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다빈치 코드>라는 책이 전지구상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수세기 동안 세계를 이끄는 주된 종교로서 지구 곳곳에서 권위를 자랑해왔던 기독교, 특히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구교 카톨릭의 교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이 책은 오랜 세월동안 당연시되어왔던 성경에 커다란 물음표를 제시했고 이후 <다빈치 코드의 진실> <다빈치 코드 깨기> 등 반론을 제기하는 책들이 잇달아 출시될 만큼 뜨거운 논쟁거리를 제공했다.
아직 역사 추리물도, 미술사 소설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1996년, 한국에 이미 그런 소설이 존재했다. 출판 당시 '신비주의와 신화적 상상력의 세계를 종횡으로 넘나드는 지적 모험의 소설'이라는 평을 받았던 이 책은 르네상스 시대와 현대를 넘나들며 그리스 신화, 연금술, 기독교라는 이질적인 세 개의 거대한 세계를 하나로 아우른다.
잠깐 화제를 끌다가 잊혀졌던 이 책이 10년이 흐른 지금 <다빈치 코드> <퍼플라인> 등 역사추리물의 범람 속에서 '한국의 다빈치코드'라는 화려한 수식어을 달고 재출판되었다. <헤르메스의 기둥> (2005문학동네). 역사추리물 애독자라면 읽어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화려한 배경이 아닌가.
소설은 파르미지아니노의 '긴 목의 성모'라는 그림 한 점으로 출발한다. 종래의 마리아상보다 조금 더 긴 목을 가진 날렵한 인상의 성모 마리아가 다소 늙어 보이는 아기예수를 안고 있고 그 뒤로 하얀 기둥이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밑에는 조그만 사람 하나가 손으로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다. 미술학도인 승호는 왠지 이 그림에 끌리게 되고 이 그림이 범상치 않은 그림이라는 것을 간파, 그림 속에 숨어있는 뜻 일부를 해독해내면서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진다. 승호는 화제가 된 논문을 발표하는 현장에서 '잭'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와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 갔다가 살인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전형적인 역사추리물 도입부 광경이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독자는 방대한 스케일의 미술사와 만난다. 그저 유명한 명화겠거니 하고 지나쳤던 많은 그림들 속에 비밀리에 숨겨져 있던 암시들에 의해 깜짝 놀라기도 하고, 펼쳐질 더 커다란 비밀들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설레기도 한다. 그림과 함께 살짝 살짝 보여주는 신들의 모습을 쫓아가다보면 서양예술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 신화의 복잡한 양상이 어느새 단순하고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연금술에 있다. 금을 만들어내는 마술사, 속임수에 능했던 이단정도로 취급되어오던 연금술이 작품 속에서 그 실체를 드러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위인들'도 연금술사였고 프리메이슨 단원들도 연금술사였으며 심지어 연금술을 절대 금기로 삼았던 카톨릭의 수장인 교황조차도 한때는 연금술사였다.
연금술은 기독교의 반대선상에 있지 않으며 오히려 진정한 기독교와 상생하게 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소설의 한가운데로 진입하다보면 독자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리스 신화와 연금술, 기독교가 어우러져 내는 조화로운 빛, 그 어울림에 깜짝 놀라게 된다. 그리스 신화 속의 신들과 연금술, 예수 그리스도가 사실은 하나였단 말인가.
...미셸이 지향하는 새로운 교회의 집회날로는 메르쿠리우스의 날인 수요일이 안성맞춤이었다. 영어의 웬즈데이Wednesday도 오딘, 즉 노르웨이인들이 믿는 한 신에게 바쳐진 날인데, 오딘은 바로 헤르메스이다. 독일의 보탄에 해당하는 이 신은 자신의 지팡이에 룬 문자로 된 우주의 비밀을 적어가지고 다녔다. 그 나무지팡이는 '이그드라실', 즉 지혜의 나무로 만든 것으로 한 때 오딘은 그 나무에 묶여 있었다. 나무로부터 풀려남과 동시에 그는 지혜를 얻고 문자도 발명했다. 바로 그 문자는 고대 룬 문자이다. 오딘은 문자의 신이기도 한 것이다. 올림푸스 산에서 문자를 발명했던 헤르메스는 정확히 오딘과 일치한다...
평소에 무심코 받아들였던 단어의 유래, 어원, 그에 내포된 암시들이 다양한 곳에서 빛깔을 내며 의미를 가지게 된다. 다분히 형이상학적인 이 책이 독자의 일상에 형이상학적 색채를 입혀 주위의 모든 것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다시 한 번 바라보게 되는 체험을 선사하는 것이다. 방대한 양의 지식과 함께 깊은 사유의 물결도 밀려온다.
...당시 미셸은 행성세계의 끝에 관한 문제에 도달했다. 우주는 끝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즉 이 설명은 자체 내에 모순을 갖고 있다. 우주가 끝이 없다면 인간은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 유의 세계는 무의 세계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유의 세계가 계속 이어질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주가 끝이 있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끝이 있다는 것은 한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 한계 저편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시 우주가 아닌가? 그것은 다시 유의 세계가 아닌가?
결론적으로 우주는 끝이 있으면서도 없다. 어디까지가 우주일까? 그렇지만 그런 걸 설정할 때마다 다시 우주는 인간의 인식이 닿지 못하는 저편으로 달아난다. 마치 지평선이 항상 우리들로부터 멀어져가는 것처럼. 절대로 인간은 지평선에 다다를 수가 없다. 우주는 끝이 있으면서도 없다. 그게 진리다. 모순을 아는 것이 진리다. 모순 없는 물질이나 명제는 소용없다....
유와 무의 세계, 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 우주의 끝에 대한 사유. 미술사로 시작한 책이 종교와 역사로 범위를 넓혀가다가 급기야 철학과 만난다.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굳이 어려운 철학서를 펼쳐볼 필요는 없다. 당신의 무의식에 잠재해있던 다양한 의문들을 내가 끌어올려 드러내겠다. 작가는 끊임없이 우리의 잠재의식에 추파를 던진다. 책과 함께 헤엄치면서 독자는 평소에 생각해보지 않았던 많은 영역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고 짜릿한 지적 쾌감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소설이라고 보기엔 구조가 너무 엉성하고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다분히 평면적이다. '추리물'의 특성인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이나 범인을 알고 싶어하는 조바심 등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실들이 튀어나올 것 같은 제법 비밀스런 분위기로 시작한 소설은 시간이 갈수록 뻔한 결말을 내보이면서 한편의 미술사 강의-역사와 철학이 가미된 굉장히 흥미로운 강의-를 듣는 듯하다.
특히 헤르메스가 자웅동체의 헤르마프로디투스의 개념으로 결국 예수, 프랑수아 1세, 연금술사와 일직선상에 놓인다는 상당히 신선하고 충격적인 개념은 각각의 등장인물에 의해 너무 많이 반복되어서 후반부에는 굉장히 진부하게 느껴진다. 차라리 소설이 아닌 미술사 인문서 정도로 펴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저자는 미술, 역사, 연금술, 철학, 신화, 문학이라는 여러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방대한 양의 지식을 아낌없이 선사한다. 작가가 막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한 프랑수아 1세라는 인물도 독특하고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 프랑수아 1세 시대의 다양한 역사적 인물들-그의 며느리 카트린, 헨리 8세, 독일의 카를 황제-의 또다른 면모를 만날 수 있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이다.
<다빈치 코드>나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과 함께 비교하며 읽으면 더 흥미롭다. 작가는 1969년 서울 태생으로 한국에서 고고미술사학을 공부하고 프랑스에서 유학한 송대방, 이 작품의 출판 당시 26세였다.
덧붙이는 글 | 참고서적: 댄 브라운 <다빈치 코드>
김동리 <사반의 십자가>
이문열 <사람의 아들>
어윈 루처 <다빈치 코드 깨기>
볼프람 플라이쉬하우어 '퍼플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