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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훈은 <운명>에 빠져 있었다. 그의 따뜻한 마음을 기사로 널리 전하고 싶었던 것도 '운명'이었을까. 솟아오르는 감흥을 누르며 사진을 찍어야 하는 임무는 일종의 고문이었다.
정명훈은 <운명>에 빠져 있었다. 그의 따뜻한 마음을 기사로 널리 전하고 싶었던 것도 '운명'이었을까. 솟아오르는 감흥을 누르며 사진을 찍어야 하는 임무는 일종의 고문이었다. ⓒ 곽교신
지휘자 정명훈은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 정상의 음악가다. 그는 분명 세계의 유명 오케스트라가 탐내는 지휘자다. 그의 기량을 논하는 것이 새삼스럽다. '정명훈식 해석'은 세계음악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음악적 카리스마는 몸속에서 과거의 음악이 다시 태어날 것임을 예고하는 듯하다. 우리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던 그를 바라보는 세계 음악계의 눈이 그렇다.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1월 1일부터 3년간 서울시립교향약단(Seoul Philharmonic Orchestra, 이하 서울시향) 상임지휘자로 우리 곁을 찾는다. 1년에 10주 이상은 서울시향과 함께 보내겠다는 취임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는 4일 오전 귀국하자마자 공항에서 서울시향 연습실로 직행해 신년음악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렵게 약속을 하고 서울시향 연습실로 찾아갔을 때, 정명훈은 단원들과 함께 베토벤의 교향곡 <운명> 속에 묻혀 있었다. '운명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로 베토벤 음악 세계의 전체로 해석되는 그 유명한 멜로디의 연주 순간에 연습실의 문을 열었던 셈.

창작에 몰입해 쓰고 지우기를 거듭하며 고뇌하는 작가처럼, 단원들과 낮은 목소리로 대화 하며 연주를 끊고 이어간다. 베토벤 음악의 정명훈식 해석에 푹 빠진 지휘자와 단원들은 모두 탈속의 경지에 들어가 있는 선승들처럼 보였다.

눈높이 낮춘 연주회...상임지휘자로 있는 한 꾸준히 계속할 것

그는 서울시민들을 위해 오는 10일부터 중랑 노원구 등에서 찾아가는 연주회를 가진다.
그는 서울시민들을 위해 오는 10일부터 중랑 노원구 등에서 찾아가는 연주회를 가진다. ⓒ 곽교신
정명훈은 어린 시절 '7살의 천재 피아니스트'로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서울시향과 첫 공식협연을 가졌던 인연이 있다. 이제 그 인연을 이어 머리가 희끗해진 지천명의 마에스트로가 되어 그는 서울시향의 상임지휘자로 돌아왔다.

자신이 처음 협연을 가졌던 그 오케스트라에 상임지휘자로 돌아와 처음 올리는 연주회의 무대는 결코 화려하다고 할 수 없는 작은 무대 '중랑구청 구민회관'이다.

6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연주가 있기는 하나 이는 서울 시향 신년하례식 성격의 비공개 초청 연주로, 중랑구청에서 열리는 연주가 실질적으로 상임지휘자로서의 첫 번째 공식 연주임을 시향 측은 강조한다.

세계 정상의 지휘자 정명훈이 스스로 눈높이를 내려 음악적으로 소외받았던 사람들에게 다가간다는 이 사실만으로도 이 연주회는 감동을 전해준다. 음악가로서의 정명훈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남자 정명훈의 체온이 느껴진다.

중랑구(10일)를 시작으로 은평구(11일) 구로구(16일) 노원구(18일)를 차례로 찾아가는 이 연주회의 기획은 처음부터 정명훈의 생각이었단다. "음악적으로 소외되었던 지역 주민을 먼저 찾아가자"는 정명훈의 생각은 단원들에게 다소 생경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명훈은 "상임지휘자로 있는 한 이런 찾아가는 연주는 계속 될 것"이라고 말한다.

"클래식 음악을 만날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일단 만나면 고전 음악을 즐기게 될 사람은 많다. 그들에게 문화 향수권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정명훈의 말은,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인 음악으로 연주회를 즐길 기회가 없던 이들에게 낮게 다가가려는 따뜻한 마음이 전해진다.

비싼 입장료도 부담스러워 연주회를 가야겠다고 마음먹는 일이 버거울 수밖에 없는 평범한 소시민들에게 먼저 다가가겠다는 것이 그의 뜻이다. 서울 시향 박찬연 홍보팀장은 "정명훈 선생님 본인의 의지가 아니면 이 계획은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다"는 말로 이 연주회의 상징성을 전했다.

밑으로 찾아가는 연주회...문화 인권의 민주화

정명훈 지휘의 서울 시향 연주를 관내에서 감상할 일에 "마음이 붕 뜬다"는 문병권 중랑구청장.
정명훈 지휘의 서울 시향 연주를 관내에서 감상할 일에 "마음이 붕 뜬다"는 문병권 중랑구청장. ⓒ 곽교신
처음이 어렵지 일단 시작하면 두 번째부터는 쉽다. 정명훈의 서울 시향 연주를 들은 많은 시민들이 자신도 모르게 오랫동안 마음속에 쌓고 살았던 클래식 음악과의 담장을 헐어버릴 것을 믿는다. 서울 시향이 말하는 이번 연주회의 가장 큰 목적이다.

첫 연주회의 영광을 안은 중랑구는 재정자립도가 흡족한 수준이 아님에도 적지 않은 예산을 들여 매주 금요일마다 지역 구민을 상대로 만만치 않은 수준의 '해설이 있는 음악회'를 꾸준히 열고 있다.

그 결과 이젠 날짜를 기다리는 고정팬까지 생겼을 정도로 중랑구의 문화 행정은 공격적이다. 문병권 중랑구청장은 서울 시향의 중랑구 방문을 기다리며 "연초부터 가슴이 붕 뜨며 감격스럽다"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중랑구가 쏟은 이런 문화적 노력의 연유인지 몰라도 서울 시향 연주의 인터넷 예약 접수는 10분여 만에 400석이 예약 완료되었고, 혹시나 하고 취소 좌석을 기대하는 예약 대기자만 4일 저녁 현재 400명을 넘었다는 것으로 벌써부터 고조된 연주회의 열기를 짐작케 한다. 이는 일반 대중의 문화에 대한 갈증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일이며 다른 자치단체에서도 참고할 만한 내용이다.

2006년 1월 10일 중랑구청에서 열리는 연주회에서 서울시향은 베토벤 교향곡 1번에서 5번까지 각각 1악장을 들려준다. 이웃 사람들과 함께하는 연주회장의 분위기가 어떨지 자못 궁금하다. 세계 정상급 클래식 연주를 중랑 은평 구로 노원 구민회관으로 가지고 가려는 지휘자 정명훈의 계획은 분명 '문화 인권의 민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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