해라'고 하더군요. 남편 얼굴에 핏발이 서 있었습니다."

도망쳐서라도 꼭 돌아오겠다는 남편은 끝내 45년 전사 통지서 한 장으로 되돌아 왔다.

"여생, 일본 양심 움직이도록 남김없이 쓸 것"

그녀는 1988년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발족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강제동원 진상규명 작업과 일본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한 법정 투쟁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현재 광주유족회가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7가지 소송의 대표를 맡고 있다. 광주유족회가 92년 일본의 공식사죄와 보상, 유골반환을 요구하며 동경 지방재판소에 제기한 일명 '1천인 소송'(1273명)은 당시 일본 재판사상 최대의 집단 소송으로 큰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이러한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이 할머니의 헌신을 빼 놓을 수 없다. 1200여 명에 이르는 회원들을 일일이 만나 각기 사연을 청취하고 기록하는 작업을 18년 동안 거듭하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온기도 없는 골방에서 홀로 작업하다 보니 무릎이 상하고 허리가 일찍 굽은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본 법정에서 모두 14번의 기각을 당하는 수모에도 좌절하지 않고 전국의 유족회원들과 달려 온 결과, 특별법 제정과 더불어 지난해 드디어 정부 차원의 '일제 강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 활동이 시작되기도 했다. 또한 한일협정 문서도 일부 공개돼 40년 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역사적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금주 할머니는 "나만 비통한 세월을 산줄 알았다가 그동안 고난의 길을 걸어 온 전쟁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며 "주어진 여생도 일본의 양심이 움직이도록 하는 데 남김없이 쓸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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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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