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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바닷가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전 세계를 경악케 했던 백인계 호주인들과 중동계 호주인들의 충돌은 사흘여가 지난 지금 잠잠해졌다.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시드니 동남부 크로눌라 비치와 마루브라 비치의 13일 낮 풍경은 전형적인 여름바다 그대로였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평화를 되찾았을지언정 물밑으로 흐르는 충돌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사소한 싸움이 인종폭동으로

이번 폭동은 12월 4일, 크로눌라 비치에서 축구게임 중이던 예닐곱 명의 레바논계(레바니스) 청년들의 공차기를 백인 수상안전요원들이 중단시키면서 촉발됐다. 호주에는 주말에 한해 공놀이를 금지하는 비치가 여러 곳 있는데 크로눌라 비치도 그런 곳 중의 하나다.

▲ 전 세계를 경악케 했던 백인계 호주인들과 중동계 호주인들의 충돌.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시드니 동남부 크로눌라 비치는 평온을 되찾았다.
ⓒ 윤여문
수상안전요원의 저지를 인종차별로 받아들인 레바니스들은 백인 안전요원에게 몇 차례 폭행을 가했고, 이 사소한 시비가 발단이 돼 호주 전역의 인종폭동으로 불거졌다. 특히 높은 청취율을 기록하고 있는 라디오 토크 백 프로그램(전화대담)의 진행자들이 "백인 수상안전요원이 레바논 갱들에게 구타당한 사건은 용납할 수 없다. 그들을 응징하자"는 식의 선동적인 방송을 내보내면서 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극우 성향의 라디오 토크쇼 스타 진행자인 알란 존스는 폭동이 있기 전 방송에서 백인들의 집결을 부추기며 "오늘은 레바니스와 중동 놈들을 두들겨 패는 날!"라는 믿기 어려운 발언을 하기도 했다.

라디오방송을 들은 백인계 호주인 5천여 명이 크로눌라 비치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호주 국기를 흔들면서 '호주의 아리랑'격인 'Waltzing Matilda'를 부르고, 호주 사람을 칭하는 "오지(Aussie)! 오지! 오지!"를 외치면서 "레바니스는 호주를 떠나라!"라고 외쳤다.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크로눌라 비치를 찾은 중동계 사람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폭행을 가했다. 이를 제지하는 경찰관과 앰뷸런스 요원들도 폭행당했다. 경찰당국에 따르면, 폭력에 가담한 백인 중에는 호주 극우단체인 '애국청년단'과 '원 네이션 파티'의 단원들도 포함됐다.

이어 백인계 호주인들에게 선제공격을 당한 레바니스들의 반격이 시작됐다. 11일 밤, 레바니스들은 마루브라 비치로 몰려가 100여 대의 차량을 파괴했다. 다음날인 12일 밤에는 라켐바에 위치한 모슬렘 사원에 모인 수백 명의 중동계 청년들이 "모슬렘 형제들이여, 이번 주말에 모이자!"라고 외치며,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이를 전파했다. 백인계 호주인들도 또다시 "우리도 다시 모여서 레바니스들의 숨통을 조이자"는 메시지를 전파했다.

불량배들의 싸움? 인종차별주의적 폭거?

호주 최대일간지인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12월 12일자 헤드라인으로 '호주의 불명예'라는 제목을 달았다. 신문은 "같은 호주인임에도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백인계가 중동계를 공격하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했다"며 "1970년대에 사라진 백호주의 망령이 되살아난 것 같다, 이는 다민족 다문화주의를 표방하는 호주의 가치를 더럽힌 사건"이라고 진단했다.

존 하워드 총리는 "인종이나 외모, 민족성을 이유로 공격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면서도 "이번 폭동은 인종차별적인 사안이라기보다 불량배들이 법과 질서를 어긴 범죄행위"라고 애써 이를 축소하려 했으나 대부분의 호주 정치권 인사들과 지역사회, 종교계 등은 '인종차별주의적인 폭거'라고 정의했다.

▲ 레바니스의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불탄 어번 연합교회.
ⓒ 윤여문
호주 사회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앵글로색슨계 백인그룹 리더들과 중동계 리더들은 12일 밤, 긴급회동을 갖고 더 이상 사태가 악화되지 않도록 대책을 강구했다. 이날 회의에 참석했던 켄 몰로니 뉴사우스웨일스 주 경찰청장은 주정부에 특단의 조치를 요청했고, 모리스 예마 주총리는 "신속한 법 개정을 통해 처벌을 강화하고 사건발생지역 봉쇄, 검문강화, 주류판매시간 제한 등의 조치를 강구하겠다"고 답했다.

예마 총리는 필요하다면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당시 활약했던 특수부대 SAS의 동원도 고려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12월 15일 예마 총리의 약속대로 소요진압 및 경찰력 강화 법안이 NSW주 하원에서 여야 모두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폭동이 벌어졌던 크로눌라 비치와 마루브라 비치는 현재 밤에는 출입할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비치로 향하는 모든 길은 통제된 상태며 검문검색이 철저하게 진행 중이다. 13일 밤, 크로눌라 비치로 가려다가 제지당한 일본인 신주 미야하라(40)씨는 "비즈니스를 하느라 30번 이상 호주를 드나들었는데 이번처럼 긴장하긴 처음"이라며 "레바니스나 백인계 호주인이나 똑같은 호주사람들 아닌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13일 밤에도 폭동은 중단되지 않았다. 레바논계 무슬림들은 시드니 서부 어번에 위치한 교회를 불태웠다. 인근 가톨릭 초등학교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크리스마스 캐럴 행사도 레바니스들의 폭언과 총질 등으로 취소됐다.

호주 속의 레바니스

그렇다면 왜 사소한 싸움이 인종갈등으로까지 번진 걸까.

호주는 200여 개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다민족 국가다. 2000만 명 남짓한 호주 인구의 4분의 1이 영국(27%), 유럽(29%), 아시아(24%), 오세아니아(10%), 중동 및 북아프리카(5%)에서 온 이민자로 구성돼 있다. 정부 내에 '이민 및 다문화청'까지 구성돼 있을 정도다. '2001년 인구조사통계에 의하면, 이중 중동계 호주인의 숫자는 20만 명을 상회하고 있다. 이번 소요의 단초가 됐던 레바논계 호주인은 7만 명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 "난 여기서 자랐지만 너희는 흘러들어 왔다"는 구호를 몸에 쓴 호주의 백인 틴에이저.
ⓒ TNT
그러나 1970년대까지만 해도 호주는 백호주의(白濠主義 White Australianism)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백호주의란 1901년부터 실시된 이민정책으로 앵글로색슨계를 제외한 유색인종의 이민을 불허해왔던 정책이다. 1978년, 노동력 부족으로 이 정책이 철회되면서 아시아나 중동계 이민자들이 유입됐지만 백인과 기독교계를 우월시하는 풍토는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호주 내에서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정책은 엄격히 처벌된다.

레바논 사람들은 1970년대에 벌어진 내전을 피해서 호주로 옮겨왔다. 초기엔 주로 전쟁 난민이었다가 1980년대 이후엔 가족재결합이민 카테고리로 대거 몰려왔다. 그들은 주로 건설노동자로 일하며, 럭비와 축구선수를 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레바논계가 주로 거주하는 라켐바 지역의 실업률은 다른 지역의 2배에 달한다.

레바니스들은 시드니 캠시와 스트라스필드 근처에 밀집해있는데 이 곳은 한인밀집거주지역이기도 하다. 레바니스들은 거친 매너나 비행, 갱단 조직 등으로 백인계 호주인들에게 환영받는 존재는 아니다. '레바니스 헤이터스(Lebanese haters)'가 생겼을 정도. 게다가 911 테러, 발리 테러, 런던 테러 등이 이어지면서 중동계에 대한 백인들의 감정이 급속하게 나빠진 것도 이들의 입지를 좁게 만들고 있다.

때문에 이번 백인계와 레바니스들의 충돌을 우연한 사건으로 보지 않는 시각도 많다. 이에 대해 15일 아침, 채널9의 <투데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모리스 예마 뉴사우스웨일스 주총리는 "우리 주 총독도 레바니스 출신 여성이며, 나도 이탈리아계 이민자의 후예다"라며 "호주에 더 이상 인종차별정책이나 정서는 없다"고 말했다.

이민자의 나라 호주, 백호주의 부활하나

▲ 크로눌라 비치를 순찰하는 경찰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호주 전역에 인종갈등이 확산되고 있다.
ⓒ 윤여문
그러나 현재 호주 전역에서는 인종갈등이 확산되는 상황이다. 11일 이후 북부시드니와 서부 시드니에서는 평범한 백인계 호주인들이 폭행을 당하고 차량을 파괴당하는 일이 발생했으며,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퀸즐랜드에서는 중동계 이민자들이 아무 이유 없이 인종차별적 폭언과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 때문에 '1970년대에 사라진 백호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국내외에서 불거지고 있다. 현재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리고 있는 '아세안+3 정상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존 하워드 총리는 말레이시아 언론으로부터 "호주는 서방국가인가, 아시아의 일원인가"라는 냉소적인 질문을 받기도 했다.

특히 얼마 전 프랑스에서 벌어졌던 방리유 소요가 사회적으로 소외당해온 소수그룹인 중동계가 폭동을 일으킨 사건이었던 데 반해, 이번 시드니 소요의 경우 다수그룹(백인)이 소수그룹에게 가한 폭력이라는 점 때문에 더 우려되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지방정부와 연방정부 차원의 각종 대책이 나오고 있고, 기독교와 모슬렘 지도자들의 회동이 잦아지고 있지만 양측의 해묵은 갈등이 쉽게 수그러들 것 같지 않다는 전망이다.

"미디어가 인종싸움 부추겼다"
[인터뷰] 모슬렘 지도자와 토크 백 라디오 기자와의 만남

▲ 2UE 제임스 보이스(좌)와 케이자 트라드 이슬람 우정협회 회장.
ⓒ윤여문
12월 13일 오전 마루브라 비치에서는 마루브라 지역의 서퍼(파도타기) 그룹인 '브라 보이스'의 리더 두 명과 호주 모슬렘 지도자인 케이자 트라드(Keysar Trad) 이슬람 우정협회 회장 일행이 서로 악수를 나누면서 화해의 제스처를 보였다.

트라드 회장과 이번 사태를 부추긴 토크 백 라디오 중 하나인 2UE 제임스 보이스(James Boyce)를 만났다. 양측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12일에 뉴사우스웨일스 주정부, 경찰, 백인계 지역인사 등과 회동을 가졌는데 어떤 결과를 얻었나.
(케이자 트라드) "빨리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정부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결론과 함께 양측 지도자들의 설득작업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다짐도 했다. 경찰당국은 소요진압 의지를 분명하게 밝혔다."

- 사소한 사건이 이렇게 커진 이유는 무엇인가?
(케이자 트라드) "미디어가 청소년들 간의 싸움을 인종갈등으로 비화시켰다. 여기 있는 제임스 보이스 기자가 속한 2UE가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한다. 이는 인종차별금지법에 저촉되는 사항이기 때문에 앞으로 법적 대응도 불사하지 않을 예정이다."

- 기자는 그 점에 대해서 반론할 생각이 있는가?
(제임스 보이스) "호주는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다. 그러나 그 문제는 문제의 소지가 많아서 방송국 내부에서도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2UE방송국도 이번 사태가 빨리 수습되기를 바라고 있다. "

- 이번 사태로 한국계를 포함한 이민자그룹 전체가 불안해하고 있다.
(제임스 보이스) "그 점은 안타깝다. 그러나 호주엔 늘 소수민족그룹의 문제가 상존해 왔다. 10여 년 전엔 베트남계, 20여 년 전에는 이탈리아계, 그 이전에는 아일랜드계가 문제를 일으킨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다수그룹인 백인들이 관용의 정신을 망각하면 호주의 다민족, 다문화주의는 큰 위협을 받게 된다."

- 오늘(13일) 오전에 '브라 보이스'와는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나.
(케이자 트라드) "아마 '브라 보이스'는 전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이 모인 서퍼 그룹일 것이다. 그들은 크로눌라 비치에서 일어난 폭동을 비난했고 중동계 호주인들이 마루브라에 오는 것을 언제나 환영한다고 말했다."

(제임스 보이스) "사실 '브라 보이스'는 서퍼그룹이면서 오토바이 갱단이기도 하다. 그들 중의 일부는 크로눌라 인종폭동에 가담하기도 했는데, 오늘 아침에 사과의 뜻을 레바니스들에게 전했다. 두 그룹이 화해한 것은 시드니 남부지역의 안전에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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