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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밤에 모진 추위에 떨고 있을 벤치를 감싸 주려는 듯 함박눈이 두툼한 이불처럼 내려 앉았다.
ⓒ 한석종
▲ 한 잎두 잎 사랑을 나눠 주려는 듯 손 까불러 오가는 사람들을 부르던 가을엽서.
ⓒ 한석종
보통 첫눈은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보일 듯 말 듯 흩날리기 십상이지만, 올해 남도 지방의 첫눈은 여느 때와는 사뭇 다르게 하루 밤사이에 자칫 잘못하다간 큰 원성을 불러올 만큼, 그야말로 폭설 그 자체였다.

첫눈이 한꺼번에 이렇게 흠뻑 쏟아 부은 게 다들 난생 처음이어서 그런지 싫지 않은 기색이 보였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는 20년 만에 처음이라고 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40여년 만이라며 혀를 내두르는 뉴스가 방송에서는 매 시간대마다 단골 메뉴로 흘러나왔다.

이런 폭설로 남도 지방은 초등학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중·고등학교에 임시휴교령이 내려졌다. 생각지도 않은 많은 눈으로 덩달아 신이 난 아이들에게 이런 휴교 소식은 더 없는 쾌재를 불러와 모처럼 컴퓨터 자판에서 손을 떼고 눈밭에 나와 눈싸움을 하기도 하고 삼삼오오 경사진 곳을 찾아 분주하게 미끄럼을 타고 있다.

출근길은 빙판이 된 지 이미 오래여서 차바퀴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제자리에서 고추 먹고 맴맴 헛돌기 일쑤였다. 아이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도로가에서 사이 좋게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며 신나게 미끄럼을 타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며 나는 차창 밖으로 손을 내젓다가 그 옛날 마을 동네 어귀에서 미끄럼을 타다 어른들에게 쫓겨났던 소시적 기억이 떠올라 그만 싱긋 웃고 말았다.

출근해 막 업무를 시작하며 자료를 인터넷으로 검색하다가 낙엽이 흩날리는 어느 사진 한 장이 내 시야를 잡아맸다. 그 사진을 보자 지난 달 담양 관방제림의 벤치 위에 무수히 쌓여만 가던 형형색색의 가을 엽서가 내 시야에서 마냥 흩날렸다.

나는 점심 시간에 조용히 혼자 사무실을 빠져나와 점심도 거른 채 30여 분 거리에 위치한 관방제림으로 차를 몰았다. 관방제림으로 들어서는 길목에는 대나무 기개를 쏙 빼닮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메타세쿼이아가 일렬로 도열하고서 반갑게 나를 맞는다.

▲ 가슴이 답답할 때 관방제림에 서면 시원한 눈맛처럼 확 트인다.
ⓒ 한석종
▲ 나뭇가지마다 피어 있는 눈꽃이 솜사탕처럼 향기롭게 느껴진다.
ⓒ 한석종
관방제림 입구에 이르자 나는 담양천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 우뚝 섰다. 가슴이 답답할 때면 자주 이곳을 찾곤 했는데 함박눈으로 새하얗게 뒤덮인 담양천과 관방제림의 모습이 오늘 따라 그 시원함이 더해 뼈 속까지 스미는 듯하다.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수령 300여 년이 넘는 노거수들이 즐비한 숲길에 들어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벤치에는 사람만이 앉는 것으로만 여겼다. 하지만 지난 늦가을 이곳을 찾았을 때 벤치에 사뿐히 내려앉은 무수한 낙엽을 바라보며 이런 내 생각이 일순 바뀌게 됐다.

오늘 나는 한 달 전 가을 엽서로 무수히 쌓여만 가던 그 벤치 그 자리에 다시 섰다. 그 많던 가을 엽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자리마다 함박눈이 두툼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마치 간밤에 모진 추위에 떨고 있을 벤치와 나무들을 따뜻하게 감싸 주려는 듯.

내 몸은 세차게 스쳐가는 칼바람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지만, 벤치와 나무 위에 이불처럼 두툼하게 감싼 함박눈으로 마음은 벌써 모락모락 훈김이 돋고 있었다.

▲ 관방제림 가는 길목에 일렬로 도열한 메타세쿼이아.
ⓒ 한석종
▲ 파아란 하늘 빛에 드러난 나무 등살이 더욱 눈부시다.
ⓒ 한석종
ⓒ 한석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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