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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참호에서 보낸 1460일>(존 엘리스 지음, 마티 펴냄)에 있는 내용을 살려서 필자가 쓴 것입니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닙니다...필자 주

나 영국군 보병 XX대대 소속 아서 이병은 지난 겨울 이프르 전선에 투입되어 지금은 참호에 머무르고 있다. 원칙대로라면 참호근무에서 벌써 교대되어 후방으로 가야할 터였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두 달이 지나도록 교대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언 땅이 녹으면서 참호 벽들은 툭툭 떨어져 나가 진창 속에 숨겨져 있던 시체들은 모습을 드러내었고, 고양이만한 쥐가 떼로 몰려들어 시체를 파먹고 파리가 새카맣게 몰려들었다. 악취가 진동하였지만 그 누구도 이를 치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쉬는 동안 잠깐 짬을 내어 퀭한 눈을 부릅뜨며 머리와 속옷에 붙은 이와 빈대를 잡아내느라 모두들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두 주목."

스코트 상사가 다리를 절룩이며 다가왔다. 그는 가벼운 참호발(젖은 양말이나 부츠를 오래 동안 신고 있으면 발병하는 피부괴저의 일종)을 앓고 있었다. 그냥 놓아두면 발이 썩어 잘라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는 무신경했다.

"곧 공격이 있을 예정이지만 보급은 좀 더 기다려 봐야 한다."

병사들 사이에서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양말은 고사하고 따끈한 식량대신에 곰팡내 나는 치즈에 구역질나는 쇠고기 통조림과 비스킷으로 이루어진 비상 휴대 식량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스코트 상사는 그런 병사들을 등지고 앉아 하모니카를 꺼내 물고 태연히 불렀다.

스코트 상사는 병사들이 나무 이파리처럼 스러져갔던 솜 전투에서도 살아남은 용사였다.

"독일군의 기관총탄은 옆에서 걸어가던 동료들의 몸을 사정없이 꿰뚫었지. 내가 살아남은 건 기적이었어. 하지만 장교들은 연실 전진을 외쳐 대었어. 그것만이 승리를 가져다준다고 여겼지."

스코트 상사는 솜에서의 참상을 그렇게 담담하게 얘기하곤 했다. 그것은 전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이었고 그 학살을 가능케 한 것은 독일군이 아니라 무능한 지휘관들이었다. 하지만 이곳 이프르에서도 학살은 지속되고 있었다.

스코트 상사의 멋진 하모니카 연주가 끝나자 독일군 진영에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독일군은 불과 80m 앞 참호에 대치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좀처럼 볼 수 없었다. 잘 못 머리를 내밀었다가는 어디에 숨어 있을지 모를 저격병의 총탄이 목숨을 앗아가 버릴 것이다.

하지만 이 전쟁터에서 그들은 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단지 우리만큼 가련한 존재일 뿐이었다. 애국심으로 충만해 전선에 투입되었지만 지금은 그런 애국심 따위는 개나 던져 주고 싶을 뿐이다. 전선으로 전해져 오는 후방의 신문들은 참호생활의 안락함 따위를 애기하며 왜곡된 얘기로 시시덕거릴 뿐이었다. 그 기사를 쓴 인간들을 시체와 포탄껍데기가 들어찬 이곳 이프르의 참호 진창에 하루만 두어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모두 머리를 숙여!"

바람을 가르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온다. 또 포격이 시작된 것이다. 난 물에 불리고 있던 딱딱한 비스킷을 입에 물고 머리를 숙였다. 진흙이 사방에 튀고 비명소리가 울려 퍼진다. 전화기를 들고 발악을 하는 장교의 말소리가 그 속에서 귓속을 찌른다.

"뭐? 딸기잼 수량을 파악해 보고하라고? 빌어먹을 지금 그럴 때야! 독일 놈들의 포격이 또 시작되었다고! 우리 포병은 뭐하는 거야!"

늘 저런 식이다. 뒷짐만 진 참모들은 참호지옥을 모른다. 아니 알면서도 방관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독가스 포탄이다!"

병사들이 방독면을 신속히 착용한다. 그래도 난 운이 좋은 편이다. 예전에 이프르에 투입된 병사들은 방독면도 없이 독가스에 질식되어 천천히 죽어갔다. 한바탕 포격이 끝나고 동료인 채드윅의 발작이 시작되었다. 그는 포격이 끝난 후면 항상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발작을 일으켰는데 군의관들은 그런 그를 두고 꾀병이라고 하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난 품속에 간직된 어머니의 편지를 꺼내어 읽었다. 일주일전에 받은 이 편지는 적어도 백번은 펼쳐 보았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서야.
우리는 몸 건강히 잘 있단다. 너도 몸 건강히 잘 있겠지?
얼마 전 돼지가 새끼 5마리를 출산했단다.

-엄마가



사실 내용이랄 건 거의 없었다. 겨우 간단한 읽고 쓰기를 할 줄 아시는 어머니가 달리 무슨 말을 적겠는가? 하지만 난 이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심정이다. 내일이라도 난 총 한 자루를 들고 명령에 따라 철조망이 벗겨진 저 무인지대 건너편 적군의 참호를 향해 걸어가다가 무심히 방아쇠를 당기는 독일병사의 기관총탄에 쓰러져 갈지 모른다.


전쟁, 지금도 전쟁 중이고, 사실 언제나 전쟁이 있어 왔지
더럽고, 역겹고, 야비한 죽음의 사업
병사들은 아프고, 잠을 못자고, 궤양에 시달리고, 두려움에 떨지
피가 나는 뒤꿈치에서 고무장화를 비틀어 빼야 하는
겨드랑이와 배꼽과 귀에 덩어리져 들러붙어 참을 수 없는 가려움을 일으키는
진흙 속에서 그들은 갖은 고생을 하지
아연해진 병사들은 미쳐가면서 영문 모를 말을 지껄이지
병사들은 스스로를 죽음, 아니 죽음보다 더한 상황으로 내몰지
불구가 되고, 장님이 되고
인간 대 기계, 육체와 강철, 콘크리트, 불꽃, 철조망
독가스에 병사들의 영혼이 질식당하고
병사들은 진흙 밭을 거칠게 철벅거리며 걷지
5마일 떨어진 곳의 포격으로 병사들의 내장이 쏟아지고,
마지막 숨을 헐떡이며 신을 저주하는 병사들......

-길버트 프랭코(<참호에서 보낸 1460일> 293쪽)

참호에서 보낸 1460일 - 사상 최악의 전쟁, 제1차 세계대전의 실상

존 엘리스 지음, 정병선 옮김, 마티(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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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에서 보낸 146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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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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