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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 야외에 전시중인 북관대첩비(위 상륜부와 아래 기단부는 돌려받은 뒤 문화재청이 보존처리할 때 만들어 붙인 것임)
국립고궁박물관 야외에 전시중인 북관대첩비(위 상륜부와 아래 기단부는 돌려받은 뒤 문화재청이 보존처리할 때 만들어 붙인 것임) ⓒ 김영조
올해 문화유산 분야의 가장 큰 사건은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개관일 것이다. 8년간의 대역사를 마치고 지난 10월 28일 개관한 새 국립중앙박물관은 12월까지 무료관람과 함께 국보 59점, 보물 79점에 이르는 전시 등으로 긴 꼬리를 잇는 관람객의 열풍을 불러왔다. 새 국립중앙박물관은 개관 44일(휴관일 제외) 만인 12월 16일 관람객이 100만 명을 넘어섰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런데 새 박물관 문을 열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또 있었다. 문 연 날 박물관 가운데 통로 중심에는 많은 사람으로 둘러싸인 탑이 있었는데 그것은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에게 약탈된 뒤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돼오다 돌려받은 북관대첩비였다.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는 임진왜란 때 선비 출신의 정문부를 대장으로 한 함경도 의병 3천 명이 일본의 2만2천 대군을 물리친 전공비인데 높이 187cm, 너비 66cm, 두께 13cm이다. 이를 1905년 러·일 전쟁 때 함경지방에 진출한 일본군 제2예비사단 여단장 이케다 소장이 주민들을 협박해서 파내 가져간 것으로, 한국의 선비가 일본의 사무라이를 제압했다는 큰 의미가 담겨있는 비이다.

국립중앙박물관 개관일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인 북관대첩비
국립중앙박물관 개관일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인 북관대첩비 ⓒ 김영조
도쿄 한국연구원 원장 최서면 선생이 밝혀내어 비문에 이름이 있는 의병의 후손들과 정부의 노력으로 반환받았다. 특히 지난 6월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비 반환에 대하여 남북한이 합의한 뒤 급물살을 타 지난 10월 20일 100년 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1월 6일까지 국민들에게 선보인 이 북관대첩비는 보존처리를 거친 뒤 내년 북한에 인도되기 전까지 국립고궁박물관(경복궁) 야외 잔디밭에서 전시 중이다.

그런데 이 북관대첩비를 소설로 쓴 책이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안동일씨가 쓴 역사자료소설 <북관대첩비>(브레이크 미디어)이다.

좀 생소한 역사자료소설이란 무엇일까? 글쓴이는 '책머리에'서 "사실적 사료를 바탕으로 실제 인물들이 실명으로 등장하지만 적당한 부분에서는 작가의 상상력이 동원됐기에 팩션(팩트+픽션)이라 이름했고, 역사를 구명하는 자료로서의 가치도 지니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자료소설이라고 이름했다"라고 말한다.

이 소설은 역사자료소설답게 곳곳에 자료와 현상에 근거한 일본 바로보기가 시도되고 있다. 그 몇 가지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일본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천황가는 초대 천황인 진무(神武)로부터 현재 천황인 125대 헤이세이[平成]까지 2천 년이 넘게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천황가가 한 가문으로 영원히 이어진다고 해서 일본 사람들은 이를 '만세일계(萬世一系)'라고 합니다. 여기에 의문을 가지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껏 세계 역사상 영원히 유지된 왕조는 없으니까요. (중략)

안동일의 북관대첩비 표지
안동일의 북관대첩비 표지 ⓒ 브레이크 미디어
현재 전해지는 일본 천황의 계보는 8세기 초에 쓰인 일본 역사서에 근거한 것이죠. 진무 천황이 나라를 세운 때가 기원전 660년이었다고 하는데 이 기록을 믿을 수는 없지요. 이 시기는 죠몬(繩文)시대라 불리는 일본의 신석기 시대입니다. 당연히 국가라는 것이 생길 수가 없죠."


한 화자를 통해 일본의 허구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1997년부터 우경화의 물꼬를 터준 일본 내에서는 대단했던 '전쟁론'이란 만화책 이야기도 나온다. 이를 보면 일본이 못내 섬뜩해지기도 한다.

"아무튼 책의 표지 띠의 선전 문구를 보면 그 책의 내용을 짐작케 합니다. '전쟁에 나갑니까? 아니면 일본인임을 포기합니까?'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이 만화책이 발간되자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됐고, 이와 관련한 심포지엄까지 적국 각지에서 열렸습니다. (중략) 어느 대학교수 한 사람은 '전쟁에 나갑니까? 아니면 인간이기를 포기합니까?'라고 말해 언론의 각광을 받기도 했지요."

또 메이지 정부에서 부총리에 해당하는 참의를 지냈으며 정한론(征韓論 : 1870년대를 전후하여 일본 정계에서 일어났던 조선 정복에 관한 주장)의 우두머리였던 사이고는 내각회의에서 조선 침략의 방법을 설명하면서 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북관대첩비 뒷부분
북관대첩비 뒷부분 ⓒ 김영조
"나를 조선에 사절로 파견해 달라. 조선의 조정에 도착하면 나는 그곳 대신들의 비위를 몹시 상하게 만들어 놓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저들은 당장 나를 살해할 터인즉 그때는 나의 죽음을 구실삼아 조선을 침략하라."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일본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더더구나 사이고는 조선인의 후예라는데 말이다. 이 책은 이렇게 우리에게 일본에 대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알려주고 있는 중요한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묻혀있던 선비출신 의병대장 정문부가 왜군을 물리친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있다. 조선 선비의 진면목을 여실히 드러냈다는 칭찬을 받을 만 하다 하겠다. 명망을 초월하고, 야욕이 없는, 진정 나라와 백성을 끔찍이 사랑했던 정문부를 이 시대에 다시 한번 생각케 하는 소설이라 할 것이다.

이 책은 분명 역사자료소설임에도 지루하거나 딱딱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적당한 흥미와 정보를 제공해주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어서 '일본 바로보기'와 민족 자존심이라는 우리에겐 중요한 두 주제를 무리 없이 잘 소화해내고 있다. 어쩌면 바람직한 소설의 형태라고 말해주고 싶은 감동을 준다.

다만 마지막 장 '대쥬신'에서의 이야기는 얼핏 이해가 되지 않는 구석이 있다. 김운회 교수라는 화자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자.

북관대첩비 앞에 선 저자
북관대첩비 앞에 선 저자 ⓒ 김영조
"'왜(倭)'라는 말은 쥬신, 또는 조선인, 일본인이란 말과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중략) 500년 이전의 신라를 줄기차게 공격한 왜는 일본이 아니라 경남 해안 지방의 비주류 가야인들이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중략) 여러분들이 항상 왜놈이니 하면서 놀리고 욕하던 그 말이 결국 우리 스스로를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이 조센징하면서 비하하던 그 말과도 다르지 않죠. 앞에서 보았지만 일본은 조선의 다른 표현이 아닙니까?"

그런 주장이 역사학계 한편에서 존재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현재 우리 국민의 보통 상식에선 엄청나게 거리가 먼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일본은 과거처럼 문제를 극우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또는 "두 나라는 그저 사실을 차분히 살펴보면서 미래를 새롭게 설계하면 될 것입니다"라는 말이 있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마지막 장에서 상식을 뛰어넘는 주장이 등장한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책은 약탈당한 뒤 100년을 야스쿠니 신사 뒤편에 일본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땀을 흘렸을 북관대첩비의 돌려받는 과정을 소상히 들려주고 있다. 또 그 돌려받음이 우리 겨레의 정기를 다시 찾아준 것이란 의미를 잘 부각시키는 책이다.

일본이 다시 우경화, 제국화의 길을 걷고 있는 이때 우리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또다시 우리 한반도를 식민지화하려 한다는 의심을 받는 일본에 대한 본 모습을 정확히 파악하고, 정문부 장군의 정기를 받아 철저히 대비하는 자세를 갖추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북관대첩비를 돌려받은 우리의 미래는 밝다"
[인터뷰] <북관대첩비> 저자 안동일

▲ 안동일씨
ⓒ김영조
- '역사자료소설'이라는 것이 좀 생소한데.
"자료에 근거했으며, 자료로써 쓰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쓴 자료 중심의 소설이기에 그렇게 불렀다. 이 소설은 북관대첩비의 의미와 가치를 알리려 쓴 것이다. 처음에 돌려받기 어렵다고 생각했다가 일이 빨리 진행되어 급히 두 달 만에 완성했다. 따라서 오탈자도 많고 많이 모자란다. 앞으로 책이 인기가 있어 2쇄를 한다면 좀 더 보완하여 낼 생각이다."

- 어떻게 북관대첩비에 관심이 있게 되었고, 소설을 쓰게 되었나?
"'광복60주년기념사업회' 일을 하게 된 이후 의미있는 사업을 생각하다가 한 분의 조언을 듣고 아주 적합한 사업이라고 생각되어 관심을 갖고 추진하게 된 것이다. 처음엔 '행주대첩비, 진주대첩비 등도 있는데 왜 하필 북관대첩비를, 그것도 무거운 돌덩어리를 가져갔을까? '에서부터 시작했다. 또 '왜 하필 일본 200만이 넘는 일본 사무라이 군신들이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해놓았을까?'라는 물음도 갖게 되었다.

원래는 누리집에 연재하려고 시작했는데 더 많은 사람이 보게 하기 위해선 책으로 내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일본을 이길 순 없을지 몰라도 북관대첩비의 비사를 잘 활용하면 일본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나는 한다."

- 15장 '대쥬신' 편 김운회 교수의 이야기에선 좀 받아들이기 곤란한 부분이 나온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나?
"이 부분은 내 생각이 아니라 서울대 김운회 교수의 주장이다. 사실 나도 '왜'가 조선인, 일본인과 같은 말이라는 데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다만, 그동안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 너무 소홀했다는 자책에서 탐구하기 위한 논쟁을 유발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 국민은 서양사는 너무도 잘 안다. 하지만, 우리 역사는 잊고 있다. 서양사는 어쩌면 문학의 힘으로 많이 알려진 측면이 강하다. 그래서 우리도 앞으론 이런 역사자료소설들을 통한 우리 역사의 재조명과 함께 모든 국민이 좀 더 재미있게 우리 역사를 알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 광복60주년기념사업회에서 한 사업들을 보면 '북관대첩비 반환' 등의 굵직한 일들도 물론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왜곡되었다는 의심을 받는 '종묘제례 바로잡기' 등 좀 더 근본적인 문화광복과 관련한 사업은 없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솔직히 말해서 그런 건 사실이다. 정말 문화광복이 중요한 부분인데 기념사업이 마무리된 지금 그런 지적을 받고 보니 관련된 사업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북관대첩비'라도 돌려받은 게 그나마 문화광복의 하나로 보아 다행이라고 하겠다. 문화부분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왜곡이 된 부분이 많을 터고, 이를 바로잡는 것이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다."

인터뷰를 하면서 저자는 '북관대첩비는 조선의 명당에 있고, 기가 센 물건이니까 빼앗아 와야 조선을 병탄할 수 있다'라고 했다는 사이고의 말에 대한 자료를 찾으려 애썼지만 찾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고 털어놓는다.

인터뷰를 마치고 기자는 저자와 함께 고궁박물관에서 야외전시를 하고 있는 '북관대첩비'를 보러 갔다. 그는 비를 다시 보면서 무척 감격스러운 듯 주변을 여러 번 돌았고, 200만의 사무라이 군신을 홀로 이겨낸 정문부 장군의 기를 받아 우리나라의 미래는 환하다는 걸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러면서 기자에게도 기를 받은 덕담을 들려주며 흥분을 내내 감추지 않았다. / 김영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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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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