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권이 '21세기의 성장동력'이라고 내세우던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가 서울대조사위원회의에 의해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을 때 서초동에 있는 서울고등법원에서는 박정희식 개발독재의 유물인 새만금사업을 '계속 해도 좋다'는 판결을 내렸다.
지난 12월 21일 열린 '새만금 사업계획 취소 청구소송'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법원은 "1심 결과 중 피고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 신모씨의 청구를 기각하며 신씨를 제외한 나머지 원고들의 청구도 모두 기각한다"며 사업 주체인 농림부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권력의 창출과 유지를 위해 태어난 새만금사업은 구소련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시작되었던 아랄해 주변의 자연개조사업과 닮은 점이 많다. 오늘날 거대한 재앙덩이로 변해버린 아랄해를 알아보고 '새만금사업 계속 추진' 판결의 의미를 알아본다.
스탈린 사후 소련의 권력 투쟁과 자연개조사업의 탄생
오늘날 물이 말라버려 거대한 재앙 덩어리가 된 아랄해. 그 재앙의 뿌리는 오늘의 새만금처럼 1950년대의 소련의 정치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갑자기 죽자 소련 공산당은 극심한 권력 투쟁에 휩싸였으나 결국 세 사람으로 압축됐다. 레닌그라드 지구당을 기반으로 한 말렌코프와 1938년 이래 비밀경찰 총책을 지낸 베리야, 그리고 흐루시쵸프가 그들이었다.
말렌코프와 흐루시쵸프는 베리야를 제거하기로 동의하고 1953년 6월 베리야를 체포하여 처형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베리야가 제거되자 이번에는 말렌코프와 흐루시쵸프간의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다.
본래 둘 사이에는 사상적으로 큰 차이점은 없었다. 스탈린식 정책을 강행하려는 몰로토프나 까가노비치와는 달리 두 사람은 획기적인 변화를 주장한 것이다. 즉 스탈린 정권이 2차대전 이후 중공업 재건에만 몰두하여 농업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식량 위기를 가져 왔다고 생각하고 소비재 산업에 치중해야 한다는 데에 인식을 같이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방법론에 있어서 두 사람은 주장을 달리했다. 말렌코프는 군수산업 위주의 중공업을 희생해야만 경공업(소비재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흐루시쵸프는 '하나를 달성하기 위해 다른 하나를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말렌코프가 집단 농장(깔호즈)은 그대로 두되 노동자들의 의욕을 높이기 위해 상여금 제도를 도입하자고 대안을 제시한 반면에 흐루시쵸프는 새로운 지역의 개발, 즉 소련 내에 제2의 곡창지대를 개발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말렌코프가 사회주의의 기본 노선을 침범한 데 비해 흐루시쵸프는 기본 노선에 수정을 가하지 않고 새로운 제안을 한 셈이었다. 이는 흐루시쵸프가 이후 권력 싸움에서 승리하게 되는 근본 원인이 되었다.
아랄해 주변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이 제2의 곡창지대로 선정되고 일대 5만 평방마일이 경작 가능하다는 내용의 사업 윤곽이 드러났다. 이처럼 아랄해의 운명은 정치 논리로 결정이 된 것이다.
소련의 많은 농업전문가들은 이 계획이 지극히 무모하다고 확신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계획의 웅대함에 매료되었고 결국 동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말렌코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안은 채택되었는데 이는 '처녀지 개간사업'으로 불리웠다.
이 사업의 실천을 위해 말렌코프가 추천한 포노마렌코가 카자흐스탄 공화국 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고 흐루시쵸프가 추천한 브레즈네프가 제2서기가 되었다. 브레즈네프의 탁월한 추진력으로 1954년 여름부터 수확이 이루어졌는데 이듬해 포노마렌코가 해임되고 브레즈네프가 제1서기가 되었다.
1956년에는 대풍작을 이루어 이에 힘입은 흐루시쵸프는 말렌코프를 제치고 권력의 정점에 서서 스탈린을 격렬히 비판할 정도가 됐다. 브레즈네프는 다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출되기에 이르렀으며 아랄해 주변의 자연개조사업은 6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아랄해의 사막화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에 있는 아랄해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호수로 염호이다. 남한 만한 넓이의 이 호수 북으로는 카자흐스탄이 있고 남으로는 우즈베키스탄이 있다. 이 호수로 파미르 고원에서 발원하는 시르다리야 아무다리야('다리야'는 터어키어로 강이라는 뜻임)의 큰 강이 흘러들고 있다. 이 곳은 연강수량 500mm 이하의 스텝기후로 농사를 지을 수 없으며 예로부터 유목민들이 말을 달리며 드넓은 초원을 누비며 살아온 곳이었다.
그러나 파미르 고원의 만년설이 여름이면 녹아내리기 때문에 두 강의 수량은 아주 풍부하여 사막에 가까운 건조지대를 적시고도 아랄해로 흘러들 정도였다. 그런데 강물이 관개에 이용되면서 아랄해는 말라가기 시작하였다. 호수 동쪽에서는 호안선이 약 100km나 후퇴해 있고, 아랄해의 면적은 6만6400㎢(1960년)에서 2만5200㎢(2001년)로, 수량은 1056㎦(1960년)에서 169㎦(2001년)로 감소했다. 면적은 40년 전의 38%로, 수량은 16%로 줄어 버린 것이다.
수량이 감소하면서 원래 염호였던 아랄해의 염류의 농도는 '사해'보다 짙어져 대부분의 어류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철갑상어와 유럽잉어 등 매년 5만t의 물고기를 잡아올리던 식량창고였던 아랄해 주변 어민들은 폐업할 수밖에 없었다.
말라 버린 호수 바닥에서 대기로 치솟아 올랐던 소금먼지가 눈처럼 떨어져 내리거나 바람을 타고 흩날려 주변의 토지가 급속히 사막으로 변해가고 있으며 빗물에 섞여 들면서 빈혈이나 폐질환을 유발하는 등 주민 건강도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또한 죽음에 이르는 전염병이 돌 것이라며 공포에 떨고 있다. 아랄해 안에 있는 한 섬에는 구소련 시대의 생물화학 병기가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까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5개국은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깨닫고 94년부터 공동으로 아랄해 살리기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관계국 사이의 이해관계가 엇갈려 쉽지가 않다.
2002년에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크스탄 등 아랄해 연안 4개국 대통령이 아랄해를 살리기 위한 국제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최근 유가상승으로 늘어난 오일 달러(1억2000만 달러, 약 1200억 원)를 투자해 2010년까지 아랄해 북쪽 호수의 수량을 현재의 두 배 이상으로 늘리기로 했다고 한다.
정치, 경제 등 모든 면에서 권위주의로 흘러버린 소련의 사회주의는 많이 생산하려 하는 생산력주의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와 일치한다. 생산한 것을 자본가가 관리하고 소련에서는 당이 관리한다. 사람과 자연을 하나로 보는 철학이 부재한 상태에서 관료들의 경쟁적인 업적주의는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만 본다. 그 결과 러시아의 자연개조사업은 자연을 파괴하기 시작한지 불과 40년 만에 이런 엄청난 재앙을 맞고 있다.
일제의 쌀 수탈정책에 희생된 서해 갯벌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생명의 근원인 물이 골짜기를 빠져나와 내를 이루고 들판을 적시며 다시 큰 강을 이루어 서해로 흘러든다. 그곳에 온갖 바다생물의 모태인 갯벌이 있다. 우리 서해안의 갯벌은 세계 5대 갯벌 가운데 하나로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이러한 갯벌을 지속적으로 파괴한 역사였다.
조석간만의 차가 크고 굴곡이 심한 해안선은 간척사업에 아주 유리한 조건이어서 농지 자체가 생산력이었던 고대국가 형성 이래 끊임없이 간척사업이 진행되어 왔다. 만입이 심한 조간대 상부에 제방을 쌓아 그 안에 물을 가두고 주변에 논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소규모 간척사업은 생태계에 큰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면서 조선을 병참기지화하려던 일제는 앞선 토목기술로 갯벌을 메워 논을 만들기 시작했다. 쌀 수탈이 목표였다. 해안선의 드나듦이 매우 복잡했던 변산반도도 일제의 간척사업으로 오늘처럼 밋밋한 해안선으로 바뀌었다.
"1917~1938년에 걸쳐 매립된 면적이 405평방킬로미터에 달하므로 이 시기에 중요한 갯벌은 다 매립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당시 매립된 갯벌은 소위 말하는 염생식물이 서식하는 부분이었다. 일반적으로 해안 습지가 생산성이 매우 높다고 알려져 있다. 이 때의 해안습지란 갈대, 칠면초, 해홍나물 등의 염생식물이 자라는 곳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일제시대에 모두 파괴되었다."
- 고철환 교수(서울대 해양학)
일제는 더 많은 갯벌을 매립할 계획을 세워놓은 것으로 보인다. 갯벌을 공유수면이 아닌 임야로 등기해놓은 것이다. 지금도 부안 곰소만 일대의 일부 갯벌은 임야로 등기되어 있다.
박정희 개발독재의 갯벌 파괴
1961년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는 그의 집권 18년 동안 지속적으로 갯벌을 논으로 만드는 간척사업을 벌여왔다. 그 첫 출발이 1963년 3월에 착공한 동진방조제 사업이었다. 부안군 동진면 문포와 하서면 의복리에서 계화도를 잇는 두 개의 방조제를 축조하여 3968ha의 갯벌을 매립하여 2500ha의 농지를 만드는 사업이었다.
이 공사는 일본인들이 계획을 세웠으나 장비의 열세로 실행하지 못한 사업이었다. 당시에는 갯것이란 흔전만전했었고 쌀이 귀했던 시절이라 온 국민의 박수를 받으며 갯벌 파괴가 이루어졌다. 일제 때만 해도 고작 몇 백미터의 작은 제방이었지만 지도를 바꾸는 물막이 공사가 이루어졌다.
1970년대 들어서는 강 하구를 틀어막는 간척사업이 벌어졌다. 안성천과 삽교천 하구를 틀어막는 아산만 방조제와 삽교천 방조제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1979년 10월 26일 삽교천 방조제 기공식에 참여하고 서울로 돌아온 박정희는 그날 저녁 김재규의 총탄으로 장기 독재체제를 마감했다. 18년 개발독재는 갯벌파괴로 시작해서 갯벌파괴로 끝난 셈이다.
1980년대 이후의 갯벌 파괴
우리나라 갯벌의 80%는 서해안에 있는데 한국의 서해갯벌은 세계에서 가장 넓은 갯벌이다. 1980년 이후 서해갯벌은 보다 대규모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1998년 해양수산부에서 펴낸 <우리나라의 갯벌>을 보면 1987년 이후에 사라진 갯벌 면적이 810.5평방킬로미터이며 이는 전체 면적의 29%에 달한다고 한다.
이러한 간척사업은 갯벌만 없애는 것이 아니다. 99년 환경부 국정감사에서 농어촌진흥공사와 한국수자원공사 등 공공기관과 당진군, 완도군 등 9개 자치단체가 20개의 간척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총 106.3km 길이의 둑을 축조하기 위해 150개의 산을 토취장으로 이용하여 이 150개의 산이 형체도 없이 사라졌거나 훼손된 것으로 조사됐다. 이렇게 깎여 나간 토취장의 면적은 서울 남산의 4배나 되는 1194만제곱미터에 이르며 이 과정에서 채취된 토석량은 15t 트럭 483만대 분량에 이른다는 것이다.
현대건설과 동아건설이 시공한 서산지구와 김포지구 간척사업에서부터 현대건설의 시화지구에 이르기까지의 초대형 갯벌파괴는 그 동기가 어이없게도 1979년 회교혁명으로 인해 '중동에서 철수하는 건설업체의 장비활용'이었다.
"건설입국의 기치를 높이 들고 그토록 잘 움직였던 우리의 멀쩡한 건설장비를 왜 갑자기 철수해야만 했을까. 미국 의존적 외교의 필연적인 실패가 원인이었다. 반미감정으로 끓어오르던 중동에서 미국의 입장을 아첨에 가깝게 두둔하던 우리까지 아랍 국가들은 경원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양키고홈!'의 우선 대상으로 지목, 허둥지둥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박병상의 환경이야기 가운데 '정부와 자본 길들이기'에서
재벌 건설회사들을 위해 정부가 큰 공사판을 차려준 것이다. 이 무렵부터 한국은 국내총생산에서 건설업의 비중이 20%에 육박함으로써 토건국가의 징후를 보이고 있었다. 토건국가란 건설업 혹은 토건업이 팽창하면서 이를 둘러싼 거대한 먹이사슬이 정치권력을 형성하고 나아가 국가의 성격을 여기에 맞도록 변형시킨 국가유형을 말한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새만금사업
새만금사업은 3김이 정치 활동을 재개한 87년 대선에서 호남인심을 사로잡기 위한 득표전략차원에서 태어났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노태우, 김대중, 김영삼 세 후보 모두 새만금사업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다.
이들이 내세운 새만금사업은 그 규모면에서 개발에 목말라 하던 전북도민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긴 33km의 방조제를 쌓아 부산광역시만 한 넓이인 4만100ha의 갯벌을 매립하여 2만8300ha의 토지를 조성한 뒤 복합산업단지를 만들어 대중국진출의 교두보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에서 나라살림을 맡은 경제 각료들은 이 사업의 시행을 반대하였다. 경제성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1991년 7월 제1야당이던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와 노태우 대통령의 영수회담에서 김대중 총재가 지역의 숙원사업임을 내세워 사업의 시행을 강력히 요구하자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여 이 해 11월 28일 성대한 기공식을 갖고 매년 예산이 투입되는 계속사업으로 방조제 축조를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정치권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에 가능했다. 이듬해 4월에 총선이 있을 예정이었던 것이다. 이미 9월에 착공한 홍보지구 간척사업 기공식이 12월 5일에 있었으며 12월 7일에는 고흥지구 간척사업 기공식이 열렸다. 불과 열흘 사이에 세 곳에서 간척사업 기공식이 열린 것이다.
신개발주의로 탈을 바꿔 쓴 새만금사업
1996년 시화호가 본래 목적인 담수호를 달성하지 못하고 결국 해수유통을 하게 됨으로써 새만금호도 시화호의 전철을 밟지 않겠느냐는 문제제기가 일게 되었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며 마침내 새만금사업에 대한 감사원의 감사가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새만금사업은 처음부터 농지를 조성하는 사업이며 그 목적이 한번도 바뀌지 않았음이 밝혀졌으나 이미 전북 도민들에게는 새만금사업은 지역발전을 가져다 줄 희망으로 굳게 자리잡고 있었다. 박정희 시절 조국 근대화와 빈곤 극복을 명분으로 등장한 개발주의 체제의 관성이 가장 낙후된 지역인 전북에서는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었다.
새만금사업 추진세력인 지방정부와 건설업계, 그리고 사업 시행주체인 농림부 산하 농업기반공사는 이러한 전북 도민들의 정서에 파고들어 지역언론을 장악한 후 장밋빛 환상을 주기적으로, 지속적으로 심어놓았다. 여기에 관변단체들이 동원되어 지역여론을 호도하였다. '새만금은 곧 전북지역 발전'이라는 등식이 신앙처럼 전북도민들의 마음 속에 들어앉았다.
1999년 1월 김대중 정부의 김성훈 농림부 장관은 "전북도가 방조제 공사 보류를 요청하면 환경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해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혔으나 정균환, 김진배, 정동영 등 전북 지역 국회의원들은 새만금 계속 추진을 요구하였다.
1999년 5월 민관합동조사단의 활동이 시작되고 2년간 공사는 중단되었다. 70~80년대에 거세게 몰아붙였던 개발드라이브 정책은 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며 '개방화' '세계화'를 슬로건 아래 경제가 국제 시장 질서 속으로 재편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표면화 되면서 템포가 느려졌다. 이와 함께 국가주도 개발주의 사회를 이끌어가던 경제개발 5개년계획, 경제기획원, 규제 중심의 경제 정책이 폐지되고 관공서의 이름에서도 개발이란 단어가 빠져나갔다.
IMF 경제위기 극복을 책무로 여긴 김대중 정부로 들어서서 이러한 신자유주의는 정책 이념으로 자리잡았고 시장 경쟁의 논리를 중시하며 가혹한 구조조정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이념하의 개발주의를 '신개발주의'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경제우선주의를 표방한다는 점에서 종전의 국가주도의 개발과 본질적으로 차이점은 없다. 다만 국가의 직접적 의지와 관여로 이루어지는 개발에서 국가를 매개로 하면서 시장과 자본에 의해 추동되는 개발로 양태를 달리할 뿐이다.
새만금사업의 중단이냐 재개냐를 놓고 격렬한 논란이 일었지만 경제회복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경제제일주의에 근거한 판단은 결국 공사 재개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의 이면에는 정치적인 요인이 더 비중이 컸다.
전북 도지사를 비롯한 지방 관료들, 전북지역 정치인(국회의원, 도의원 등), 농림부 산하 농업기반공사, 건설업계, 전주상공회의소로 대표되는 지방토호 세력 등으로 분류되는 '토건세력'은 호도된 지역여론(표심)을 앞세워 집요하게 중앙정부를 압박하여 재개 결정을 내리게 한 것이다. 신개발주의의 단골 메뉴인 '환경친화적 개발'이란 말이 국민의 시야를 흐렸다.
'박정희 체제'임을 확인한 새만금 2심 판결
정부가 새만금사업 재개 결정을 내리자 지역주민과 환경단체는 2001년 8월, 새만금 간척사업의 취소를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와 함께 공사중지 가처분 신청도 제기하였다. 2003년 7월 서울행정법원은 가처분 신청 받아들여 공사 중단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러나 4월 총선을 4개월여 앞두고 서울고등법원은 2004년 1월 농림부가 제기한 가처분 취소 항고심에서 공사 재개 결정을 내렸다. 본안 판결에서 1심 재판부인 서울행정법원은 "농림부가 간척사업 수립당시와 달리 경제적 타당성을 기대할 수 없게 됐는데도 새만금 간척사업을 취소하거나 변경하지 않은 것은 위법하다"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리고 "새만금문제는 재판부가 아니라 정부와 국민이 해결할 문제"라며 새만금의 합리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위원회"구성을 주문하였다.
또한 위원회에서 합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방조제 공사를 중단할 것도 주문하는 내용의 조정권고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피고측인 농림부는 이를 따르지 않고 고등법원에 항소하였다.
12월 21일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2심 판결이 있었다. 1심 판결을 맡았던 부장판사는 불과 1개월여 전에 교체된 상태였다. 1만5천쪽에 달하는 방대한 자료를 3년여에 걸쳐 섭렵했던 1심 판결이었는데 비해 불과 1개월여 만에 2심 판결을 제대로 내릴지 우려하여 원고측에서는 판결을 늦춰달라고 요구했지만 묵살되었다.
2심에서 특별4부 구욱서 부장판사는 ▲ "수질문제는 아직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았"고 ▲ "갯벌을 메워 농지를 조성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판결했다. 특히 방조제 공사로 인해 바다와 갯벌이 죽어가고 있는 것에 대해 ▲ "간척사업으로 인한 환경변화는 당연한 것"이라며 새만금갯벌의 생태적 가치를 완전히 무시하며 1심 판결 내용을 뒤집는 판결을 내렸다.
환경을 고려치 않고 정치적 논리로 추진돼온 새만금사업에 대한 항소심의 판결은 박정희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서해갯벌 파괴사업을 지속하겠다는 결정이며 국민소득 2만달러를 운운하지만 아직도 박정희식 개발 독재체제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번 항소심 판결은 이를 확인해준 것에 불과하다.
원고측에서는 대법원에 상고할 것이라고 하지만 농업기반공사 측에서는 3월 중에 최종물막이공사를 강행할 것이라고 한다. 그 안에 대법원의 최종판결이 내려지기는 사실상 불가능해 오는 3월 26일경 조수 간만의 차가 가장 약한 조금을 기해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를 틀어막는 최종물막이공사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새만금간척사업을 추진하며 이득을 본 사람들은 흐루시쵸프나 브레즈네프처럼 곧 죽을 것이다. 그리나 자연의 앙갚음은 고스란히 우리 후손들이 받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허정균 기자는 부안새만금생명평화모임에서 활동중이며 이글은 buan21.com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