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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 성금 일천만원이 들어오던 날, 퇴근 길 학교 앞 은행 캐쉬에 들러 통장을 확인하고서 만세를 불렀던 필자
네티즌 성금 일천만원이 들어오던 날, 퇴근 길 학교 앞 은행 캐쉬에 들러 통장을 확인하고서 만세를 불렀던 필자 ⓒ 윤근혁
나는 요즘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직을 유지하느냐 마느냐로 깊이 생각하다가 당분간 쉬는 게 좋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시민기자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직이요, 철 밥통은커녕 쪽박으로 언제든지 자의로 물러날 수 있는 자리다. 하지만 요즘 따라 내가 눈치도 없이 그 자리마저 오래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티즌들은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얼굴을 원할 거다. “떠날 때는 말없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동안 네티즌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온 이로서 그분들에게 인사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기사를 올리지 않는 게 예의가 아닐 것 같아서 성원에 대한 감사인사와 그만 쓰게 된 사연을 드린다.

이 기사를 쓰다가 그동안 몇 꼭지나 썼는지 알고자 기자회원방으로 들어가니까 등록기사 586건이라고 나왔다. 2002년 7월 8일 <영웅을 찾아서(내가 보낸 기사 제목)>을 보낸 뒤 3년 남짓한 기간동안에 쓴 기사 량이다. 이 기사들을 쓰기 위해 국내기행은 물론 중국 일본 미국까지 누볐다. 이 기사를 쓰기 위해 컴퓨터 자판기를 얼마나 두드렸는지 모른다. 그런 때문인지 네티즌들의 열화 같은 사랑도 받아 언감생심 생각지도 못했던 워싱턴까지 다녀왔다.

쪽지함으로 온 메일

다시 기사를 쓰고자 초고꼭지로 돌아오려는데 쪽지함에 메일이 왔다.

제목 : 홍준수 선생님 관련.
보낸 사람 : 홍00

안녕하세요. 홍준수 선생님의 아들 홍00이라고 합니다. 아버님에 대한 글들을 찾다가 우연히 박도 기자님의 글을 보고 반가워서 이렇게 인사남깁니다. 날씨가 차갑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좋은 글들 기다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뜻밖에도 내가 가장 존경하는 고등학교 때 은사의 자제분이 보낸 메일이었다. 그분은 캐나다에 살고 있는 걸로 아는데 용케 내 기사를 본 모양이다. 그분의 아버지 홍준수 선생은 정말 훌륭한 분으로 사표가 될 양심과 도덕심을 가진 참 스승이셨다. 나는 홍 선생님에게 특별활동으로 교내 편집실에서 기사 작성법을 배우면서 학생기자 활동을 하였다. 내가 그동안 600꼭지 가까운 기사를 줄기차게 쓸 수 있었던 원천은 그 선생님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취재 중 어느 날
취재 중 어느 날 ⓒ 박도
인터넷 통합검색에 ‘홍준수’라고 치니까 선생님의 소식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홍준수 선생님은 중동고등학교에서 20여 년간 교편생활을 하다가 1974년에 캐나다로 이민 오신 후 캐나다 한국일보, 중앙일보 언론에 종사하였으며, 더욱이 한국일보에서 수년간 논설위원으로 칼럼니스트로 활약하시다 1999년에 타계하였습니다.

본 저서 <캐나다의 하늘 아래>는 캐나다한국일보에서 발행하였습니다. [Under The Canadian Sky] 제하 영문으로도 번역이 되었습니다.


뒤늦은 선생님의 운명 소식에 깊이 묵념 올리며, 내가 첫 작품집 <비어있는 자리>를 펴낼 때(1989년) '다시 뵐 그 날을'이라는 제목으로 담아서 홍준수 선생님을 기렸던 글을 선생님의 영전과 멀리 캐너다에 있는 유족에게 바치면서 이 기사를 마무리 한다.

네티즌 여러분!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편집실 기자 여러분들도.

다시 뵐 그 날을

홍준수 선생님!
선생님을 못 뵌 지가 30여 년이나 됩니다. 까까머리 제자가 벌써 반백의 중년이 됐는데, 선생님은 그새 백발의 할아버지가 되셨을 테지요. 졸업 후 모교로 선생님을 찾아갔을 때 캐나다로 이민을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왜 교단을 더 지키지 않고 떠나셨는지, 무슨 절박한 사정이 있었습니까? 선생님의 예지와 날카롭던 비판정신으로 볼 때, 그 동안 우리의 현실이 너무 암울해서 조국을 떠나지 않고는 못 베길 그 무엇이 있었던 것으로도 짐작됩니다.

그 새 숱한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리면 하얀 이를 드러내고 크게 웃으시던 모습이 선합니다. 저는 선생님으로부터 사회교과를 2년 간 배웠고, 또 교지 및 신문 편집 일로 곁에서 많은 사랑과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의 수업시간은 늘 재미있었고, 어려운 정치 경제 교과를 쉽게 가르쳐 주셔서 이해가 참 잘됐습니다. 그 방대하고 복잡한 경제 편을 선생님은 단 한 시간에 요약해 주실 만큼 ‘먼저 숲을 보게 하고 나무를 보게 하는’ 기막힌 수업이었습니다.

수업시간 중 틈틈이 들려주신 말씀들은 사회에 막 눈을 뜨려는 저희들에게 갈증을 풀어주는 시원한 샘물이었습니다. 오로지 ‘반공’만이 국시였던 무서웠던 그 시절에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배경이나 발달사와 장단점을 자세하게 학자의 양심에 따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현안 문제로 크게 노출되고 있는 빈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생산 못지않게 분배도 중요하며 이 문제를 소홀히 다루면 안 된다고 자본주의의 취약점인 ‘부익부 빈익빈’을 이미 그때에 지적하셨습니다.

그 무렵 한일국교가 정상화되고 재일 교포 기업인들이 국내에 한창 진출할 때였습니다. 그들이 모국을 위한다는 사업이 고작 껌이나 아이스크림 따위 소비재 상품만 만들어 코흘리개 돈이나 벌어들인다고 선생님은 그들의 기업정신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제 사고에 큰 충격을 준 일은 시험이 끝난 날 전교생이 단체로 단성사에 가서 영화 관람을 한 다음날 수업시간이었습니다.

그 영화의 제목은 잊었지만 6·25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미국영화였는데, 마지막 장면은 미국 흑인병사가 눈이 쌓인 고지에서 몰려오는 인민군 전사들을 기관총으로 신나게 쏘아 죄다 쓰러뜨리는 장면이었습니다. 우리들은 그 장면에 일제히 일어나서 박수를 치면서 영화관을 나온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런 우리가 못마땅하였나 봅니다. 다음 날 수업시간, “얘들아, 너희들은 마지막 장면에 열렬히 박수를 쳤는데, 총을 쏜 검둥이는 어느 나라 사람이고 피를 흘리면서 쓰러진 사람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 그 말씀에 우리들은 아무 대답도 못했습니다.

선생님은 교지와 신문발간 지도교사를 맡았습니다. 선생님의 빼어난 편집 기술로 그 무렵 저희 학교 교지와 신문이 해마다 전국 중고교 교지 신문 콘테스트에서 최우수상을 휩쓸었습니다. 글의 제목을 뽑는 일, 글을 늘이는 일, 줄이는 일, 여러 학생 기자의 머리를 합쳐도 도저히 선생님의 기발한 아이디어에는 미칠 수 없었습니다. 제가 교직에 몸담은 후 여러 해 교지 편집 지도교사를 해온 얕은 지식도 모두 선생님 어깨너머로 배운 덕분이었습니다.

그 무렵만 해도 각 학교의 교지 신문의 편집 수준이 보잘것없는데 선생님은 삽화를 많이 넣고 사식을 많이 써서 시원한 교지, 읽히는 교지, 학생 글 중심의 교지를 만들었습니다. 교지에 실은 교내문예 현상을 통해 많은 문학도를 발굴했는데, 그들 중 꽤 많은 선후배가 현재 언론기관이나 문단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나의 학생기자 시절, 홍 선생님 사진은 아무 곳에도 없다. 졸업앨범에서도.
나의 학생기자 시절, 홍 선생님 사진은 아무 곳에도 없다. 졸업앨범에서도. ⓒ 박도
대학 진학을 앞둔 어느 수업시간.
“요즘 문과학생들 중, 우수한 자는 죄다 상대 법대만 진학하려 한다. 상대에 가서 잘 되면 은행원이 되는데 은행이란 돈 장사하는 곳이란다. 법대에 가서 잘 되면 판검사, 좀 심하게 말하면 판검사란 범법자들의 죄나 추궁하는 직업이야. 우수자들이 순수 학문도 하고 교육계에 더 많아 가야 돼. 그래야 우리나라도 학문적으로 선진국이 될 수 있고,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계도 더 발전하는 거야.”

선생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장래문제를 다시 생각케 했습니다. 작달막하시고 야위신 체구에 날카로우신 눈빛, 안경을 쓰신 다부진 선생님, 수업시간마다 우리들의 사고를 무한대로 넓혀주셨습니다.

선생님!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여우도 죽을 때나 고향 쪽을 향해 머리를 두고, 새들도 날이 저물면 제 집을 찾아오는데, 이제 다시 조국을 찾으십시오. 비록 분단된 조국일지라도 이 아름다운 금수강산, 조상의 얼이 배인 이 땅에다 유택을 마련해야 안 되겠습니까? 다시 뵐 그 날을 기다립니다. (1989.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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