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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남자들이 얼굴에 마사지 팩을 하고 몸에 딱 달라붙는 '쫄티'를 입는다고 해도 절대 사용할 수 없는 '여성'만의 성역이 있다. 바로 생리대 같은 여성용품과 브래지어나 코르셋 같은 여성 속옷.

남자들이 화장을 하는 시대까지 됐지만 이 분야들은 '금남'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XX 두 쪽 찬 남자가 쯧쯧..."하는 소리 듣기 십상인 이 분야에 용감하게 도전한 사람이 있다. 여성 속옷을 디자인하는 남자, 윤종기(33, 임프레션 디자인팀)씨. 남자인 그가 들여다 본 여성 속옷의 세계는 여성들이 생각하는 '여성 속옷'의 세계와는 사뭇 다른 듯했다.

속옷을 보는 건 남자...남자의 시선으로 디자인

▲ 여자 속옷 만드는 남자 윤종기씨.
ⓒ 송민성
- 속옷 디자이너에 성별 구분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남자가 여성 속옷을 만든다는 게 재미있게 느껴진다. 이 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대학에서 의류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 겉옷(아우터) 디자인을 2년 정도 했다. 2000년에 지금 회사에 입사해 1년 정도 기획실 엠디로 일했는데 속옷 디자이너를 뽑는다는 말을 듣고 지원해 2001년부터 여성 속옷 디자인을 시작했다. 여성 속옷이라는 분야만 고집하는 디자이너들도 있지만 난 그렇지 않다. 속옷도 '옷'이라고 생각하고 디자인한다. 방점이 '여성 속옷'이 아니라 '옷'에 찍힌다는 말이다."

- 남성으로서 여성 디자이너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여자가 봤을 때 예쁜 것과 남자가 봤을 때 예쁜 것은 다르다. 나는 후자의 시선으로 속옷을 만든다. 속옷은 여자가 입지만 결국에 그걸 보는 상당수는 남자이지 않나(웃음). 여자 디자이너들은 자신이 입을 걸 염두에 두기 때문에 실용적이고 편안하게 만들려고 한다. 하지만 실용적이고 편한 걸 생각하면 파격적이기 힘들다. 남자의 시선으로 속옷을 만들면 착용감이나 실용성 보다는 디자인을 먼저 고려하게 된다. 결국 무엇을 첫 번째로 보느냐의 차이다. 옷이란 자기만족도 있지만 예쁘게 보이고 싶은 욕구도 충족시켜야 하는 것 아닌가.(웃음)"

- 남성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어려운 점은 없나?
"남자이기 때문에 입어볼 수 없다는 것 정도?(웃음) 하지만 피팅 모델도 있고 속옷을 1~2일 정도 입고 실제 느낌이나 불편한 점을 모니터링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어느 정도 보완 가능하다."

"어려운 점? 직접 입어볼 수 없다는 것 빼곤..."

▲ 디자인은 심플하게, 포인트는 컬러에서. 윤종기씨는 여성 디자이너들이 쓰지 않는 과감한 컬러를 사용한다.
ⓒ 송민성
- 속옷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나?
"시즌이 시작되면 자재 섭외부터 한다. 자재 회의에서 이번 시즌에는 어떤 원단과 레이스를 쓸 것인지 결정하고 디자이너들이 각각의 자재를 맡아서 한두 가지, 많게는 세 가지 정도의 시안을 만든다. 그때부터는 골라내는 작업이 계속된다. 디자인은 좋은데 직접 만들어 보니 별로인 것, 보기엔 좋지만 착용이 불편한 것을 골라낸 다음 샘플을 결정한다.

그 다음에는 또 한 번의 품평회를 가지는데, 직접 판매하는 분들과 함께 상품성을 따져 보는 것이다. 그렇게 상품이 확정되면 디자이너가 봉제 지도서를 작성하고 거기에 맞게 공장 측에서 물건을 하나 만들어 온다. 그걸 컨펌 샘플이라고 하는데, 이게 최종 통과되면 생산에 들어간다."

- 주로 어떤 속옷을 디자인하나?
"디자이너마다 주영역이 있다. 나는 브라와 팬티를 중심으로 여성물을 맡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남성물과 세트가 되는 속옷을 만든다. 거들을 맡는 사람도 있고 슬립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사람도 있는데, 디자이너마다 스타일이 다 다르다. 제품을 만들면 우리끼리는 이게 누구 디자인이다, 이런 걸 다 알 수 있다. 그만큼 디자인에는 디자이너의 특성이 묻어난다.

난 잘 팔리는 것에 초점을 둔다. 속옷의 생명은 누군가가 그걸 구매해서 입을 때부터 시작된다. 소비자에게 사랑 받지 못하는 속옷은 의미가 없다. 때문에 매장 판매 현황을 매일 체크하면서 소비자들이 어떤 디자인을 선호하는지 계속 관찰한다. 그 덕분인지 '판매왕'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웃음)."

- 윤종기씨의 속옷 디자인 특징을 말한다면?
"디자인은 단순하면서도 과감한 요소를 주고 컬러에서 포인트를 준다. 다른 여성 디자이너들이 잘 쓰지 않는 과감한 컬러를 사용하는 편이다."

갈수록 화려해지는 속옷... 와이어는 내가 봐도 '갑갑'

- 요즘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속옷 스타일은 어떤 건가?
"예전에는 중성적인 느낌, 색이 차분하거나 톤이 다운된 느낌이 유행했다. 지금은 굉장히 튀는 색깔들, 예를 들면 아이스크림에나 있을 법한 색깔들이 사랑 받고 있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디자인들이 의외로 잘 나간다.

속옷이 예쁜데다가 편하기까지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그 두 가지를 충족시키는 제품은 많지 않다. 요즘 젊은이들 중에서는 덜 예뻐도 편한 쪽을 선택하는 사람이 드물다. 개인적으로는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실버층을 겨냥한 편하고 건강에도 좋은 속옷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 윤종기씨의 사무실 책상 풍경. 속옷만 걸친 여자들 사진도 아무렇지 않다.
ⓒ 송민성
- 속옷을 보면 다 비슷비슷하고 유행을 탄다는 느낌이 든다.
"다들 디자이너가 어떤 영감을 얻어서 디자인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경우는 드물다. 한 해의 속옷 트렌드를 전문적으로 분석하고 예측하는 회사가 있다. 그곳에서 나오는 트렌드북을 참고하거나 설명회에 참석해 경향을 파악한다. (콘셉트나 모티브를 얻는 특별한 방법이 있을 줄 알았다며 실망한 기색을 보이자) 내가 너무 현실적으로 이야기했나(웃음)? 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때문에 비슷비슷한 스타일들이 쏟아져 나오는 거다."

- 브래지어나 올인원 같은 여성 속옷들이 보기에는 화려하지만 실제로 입었을 때는 불편한 경우가 많다. 남자로서 보기에는 어떤가?
"인정한다. 요즘 브래지어에는 다 와이어가 들어 있는데 이 철심이 사람 몸을 압박하기 때문에 당연히 좋지 않다. 예전 브래지어는 부직포로만 되어 있어 가볍고 공기도 잘 통했다. 하지만 요새는 몰드컵이라고 해서 거의 스펀지를 덧댄다. 그러면 정말 갑갑하다. 그건 내가 디자인하면서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그게 또 이상적인 몸매를 만들어 준다. 겉옷의 태를 좋게 하고 더 멋있게 해 준다. 하이힐이나 짧은 치마가 몸에 좋지 않지만 멋을 위해 입는 것처럼 속옷도 마찬가지다."

한국 여자 가슴은 모두 75A?

▲ 속옷을 잘 고르려면 자기 신체 사이즈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윤종기씨의 조언.
ⓒ 송민성
- 여성들에게 속옷 잘 고르는 방법을 귀띔한다면.
"우선 자기 신체 사이즈를 제대로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여성 소비자들 대부분은 자기 브래지어 치수를 75A라고 한다(웃음). 자기 몸에 맞지 않는 속옷을 입으면 오히려 맵시를 해치고 건강에도 좋지 않다.

또 속옷도 옷이라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겉옷과 잘 어울리는 분위기와 디자인의 속옷을 골라 입는 센스를 발휘하면 좋을 것이다. 깊게 파인 옷에는 그에 어울리는 섹시한 브래지어를 하면 좋지 않을까?"

- 앞으로 여성 속옷 디자이너로 계속 일할 계획인가?
"이쪽은 워낙 수명이 짧다. 디자이너로 계속 남는 경우는 드물고 판매나 제작을 하거나 다른 직종으로 창업을 한다. 오십 혹은 육십 먹어서까지 속옷 디자인을 하기란 쉽지 않다.

소비자는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 지난 시즌에 이게 통했다고 다음에도 잘되리라는 법은 없다. 그렇게 안이한 태도로는 좋은 디자인을 할 수 없다. 물론 나도 종종 그런 안이한 생각을 하지만(웃음) 그렇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늘 열린 마음을 가지려고 애쓴다. 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거다."

- 사회생활 하면서 '남자 속옷 디자이너'라는 타이틀 때문에 부담을 느끼지는 않는지.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옷을 만드는 거라고 생각하고 이것은 내 일이다. 주위 사람들에게도 샘플 한 번 입어 보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그 사람들도 대부분 비슷한 분야에 있기 때문에 별나게 생각하지 않고 잘 응해 준다. 여자들은 친해지면 속옷 샘플 좀 달라고 하기도 한다. 단, 여자 속옷을 만드는 남자 디자이너라고 해서 인터뷰는 많이 한다(웃음). 사람들은 굉장히 신기하게 보는 것 같은데 특별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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