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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서울 고덕 달림이 뜀꾼, 박복진입니다.

여기는 지금 평양이며 나는 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평양 고려호텔 심벌이 인쇄된, 말 위에서 활 쏘는 어느 호방한 고구려 무사의 그림이 선명한 밑줄 쳐진 원고지에 나는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 평양 순안 공항에 도착한 필자.
ⓒ 박복진
종화야!

아빠는 지금 평양을 뛰어 달린다.

이게 분명 꿈이 아닐지니 내 이토록 복잡한 지금의 이 심정을 무엇으로 다 표할꼬?

아빠는 어제 아침 9시 30분 아시아나 전세 직항기를 타고 인천 국제공항을 출발, 분단 반세기 한반도 허리를 새처럼 날아 채 그 벅찬 감동을 정리하기도 전에 평양의 순안공항에 도착, 몽매간에도 그리던 내 조국의 위쪽 절반 그 위에 내 두 발을 디뎠다.

이곳 역시 내가 태어나 자라며 수도 없이 보아왔던, 그래서 아무런 저항이 없는 내 조국 한반도 남쪽 그 어느 고장 산하와 조금도 다를 게 없이,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의 스산한 연갈색 들풀들, 포기 배추가 다 뽑혀져 나간 남새밭 모습, 그 위에 얕게 드리워진 비 흩뿌리기 직전의 구름 모습 등 주변 경관이 고스란히 빨리듯 내 두 눈에 들어온다.

평양이라고 옥상 위에 크게 내걸린 공항 이름 입간판을 올려다보며, 그 옆에 나란히 서 있는 김일성 초상화를 바라보니 만감이 교차된다. 같이 온 오마이뉴스 평양-남포 통일 마라톤 참가자들, 보도진들, 수행원들, 진행 요원들이 쉴 사이 없이 그 앞에 서서 눌러대는 디지털 카메라들 사이에 나도 섰지만 나는 나의 몸을 돌려 카메라 조리개가 아닌 내 뒤쪽 공항 건물 옥상, 평양이라는 두 글자를 향해 내 두 눈을 고정시키고 있다. 한참이나, 아주 한참이나….

지금 이 순간, 내 무슨 정신이 있어 카메라 조리개를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세상 모든 나라들이 다 경험하지 않은 비극, 유독 우리만 겪은 분단 내 조국의 그 절반 땅에 내린 첫 동작이 그래, 카메라를 꺼내 허둥허둥 찍는 기념사진이란 말인가?

그토록 온 겨레가 염원해오는 분단 반세기 조국 통일에 내가 한 것이 무엇이 있다고 비행기 트랩을 내려 내 조국 내 동포 형제의 손도 아직 못 잡아본 이 시점에 기념사진이란 말인가.

가당치 않을 일이라 생각하며 나는 비행장 건물 옥상의 평양이라는 입간판에서 내 두 눈을 떼지 못하고 어정쩡 서있는 사이 누군가가 그런 나의 뒷모습을 찍었고, 나는 북측 안내원의 독촉 안내로 버스에 올려졌다. 나의 첫 번째 눈물을 순안 공항 활주로 한 구석에 떨구고서 말이다.

▲ 오마이뉴스 주최 '평양-남포 통일 마라톤대회' 참가자들이 23일 오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대형 버스 4대에 분승한 오마이뉴스 평양-남포 통일 마라톤 참가자들의 호기심과 놀람이 이어져 가는, 공항에서 평양 시내까지의 50여 분의 이동 중 버스 차창에 비치는 북녘 동포들의 모습들을 처음 대하는 순간 내 가슴은 마구 뛰었다. 살가운 반가움은 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한 여름 정장 속의 첫 땀 물줄기같이 너무나도 선명해서 내 몸 전체의 세포를 긴장시키며 빠르게, 빠르게 내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

아들아!

이곳은 남쪽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한산하다 못해 텅 빈 거리, 너무나도 귀엽게 로봇처럼 움직이는 교통 여 지도원의 파란 정복, 긴 장화 구두. 털목도리 안에서 좌우 180도로 재빠르게 움직이는 하이얗고 예쁜 조막만한 얼굴. 어느 시민의 자전거 짐 안장 양쪽에 오뉴월 소불알처럼 두 가닥으로 늘어져 실린 포대 자루의 불룩한 모습은 바로 우리네 일상 살림의 소박한 물욕이 아니던가?

조잘거리며 무리를 지어 하교하는 초등생들 머리 위에 비가 내린다. 책보를 싸 그 끈을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팔 겨드랑이로 돌아 기어 들어가게 멘 그 아이의 초라한 모습이 나를 또 울린다. 더 이상 바라볼 수 없어 시야를 확보하려고 버스 커튼으로 자꾸만 자꾸만 버스 유리의 김을 닦던 내 손길이 힘을 잃고 슬그머니 멈춘다.

그리고 버스 유리창의 희미한 김 서림은 내 모르는 사이 어느 새 내 두 눈에 옮겨와 붙는다. 까까머리 내 어릴 적 나의 모습이 차창 밖 저기에 있다. 북한에 도착 채 두 시간도 안 된 시간 나의 두 번째 눈물이다.

▲ 평양마라톤대회 참가자 일행을 태운 버스가 평양시내 통일거리에 세워진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을 지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아들아!

버스는 이제 평양 시내에 접어들었다. TV에서 잠깐씩 은전을 베풀어 보여주던 모습들을 스치며 버스는 느리게 굴러간다. 금수산 궁전, 개선문, 영웅거리, 청년거리, 청춘거리, 보통거리, 그리고 너무나도 유명한 대동강의 아름다운 모습들. 이렇듯 잘 보존해줘서 눈물이 나도록 고마운 자연 그대로의 때 묻지 않은 강변 풍경, 대동강과 그 강변의 운치만을 놓고 본다면 파리의 라 세느와 우열을 가리는 게 오히려 우스울 지경이다. 주변 곳곳에 널린 빨간 글씨의 전투적 용어만 없다면… 사람이 그리워 호텔 현관을 뛰쳐 나가려하는 나를 제지하는 요원만 없다면….

아니다! 아니다! 저 뻘건 것은 글씨에 불과하다. 저것들에 내 감정을 담지 말자. 저것들로 인해 나의 북녘 동포에 대한, 내 혈육들에 대한 애닮을 왜곡 시키지 말자! 그냥 이렇게 다가가 말을 하지 말고 고개를 돌리고 얼싸 안아 보자. 그들의 가슴에 내 심장을 갖다 대고 이렇게, 이렇게 눈으로만 말을 하자… 이렇게, 이렇게 가만히….

높이가 170m라서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주체탑 위에서 바라보는 비 흩뿌리는 날 오후 평양의 시가지 모습은 천 가지 만 가지 복잡한 느낌을 쑤어내게 만든다. 조용하다가 다시 급작스레 불어 닥치는 비바람은 날보고 왜 이제 사 왔느냐는 듯 그 투정이 자못 센 듯하지만 적어도 그 바람 자체는 나에게 적의가 없어 보였다.

오히려 바람은 남녘 동포의 늦은 방문을 반가워하며 내 등을 껴안고 뒹굴며 형제 상봉의 기쁨을 만끽하는 듯했다.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드는 길가 행인들의 순수한 얼굴 위에 자리한 정말로 순수하고 따스한 미소들과 함께.

바로 조금 전, 남한을 떠나 올 때의 생경한 경험이 생각난다. 비행기가 인천 상공을 날아 서해안 공해 상으로 나가자 동승한 행사 진행 요원이 봉투를 나눠주며 그 위에 자기 이름을 쓰라고 하더니, 그 봉투에 자기 손 전화를 담아 제출하라고 했다. 일상에서 모두의 분신처럼 돼버린 손전화가 기내에서 일괄 수거 압수되자 우리는 마치 무장 해제 당한 지휘관처럼 갑자기 인간으로서의 품위가 없어져 나간 느낌이었다.

내 품에서 떨어져 나간 손 전화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 손 전화를 봉투에 담는 행사 요원의 손놀림을 본다. 봉투 끝 입구를 철 핀으로 봉하는 스테이플러의 금속성 소리를 듣는다. 그 철 핀이 찌부러지고 꺾이어 다시는 볼 수 없게 만드는 사상의 경직성에 화가 치민다.

그러나 어이하랴? 그 철 핀을 내리 눌러 꺾어서 다시는 열어 볼 수 없게 만드는 그 철 핀 꺾기 도구 바로 위에 구부러진 철 핀을 다시 펴는 기능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 존재를 알고 다시 그 도구를 이용해서 꺾은 당사자 우리 민족 스스로가 이 왜곡된 민족의 역사를 다시 펴야 한다.

▲ 평양마라톤대회 참가자들이 23일 저녁 환영만찬에서 건배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평양 순안 공항에 도착했을 때 동승했던 취재 기자들이 쏟아내던 플래시, 질문 세례. 오히려 우리가 이를 신기해하며 이들을 디지털 카메라에 담았던 웃지 못 할 진풍경이 다시 생각난다. 갑작스레 신기한 동물세계에 내려놓자마자 사진을 찍어대는 소녀들의 호기심 어린 행동처럼 우리에게는 반세기만에, 어쩌면 생애 최초의 이북 땅 방문을 맞아 감정의 정리보다는 기록부터가 급선무였는지 모른다.

그토록 보고 싶고 가고 싶어 하던 남녘의 내 형제, 자매들에게 이 모습만이라도 갖고 가서 보여주어 그들의 굶주린 북녘에 대한 앎의 욕구를 채워 주려 걸신 걸린 도야지 새끼의 저녁 식사처럼 디카의 셔터를 쉴 사이 없이 눌러 댔었다. 금방이라도 동작 끝! 명령이 있기라도 하듯이….

바로 내 옆에 앉아 단체 사진을 찍던 자폐아 배형진군의 눈에 비친 북한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내가 갖지 못한 순수의 눈으로 바라보던 이 겨레의 비극은 배형진군에게 어떤 형태로 다가갔을까? 얼마만한 아픔이 되어 그 가슴에 와 닿았을까?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다가 본 단 하나의 도로 입간판에 쓰여져 있던, "튼튼하고 힘있는 차, 뻐꾸기"라는 덜 세련되고 많이 부자연스럽던 광고 문구는 소위 앞서간다는 이남의 세련된 도회인 중 하나인 내가 느끼는 감정과의 괴리는 얼마나 될까? 참으로 서글프다.

아들아!

우리를 태운 버스 4대는 검은색 리무진의 선도 안내를 받으며 평양 시가지를 달린다. 커다란 호기심으로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지나가는 행인을 관찰하던 처음의 호기심은 벌써 많이 무디어졌다.

바라보면 볼수록 그들은 곧 우리의 형제였고 우리의 이웃이며, 언제였던가 곧 우리의 모습이었기에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눈을 크게 뜨지 않아도 되었단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그냥 차가 이동하는 그대로 바깥의 풍경에 익숙해져 갔다.

스치고 지나가는 간판들이 조용한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역전상점, 신발상회, 제1 백화점, 과일 남새 상점, 창전 꽃방, 그리고 지짐집은 아마도 우리 남쪽의 파전류를 파는 집일게 분명해 보인다.

아파트라는 차가운 이름 대신 이곳에서는 살림집이라고 부른다하는데 우리네 서민들의 세간 살림도구가 보이지 않아 많이 어색하다. 도로쪽으로는 일체의 지저분한 살림 도구를 내놓게 하지 못해서일까? 왕복 10차선, 혹은 12차선의 이 큰 도로 옆에 지어진 정연한 건물들, 마치 영화 촬영이 모두 끝난 세트장 같다.

▲ 호텔 안내원들의 환영을 받으면 입장하고 있는 필자.
ⓒ 박복진
숙소인 고려호텔에 도착, 현관 입구에 들어설 때 우리를 맨 먼저 반겨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복 곱게 차려 입고 두 줄로 나란히 서서 쉴 사이 없이 손뼉을 쳐주는 호텔 종업원들이었다. 그들은 정말 진심으로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먼 길 오셨는데 어서 방으로 올라가 짐을 풀고 내려 오셔서 요기하시라는 그 말씀에 나의 세 번째 눈물이 흘렀다.

정말 그렇다. 먼 길을 왔고, 그리고 시장기가 있었는데 우리의 사랑하는 북녘 동포들은 이를 귀신같이 알아차리시고 우리를 위해 평양의 제 일 명물, 평양 랭면을 한 사발씩 차려 주시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또 다시 처음 도착 때 보여 주셨던 반가운 그 마음 그대로 우리를 저녁 성찬장에 오게 해서 우리의 배를 불리게 해 주셨다.

아들아!

평양의 첫 밤이 왔다. 잠이 올 리가 없다. 고려호텔 20층 내 방에서 창문 커튼을 열고 바깥을 바라보려고 했던 나는 놀랐다. 바깥은 어둠이었다. 아주 진한 어둠이었다. 간혹 어느 살림집에선가 흘러나오는 몇 개의 희미한 불빛 뿐, 거리도 상점도 가로등도 한결같이 칠흑 같은 어둠, 북쪽 사람들에게는 모두가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듯, 너무나도 익숙해 보이는 장면들인 듯, 나 혼자서만 이럴 수가? 를 연신 되뇌었다.

그리고 조금 후 켠 방 TV에서 나오는 화면과 그 화면을 설명하는 아나운서의 혁명적 구호가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평양 도착 첫 반나절이 다 가기 전 나는 네 번째 굵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잘 정돈된 파란 바탕 비단에 빨갛게 수놓아진 꽃무늬 침대보 속에 내 몸을 밀어 넣어 내일 있을 마라톤을 위해 잠을 청해 본다.

뜀꾼인 내가 내일의 뜀질을 위해 평양 도착 첫 반나절의 놀람과 고뇌와 동포애의 눈물을 다 잊고 무거운 잠을 청해본다. 아, 내일은 뛰기 좋은 날이 될 것이다.

(2편으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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