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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증식 <단절>
ⓒ 실천문학사
며칠 전, 밀양에서 중고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고증식 시인이 자신의 두 번째 시집 <단절>을 보내왔다. 저녁 나절 두세 시간 만에 시집을 다 읽었는데, 들길에 핀 들국화 같이 맑고 깨끗하게 살아가는 시인의 모습을 들여다 보는 것만 같았다.

누가 그 독후감을 말해 보라고 한다면, 나는 텔레비전의 어느 기업 광고를 빌려 "소리 없이 강한 시(詩)"라고 말하고 싶다. 시인이 직접 겪는 삶이나 생활 주변에서 마주치는 삶의 세목들을 차분하고 정직한 목소리로 건져 올린 우리 삶의 등불 같은 시편들이 시집에 가득하다고 하면 어떨까. 이런 그의 시편들을 한 번 읽어 보자.

시인 박남준은 대문짝만한 홍보처 광고 찍고 오십만 원 받았단다 너무 많은 건 아닌가 떨면서 주머니에 넣었단다 나 직장에 들어 첫 월급 타던 날 한 오십만 원 받냐고 어머니 한 말씀 던지셨다 갈퀴 같은 손 내밀며, 설마 하는 표정으로, 얼마쯤 더 지나 장가보내 달라고 결혼 비용 오십만 원 대출 내서 어머니 갖다 드렸다 어머니나 나나 백만 원 천만 원은 큰돈이 아니었다 오십만 원이면 다 되는 줄 알았다 박남준 시인과 나, 그러나 우리 둘 사이 다른 점은 나는 그때 그랬다는 것이고 남준 형은 지금도 그렇다는 거다

- <오십만 원> 전문


진종일 치맛자락 날리는

그녀의 종종걸음을 보고 있노라면

집 안 가득 반짝이는 햇살들이

공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푸른 몸 슬슬 물들기 시작하는

단의 단풍나무 잎새 위로

이제 마흔 줄 그녀의

언뜻언뜻 흔들리며 가는 눈빛,

숭숭 뼛속을 훑고 가는 바람조차도

저 종종걸음에 나가떨어지는 걸 보면

방 안 가득 들어선 푸른 하늘이

절대 공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제 발걸음이 햇살이고 하늘인 걸

종종거리는 그녀만 모르고 있다

- <아내의 종종걸음>전문


'아내'의 어원이 '안해'라고 한다. 아내는 달리 말하면 '집 안의 해'만큼이나 소중한 존재다. 내 아버지와 수많은 아버지와 아버지로 이어져 내려오는 핏줄을 오늘 여기에 있게 해준 하늘과 같은 존재다.

아내의 저 종종거림이 여기 우리 집의 살림을 이어가고 있다. 세상의 사내들이여, 아내의 종종거림 그 고마움을 진정으로 보고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가정이 화평하고 세상이 조화롭다. 평생을 나와 부모, 자식들의 먹거리와 입거리를 챙기고 또 챙기는 아내의 손길(종종거림) 진정 절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을 갖자. 그 마음에서부터 가장(家長)의 자리를 바로 세우자.

한국 시단의 원로 신경림 선생께서 이번 고증식의 시집을 추천하는 글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고증식은 성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지도 않고 거친 소리로 달려들지도 않는다. 자기만이 삶의 진실을 보고 있다는 허풍스러운 몸짓도 없다. 따뜻한 눈으로 차분하게 세상을 들여다보면서 조용한 목소리로 곰곰이 그것을 다시 보여주고 있는 것이 그의 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도 그의 시가 주는 울림은 작지가 않다. 공허하게 머릿속에서 만들어 짜 맞춘 시가 아니라 삶의 현장 속에서 체득된 시이기 때문이리라. 말이나 표현이 쉽고 평이하면서도 전혀 진부하지 않고, 다 아는 내용 같으면서도 문득 신선하게 다가오는 대목도 주목할 만하다."


이런 고증식의 시집을 읽으며 아내를 새롭게 볼 수 있다면 그것 또한 큰 복(福)이 아니겠는가?

단절

고증식 지음, 실천문학사(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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