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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화 물결 속에서 정보 격차는 새로운 사회적 불평등과 불안 요소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정보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지만, 연령별·소득별·지역별 정보 격차는 쉽게 줄어든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정보통신(IT) 강국으로 평가받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정보 격차 해소에 이바지해야 할 책임과 과제가 있습니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국·내외 정보 격차의 실상과 해결 방안 등에 대한 기획 연재 기사를 게재합니다. 여섯 번째로 남태평양 이스터섬의 시민기자를 소개합니다. <편집자주>
마고 오투스 살리나스는 거석상으로 널리 알려진 남태평양의 고도 이스터 섬에 살고 있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다. 서구인들이 '부활절(Easter)섬'으로 부르는 이 섬의 현지 이름은 '라파 누이'.

열악한 인터넷 접속환경에도 불구하고 영어판 <오마이뉴스 인터내셔널>의 시민기자로 가입해 라파 누이의 생활과 풍광에 대해 흥미로운 기사를 꾸준히 올리고 있는 마고 오투스 살리나스를 최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

이스터 섬의 <오마이뉴스 인터내셔널> 시민기자 마고 오투스 살리나스
이스터 섬의 <오마이뉴스 인터내셔널> 시민기자 마고 오투스 살리나스 ⓒ Margot S.
- 자신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한다면.
"내가 태어난 곳은 라파 누이(Rapa Nui)가 아니지만 아버지 고향이 라파 누이니까 나도 라파 누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말하자면 집시와 비슷하다.

1973년에 아버지가 해병대에 계셨고 쿠데타에 반대했던 다른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피노체트 정권이 들어서자 9월에 체포되셨다. 그래서 라파 누이 태생이 아닌 어머니는 홀로 당시 각각 10살, 9살, 1살이었던 세 명의 오빠들을 데리고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 바로 서쪽에 위치비나 델 마르의 집에서 나를 출산할 준비를 하고 계셨다. 이 곳에 있는 모든 주택은 군 장교 소유였고 여기 주민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지프차도 한 대 준비되어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거의 군용 지프에서 낳을 뻔 했다고 말씀하신다. 그 당시에는 "토크 데 퀘다 (toque de queda)"라는 통금제가 있어서 저녁 6시까지는 모든 사람들이 귀가해서 집안에만 있어야 했고 혹시 밖으로 돌아다니면 극단주의자로 몰려 체포될 수도 있었다. 아무튼 나는 저녁에 태어났고, 지프로 어머니를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 다행히 병원에서 태어날 수 있었다.

내가 태어나고 나서 두 달 후 아버지께서 마침내 풀려나 집으로 돌아오셨다. 아버지는 해병대를 전역하셨고 우리 가족은 다음날 첫 비행기를 타고 이 곳 라파 누이의 집으로 왔다.

지금 나는 라파 누이에서 장로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은 그들에게 스페인어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고 이 단어를 라파 누이 언어나 라파 누이에서의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지 연구하는 것이다. 정말 흥미로운 일이다. 그래서 내 일과의 거의 80 퍼센트 가량을 이 일에 쏟아붇고 있다. 나머지 20 퍼센트의 시간에는 밴드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살리나스 기자의 가족 및 친족들. 1977년에 찍은 사진이다.
살리나스 기자의 가족 및 친족들. 1977년에 찍은 사진이다. ⓒ Margot S.
- 라파 누이에서의 성장 과정에 대해 말 해달라.
"라파 누이 섬에서 자라는 것은 정말 멋진 경험이었다. 다섯 살부터 학교에 다니기 시작해 읽고 쓰기를 배웠지만 집에서는 말 타기나 채소 가꾸는 법을 배웠다.

좀 더 나이가 들어서는 학교에서 수학을 배우는 것 외에도 낚시를 배웠고 집에서는 어린 닭을 키우는 일이 내 몫이었다. 그 때 아버지와 친척들은 내게 라파 누이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을 가르쳐 주었다. 학교에서는 칠레 역사를 배웠다. 친구들은 집에 놀라와서 아버지께서 들려주시는 고대 역사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물론 이 이야기들은 아버지께서 마을 어른들로부터 들으신 것들이다. 친구 부모님들은 아이들을 우리 집으로 보내서 이런 이야기를 듣고 배우기를 원했다.

나는 기타 연주, 전통 춤, 오래된 노래들을 배웠다. 부모님을 도와서 먹거리를 재배하고 추수했고 이것을 가지고 요리를 했다. 14살이 되면서는 육지로 가야만 했다. 섬에는 고등학교가 없었고, 그래서 육지에서 대학까지 다니게 됐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라파 누이 젊은이들이 이러한 성장기를 거쳤다. 후에는 여름에만 집으로 돌아왔다. 나보다 어린 라파 누이의 청년들도 이런 과정을 거쳐 성장하고 있다."

- 육지로 가는 비행기나 배 삯은 얼마나 되나? 혹시 섬 사람들 중에 평생 섬을 떠나지 않은 사람도 있는가? 그런 사람을 알고 있다면 말 해 달라.
"이스터 섬에서 산티아고까지 가는 비행기 값은 585 칠레 페소 (약 1,110 달러) 다. 웹사이트에서 가격을 알아볼 수 있다. 뱃삯은 정말 저렴하지만 (미화 약 120 달러) 가는 데만 일주일이 걸리고 1년에 배가 3~4회 정도 밖에 다니지 않는다. 섬에 도착한 배는 한 달 정도 정박한다. 칠레에서 섬으로 온 뒤에 같은 배를 타고 칠레로 돌아가려면 한 달을 섬에 머물러야 한다는 뜻이다. 섬에서 칠레로 가도 칠레에서 석 달이나 넉 달을 있어야 돌아올 수 있는데 이 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리고 운항하는 배도 여객선이 아니라 화물선이다.

섬을 한 번도 떠나지 않은 사람들을 알고 있지만 어떻게 묘사해야 할 지는 잘 모르겠다. 이 사람들은 큰 도시에서의 생활 같은 건 모르고 살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 같지는 않다. 사실 도시란 기본적으로는 다 같기 때문이다.

라파 누이에 와 본 사람은 세계를 통 털어 거의 없다. 대부분이 앞으로도 가 볼 기회가 전혀 없을 수 있고. 사람들은 라파 누이의 문화, 고대 역사, 조각, 동굴, 유적, 스타일 등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 이 점이 더 안타깝지만 내게 중요한 것은 라파 누이에 가는 것이지 라파 누이를 떠나는 것이 아니다."

- 처음 칠레 본토로 여행을 한 것은 언제인가.
"육지에 처음 가 본 것은 여덟 살 이었다. 어머니 눈에 문제가 생겨서 병원에 가야 했는데 섬에는 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이 없었다. 그래서 칠레로 가야 했다.

외가 친척들을 만나러 안토파가스타에도 갔었다. 그 여행에서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스모그 때문에 어지러웠고 내내 구토를 했다는 것 뿐이다. 아버지는 오빠 둘을 데리고 집에 계셨고 나도 집에 두고 온 강아지가 보고 싶었다. 걸어 다니는 것도 그렇고. 거기서 우리는 항상 버스나 차로 이동했고, 그래서 걸어 다니고 싶어했던 기억이 난다. 나와 오빠는 혼자서 과자를 사러 나가거나 해변에 가거나 심지어 그냥 돌아다니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왜냐면 그곳은 자동차와 도둑이 많았고 익숙하지 않은 많은 것들로 가득한 위험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 라파 누이 섬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가? 가격이나 속도는 어느 정도인가.
"섬에서는 인터넷을 전화선을 통해 연결할 수 있고 인터넷은 표준 속도를 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가끔 속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아마 초기에 인터넷이 보급되던 시기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하지만 누구도 속도에 신경 쓰지 않는다. 섬에서는 인터넷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파 누이 섬 도처에 서 있는 거석상 '모아이'
라파 누이 섬 도처에 서 있는 거석상 '모아이' ⓒ Margot S.
- <오마이뉴스>의 시민 기자로 지원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세계의 독자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나.
"내가 시민 기자로 지원한 이유는 사람들에게 라파 누이에 대해서 알려주고 싶어서였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스터 섬의 머리만 있는 거대한 석상에 대해 물어본다. 그 때마다 나는 "도대체 저 사람들은 어디서 모아이(Moai)가 머리만 있다고 배웠지?" 하고 묻곤 했다. 인터넷이나 책 등에 이스터 섬에 대한 무수히 많은 정보가 있지만 그 중 상당 부분이 잘못되어 있다. 이것을 고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하고 싶었다."

- 모아이는 무엇인가? 이것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모아이는 석상에 불과하다. 옛날 섬에 흩어져 살고 있던 족장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없다. 사실"모 아이(Mo AI)"는 (*원래 두 개의 다른 단어지만 지금은 붙여서 하나로 사용하고 있다) "가지고 있다" "존재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림이나 사진, 또는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해 어디에나 만들 수 있는 조각상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얘기다. 단지 차이라면 라파 누이인들이 이 석상을 매우 거대하게 만들었다는 것 뿐입이다.

지금은 라파 누이인들이 모아이 덕분에 먹고 살고 있다. 라파 누이는 이 고대 석상으로 관광 수입을 올리고 있기 때문에 모아이가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 라파 누이에 사는 동안 가장 아름다웠던 추억이나 경험이 있다면.
"지금 바로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친구들과 해변에서 놀고 있는데 사람들이 루카스 리로로코라고 하는 어부가 거대한 참치를 잡아서 만으로 가져왔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우리는 달려가서 세상에서 가장 큰 물고기를 봤다. 길이 4 미터 정도에 넓이도 1.5 미터나 됐다. 그리고 꼬리는 상어한테 물려 찢겨 있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다른 좋은 추억들도 많이 있다. 아버지가 섬의 대표로 선출되었을 때, 케빈 코스트너가 영화 촬영을 위해 섬을 방문했을 때, 일본 건설업체인 타다노가 아후 통가리키를 재건하기 위해 대형 크레인을 섬으로 가져왔을 때, 리겐 오크라고 하는 어선이 침몰해서 바닷물이 온통 기름으로 덮였을 때, 처음 무대에서 노래했던 기억, 처음 녹음한 CD, 교황께서 아버지께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 조카들이 태어난 날, 피투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강아지… 온갖 기억들을 일일이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다.

라파 누이에 대한 모든 기억이 내게는 매우 특별하다."

- 라파 누이의 젊은이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 나이든 세대가 경험하고 있는 어려움이라면 무엇이 있을까.
"섬에서 젊은이들이 할 일이 없다는 것, 육지에 가서 공부를 마쳐야 한다는 의무감, 비싼 비행기삯 같은 문제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어려움도 많지만 가장 큰 문제는 건강 문제다. 섬에는 항가 로아 병원이 있어서 뼈가 부러지거나 감기 같은 작은 질병은 치료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위급한 환자는 육지로 호송해야 한다. 이때 항공편이 있다면 다행이다. 라파 누이에서 산티아고로 운항하는 항공편은 수요일과 일요일에만 있다. 그래서 만약 목요일에 응급 상황이 발생하면 이 환자가 일요일까지 살아 있지 못할 수도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분들이 노력하고 있어 곧 상황이 나아지리라 기대하고 있다."

살리나스 기자가 직접 그린 그녀의 첫 번째 앨범 커버
살리나스 기자가 직접 그린 그녀의 첫 번째 앨범 커버 ⓒ Margot S.
- 섬의 주요 일자리와 산업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섬에서는 관광 산업이 대부분의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섬은 정말 아름답고 고고학적인 면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곳 중 하나일 것이다. 섬을 방문하는 평균 관광객수는 4만명 정도다. 이들 관광객을 위한 숙박시설, 관광, 식사, 이 외에도 온갖 다양한 서비스가 있다. 수공예품도 매우 인기가 있다. 섬에서는 관광 산업이 가장 중요하다. 물론 다른 활동도 있지만 대부분이 관광 산업과 관련되어 있다."

- 앞으로의 꿈에 대해 말해 달라.
"나는 사람들이 달에서 살게 될 때까지, 아니 그 이후까지도 라파 누이 사람들이 살아있기를 꿈 꾼다. 라파 누이 사람과 문화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이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 당신이 발표한 CD '헤 앙가 파히'가 1,000장 정도 판매된 것으로 알고 있다. 누가 주로 당신의 음악을 듣는까? CD를 추가로 찍어 낼 계획은 없나? 인터넷으로 음악을 팔아보는 것은 어떨까.
"내 음악은 주로 라파 누이 섬에 살고 계신 분들이 듣는다. 일부는 타히티 섬에 보내기도 했다. 관광객들이 기념품으로 CD를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혹시 내 음악이 좋아서 구입하는지는.. 글쎄, 잘 모르겠다. 문제는 언어가 다르다는 것이다. 칠레에서는 스페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라파 누이어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폴리네시아의 다른 섬에서는 우리 언어와 스타일로 만들어진 음악이 자신들의 음악과 유사하기 때문에 더 수요가 많은 것 같다. CD를 추가로 찍어 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새로운 곡을 만드는 중이고 곧 타파티 축제가 다가오고 있으니 그때 쯤 새로운 CD를 녹음할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우리 음악을 판매하는 건, 음... 내가 아직 그 정도로 유명한 것 같지는 않다."

- 한국이나 세계의 시민 기자 및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는 진짜 기자가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다른 기자 분들께 뭐라고 말씀드릴 입장은 아닌 것 같다. 단지 내가 여러 사람들과 나누고 싶고 들려주고 싶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쓰는 것 뿐이다. 하지만 독자로서는 나처럼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 관점을 소개하는 매체, 특히 <오마이뉴스> 같은 매체가 있다는 사실이 매우 기쁘다.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배움을 통해 우리는 다음 단계의 사회, 즉 보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아껴주는 그런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확신한다."

첨부파일
news_265049_1[1].wma

덧붙이는 글 | *기사 상단의 "첨부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살리나스 기자가 부른 노래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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