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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18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양국 현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18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양국 현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 APEC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외교 전략과 외교력이 논란의 도마 위에 올랐다.

고이즈미 총리는 5년 만에 일본을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21일 회담을 열어 러·일 양국간의 최대 현안인 북방영토(러시아 명 쿠릴 열도)문제를 논의했다. 그러나 공동성명은 채택하지 못하고 향후 협상을 계속하기로 합의하는데 그쳤다.

러·일 정상이 상대국을 공식 방문해 공동성명 채택을 유보한 것은 이례적인 일로, 북방영토문제의 진전은 당분간 어려울 것이라고 일본 언론들은 전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이번 회담에서 "제반 합의에 근거해 평화조약협상을 추진하고 싶다"며 북방 4개 섬의 귀속문제 해결 후 러·일 양국이 평화조약을 체결한다는 1993년 '도쿄선언'의 재확인을 요청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회담에서 '도쿄선언'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평화조약 체결 후에 시코탄과 하보마이 두 섬을 일본에 인도한다는 1956년의 '소·일 공동선언'을 중시하는 등 양국 간의 입장차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고이즈미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로 한·일, 중·일 관계 악화, 납치 문제로 인한 북·일 수교협상의 난항 등 아시아 외교 실책에 이어 러시아와의 외교에서도 '쓴 맛'을 본 셈이다. 이 때문에 일본 안에서도 '고이즈미식 외교'에 대한 의구심과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아시아에서 고립 자초하는 '고이즈미식 외교'

아소와 아베 고이즈미 총리는 지난 10월 31일 3차 개각을 단행하면서 극우파 인물을 대거 내각에 진출시켰다. 사진은 대표적인 극우파 인물로 알려진 아소 다로 신임 외무대신(왼쪽)과 아베 신조 신임 관방대신.
아소와 아베 고이즈미 총리는 지난 10월 31일 3차 개각을 단행하면서 극우파 인물을 대거 내각에 진출시켰다. 사진은 대표적인 극우파 인물로 알려진 아소 다로 신임 외무대신(왼쪽)과 아베 신조 신임 관방대신. ⓒ 연합뉴스
고이즈미 총리는 지난 16일 일본을 방문한 부시 미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미·일 관계가 좋으면 좋을수록 중국, 한국, 아시아 각국, 세계 각국과의 관계도 좋아진다"며 미·일 동맹 강화가 근린외교에도 도움이 된다는 자신의 '지론'을 거듭 강조했다.

부시 대통령도 "미·일관계가 강화되면 될수록 이 지역의 분쟁 가능성도 작아진다"며 북한의 핵, 미사일 개발과 중국의 군사적 대두 등 불안요소를 안고 있는 동아시아 지역의 억지력으로 미·일 동맹을 중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주일 미군의 재편으로 일본 자위대와 미군의 일체화도 한층 강화되고 있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의 '미·일 동맹 최우선'이라는 지론은 아시아 외교에서도 한계를 드러냈다.

<교도통신>은 지난 21일, 일본 정부가 연말 실현을 목표로 조율 중이던 노무현 대통령의 방일을 사실상 단념했다고 보도했다. 한·일 양국 정상은 작년 7월부터 1년 두 차례 상호방문하는 형식의 '셔틀 외교'를 실시해 왔으나, 이번 사태로 향후 지속될지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지난 19일 막을 내린 부산 에이펙에서도 한·일 정상회담은 30분간의 '면담'수준에 그쳤다. 중국의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조건과 분위기가 갖추어지지 않았다"며 고이즈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 그나마 응하지도 않았다.

이에 대해 일본 언론들은 고이즈미 총리가 미국의 '후광'을 등에 업고 중·일, 한·일 관계를 호전시키려는 전략을 관철하려 했지만, 이것이 오히려 '대미의존' 외교체질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아시아에서 일본의 고립을 더욱 심화시켰다며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마이니치신문>은 "패전 이후 일본 외교는 미·일 안보체제를 기축으로 아시아 각국과의 공조, 유엔 중시의 '3대 원칙'을 중시해왔다"면서 "고이즈미 정권은 역대 정권이 쌓아온 이런 균형을 깨뜨리고 '미·일 운명공동체 노선'을 고집하고 있는데 이로써 일본이 얻을 수 있는 국익은 무엇인가"라며 힐책했다.

또 "아시아와의 독자적이고 긴밀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 측도 일본에 의존하는 상호관계가 있는 것"이라면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미국 추종'에 나서는 고이즈미 총리의 대미외교정책의 선회를 촉구했다.

일 정계에서도 고이즈미 총리의 아시아외교 경시에 대한 비난이 잦아지고 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는 지난 20일, <마이니치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고이즈미 총리의 외교 전략에 대해 "야스쿠니 문제로 국제회의가 없으면 주변국 정상과 만나지 못하게 됐다"면서 "일본은 고립되고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미야자와 기이치 전 총리도 22일 <아사히신문>과의 회견에서 "고이즈미 총리의 아시아 외교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 아시아와의 우호관계에 더 적극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있다, 야스쿠니 문제로 중국과 일본 정상이 만나지 못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미국도 일부 우려 시각 보이기도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지난 10월 17일 도쿄에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있다. 고이즈미는 "군국주의를 찬미한다"는 주변국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2차대전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신사를 방문했다. 이번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지난 2001년 4월 총리가 된 이후 5번째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지난 10월 17일 도쿄에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있다. 고이즈미는 "군국주의를 찬미한다"는 주변국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2차대전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신사를 방문했다. 이번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지난 2001년 4월 총리가 된 이후 5번째다. ⓒ REUTERS/연합뉴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로 촉발된 한·일, 중·일 관계악화로 인해 미·일관계에도 미묘한 균열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마이니치신문>에 따르면, 미 정부 내에는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문제로 인해 지금 이상으로 중·일, 한·일 관계가 악화되면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미국의 국익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부시 대통령도 방일을 앞둔 지난 8일, 야스쿠니 문제로 교착상태에 빠진 중·일, 한·일 관계에 대해 "과거를 잊는 것은 어렵겠지만 가능은 하다"며 각 정상에게 관계개선을 촉구했다.

또 16일 미일 정상회담에 동석한 미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고위관계자는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고이즈미 총리에게 중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등 미국의 '우려'를 전달하려고 했다고 밝혔다.

<지지통신>은 "일본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미국이 한국과 중국, 러시아 등과 정상외교를 활발히 하고, 부시 대통령은 간접적인 표현이지만 중·일 관계의 악화에 대해 우려를 표하기 시작했다"면서 "이는 미국의 대중전략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마이니치신문>은 "미·일 동맹 강화, 강경파 노선으로 근린외교를 펼쳐 비판을 원천봉쇄하려는 고이즈미 총리를 미국이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다"면서 "미·일 양국의 밀월관계에 미묘한 '틈새'가 생겨 고이즈미 총리가 이를 불식시키려고 더욱 강경하게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일 동맹 강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요미우리신문>은 17일자 사설에서 "급속한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한 중국의 군사대국화는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안전보장에 있어 심각한 우려요인이 되고 있다"면서 "중국은 이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주도권 확립을 위한 움직임을 강화하고 있다"고 지역안보를 위한 미·일 동맹강화가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외교 평론가인 오카자키 히사히코는 17일 '미·일 동맹, 세계안정의 원천'이라는 <산케이신문> 기고를 통해 "미·일 동맹의 힘은 군사력과 경제력이다, 미국과 일본이 이 둘을 합치면 세계에서도 압도적으로 강한 '파워'를 가지게 된다"면서 "미·일 동맹이 안정되면 다른 국제정세가 어떻게 변하든 아시아지역뿐만 아니라 세계의 대세에 어떤 영향도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중국과 한국과의 관계에서도 미·일 동맹만 굳건하다면 일본과의 일시적 마찰도 지나가는 파도일 뿐"이라며 "일본은 사물의 대소, 경중을 잘 따져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동아시아 정상회의 중-일 신경전

▲ 후진타오 중국 국가 주석과 고이즈미 일본 총리. 이들은 오는 12월 동아시아 정상회의에서 적잖은 신경전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부산 에이펙 정상회의가 지난 19일 막을 내리면서 오는 12월 중순 말레이시아에서 열리는 동아시아 정상회의에서 고이즈미 총리의 외교력이 또 다시 시험대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12월 동아시아 정상회의를 앞두고 중·일 양국의 물밑 주도권 다툼이 벌써부터 치열하다. 또 일본의 유일한 '동아줄'인 미국마저 참석하지 않아 고이즈미 총리가 주도권을 잡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동아시아 정상회의에 대해 "중국외교의 총 결산이다, 미국이 빠진 가운데 (중국이) 지역 협력관계구축에 얼마만큼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가 시험대에 올랐다"며 의욕을 보였다.

또 미국이 동아시아 정상회의에 참석하지 않더라도 일본이 주도권을 잡을 경우 미국의 의향이 반영될 가능성이 있다며 경계감을 늦추지 않고 있다.

일본도 중국과 대화의 길이 막힌 상황에서 견제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지난 15일 아소 다로 일 외상은 알렉산더 다우너 호주 외무장관과의 회담에서 "동아시아 정상회의는 개방적이고 투명한 회의로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라며, 고이즈미 총리는 19일 폴 마틴 캐나다 총리와의 회담에서 "중국 군사력의 투명성을 높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말로 중국을 견제했다. / 강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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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 뉴스 국제부에서 일본관련및 일본어판 준비를 맡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1998년부터 2000년까지 2년간 채류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화여자대학교 통번역 대학원 한일 통번역을 전공하였습니다. 현재는 휴학중입니다만, 앞으로 일본과 한국간의 주요 이슈가 되고 있는 기사를 독자들과 공유해나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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