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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히 평범해서 기대 속에 찾아간 것이 머쓱했던 뜬봉샘
극히 평범해서 기대 속에 찾아간 것이 머쓱했던 뜬봉샘 ⓒ 곽교신
검룡소나 황지와 달리 뜬봉샘은 전설이 아닌 역사의 실존 인물 이성계에 의해 신성화되었다. 뜬봉샘에서 금강의 첫 샘이 솟기 시작한 것이 조선 왕조가 시작된 16세기 말부터가 아닌 것은 분명하건만, 금강 발원지 뜬봉샘은 이성계의 설화로 샘물이 솟기 시작한다. 아니, 새 왕조 개창의 정당성 확립에 뜬봉샘은 적절한 배역으로 잠깐 찬조 출연한다.

전국 명산을 다니며 새 왕조를 얻기 위해 기도하던 이성계가 장수 신무산에서 백일 기도를 올리던 중에 산 중턱에서 봉황이 날고 무지개가 피어 그 곳에 가보니 샘이 솟고 있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뜬봉샘이라는 얘기다. '봉황이 떴다'고 '뜬봉' 샘이라 했단다.

어쨌건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에 정치성을 배합해 '용비어천가'라는 민심수습용 문학이 탄생했듯이, 뜬봉샘의 이성계 관련 설화가 왕조 개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개국 공신들이 작심하고 만든 이야기이든, 새 왕조에 편승하고 싶은 고려말 지역 호족들이 지어낸 이야기이든 뜬봉샘은 이성계에 의해 본의아니게 새로운 의미의 물이 되었다. 그리고 이 줄거리가 적힌 장수군청에서 세운 안내판은 검룡소나 황지의 애교 있는 황당함처럼 별 이의 없이 방문객들에게 읽혀진다.

이렇게 금강 발원지의 상징성은 이성계의 기도에 감응한 것으로 되어 버린 봉황과 무지개로 치장됐다. 그러나 이성계의 봉황은 그후 역사 흐름 속의 금강과 크게 상관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다만 금강 하류에서 시대를 꿰뚫어 보았던 민족시인 신동엽을 키워낸 금강 발원지의 상징성은 이성계가 이미 16세기 말부터 저작권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 정도랄까.

한반도 역사에 기록된 왕조 창시자 중 가장 도도했던 이성계도 굳이 연을 맺고 싶었을 만큼 뜬봉샘도 역시 기가 강한 곳이다. 백제를 찬란하게 슬퍼했을 금강은 푸른 비단(錦) 몇 만 필이 풀려 흐르기에 이름까지도 도도한 '비단의 강' 금강(錦江)인가?

조용하면서 강렬한 기가 솟는 곳

뜬봉샘은 검룡소나 황지처럼 샘물이 많이 솟지도 않고 주변 풍광이 특별히 신령스럽지 않다. 샘물의 용출량은 적지만 기가 왕성하던 섬진강의 첫 발원지와도 다르다.

금강의 첫 출발. 흘러 나가는 방향이 북쪽이다. 이후 금강은 대청댐까지 북으로 흐른다.
금강의 첫 출발. 흘러 나가는 방향이 북쪽이다. 이후 금강은 대청댐까지 북으로 흐른다. ⓒ 곽교신
소풍 가서 장기자랑을 위해 둥글게 앉으면 좋던 숲 속 공터 같고, 아침마다 오르는 동네 약수터처럼 낯이 익다. 신성함보다는 친근함이 느껴져 허위허위 찾아간 것이 머쓱하다. 보는 마음에 부담이 없고 편안하다.

그렇게 편안히 시작하는 금강이지만 연약한 강물이 아니다. 샘을 떠나자마자 작심한 듯 줄기차게 북으로 방향을 잡고 흐른다. 댐을 막아 나라 안의 세 번째로 큰 호수가 된 충북 청원 대청호에 이르도록 내내 북으로만 흐른다.

북쪽의 군사 강국 고구려에 밀려 한강을 버리고 남쪽 부여까지 내려갔으나 금강을 거슬러 올라온 당나라 군대와 신라의 협공에 사흘 밤낮을 불타다가 역사에서 사라진 백제의 한은 오래 전에 예정된 역사의 수순이던가. 그래서 금강은 발원지부터 한스럽게 북으로만 달리는가.

그러나 금강 물줄기는 대청호에서 더 이상 북으로 흐르지 않고 물길을 왼쪽으로 크게 틀어 공주(웅진), 부여(사비)를 지나 군산 앞바다로 나아간다. 한강가의 문명국가 백제가 그 물길을 따라 내려가며 두 번이나 천도했고, 그 물길을 거슬러 올라와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치러 왔다.

백제가 사라진 후 천 년이 더 지난 1960년대 부여의 한 가난한 청년이 당시에는 아무도 그 뜻을 알아채지 못하던 "껍데기는 가라"는 시어를 외치며 그야말로 피를 토하다가 죽었다. 60년대 신동엽이 외치던 그 껍데기는 온갖 시대의 핍박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그리고 드디어 2005년에, 금강이 낳은 시 '껍데기는 가라'는 북으로 가서 시인의 부인이 떨리는 음성으로 평양 하늘에 낭송해 한반도 북쪽의 백성들이 감동의 기립박수를 치게 했다. 북녘의 우리 동포 그들 마음 속의 껍데기는 무엇이었을까.

북으로 흐르고 싶었던 금강은 힘이 다해 북으로 흐르지 못했지만 금강가에서 금강의 정기가 키워낸 한 청년 시인의 시 정신은 결국 북으로 흘렀다. 부드러운 비단의 강 금강의 정기가 외유내강임을 보여준 조용한 함성이었다. 그러나 이 함성을 제대로 들은 이는 2005년에도 많지 않아 보인다.

겨레의 장강 금강은 용비어천가 속편처럼 정치적으로 얄팍히 응용되고 끝날 강이 아니다. 그 강을 따라 천도를 거듭하다가 그 강을 따라 올라온 당나라 군사에게 짓밟히고만 부여의 운명으로 끝날 강이 아니다.

동학 농민군이 그 금강 물로 목을 축이며 임금이 하늘이 아니라 '백성이 곧 하늘'이라는 천지를 개벽할 무섭고 놀라운 말을 만천하에 외치게 한 기적의 강이다. "껍데기는 가라"를 2005년의 평양 하늘에 울리게 한 외유내강의 정기가 곧 금강의 정기다.

지름 약 2미터, 깊이 약 1미터의 뜬봉샘.
지름 약 2미터, 깊이 약 1미터의 뜬봉샘. ⓒ 곽교신
백성은 죽어서도 입지 못할 비단이지만 가장 낮은 곳에서 살던 백성들에게 금강의 물결은 곧 부드러운 비단이었으리라.

쇠스랑과 죽창을 치켜들고 중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 장렬히 맞서다 산화한 농민군의 뼈가 아직도 수습된다는 금강 부근 우금치 고개에 묻힌 영령들에게 금강은 살아서는 꿈에서조차 입지 못하던 비단이리라.

그래서 비단의 강, 금강이리라. 가난한 온 백성이 염원처럼 비단을 풀었기에 비단의 강 금강이리라. 그래서 2005년에 장쾌하게 가극이 되어 북으로 흘러갔던 강, 금강이리라.

뜬봉샘이 있는 신무산 북쪽은 북향답지 않게 아늑하다. 솟는 수량이 많지 않지만 가물거나 큰 비가 오거나 늘 일정한 양의 물이 솟는단다.

샘 바닥의 낙엽 퇴적물을 걷어내려고 일 년에 한 번 여름철에 물 퍼내기를 하느라 샘에 들어가면, 샘에서 뿜는 냉기에 사지가 저려 5분쯤 간격으로 교대하며 물을 퍼낸다고 마을 사람들이 전한다.

바람은 기를 흩뜨리지만 물은 기를 모은다. 겉보기에 고요하지만 물에 녹아 솟아나는 정기가 풍광을 압도하던 뜬봉샘은 비단의 강이며 외유내강의 강인 금강의 이미지 그대로다. 고요하지만 강렬한 기를 뿜던 뜬봉샘의 외유내강이, 강렬하지만 겉보기 느낌은 늘 고요하던 백제 문화의 정신적 원형으로 생각되었음은 기자의 지나친 상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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