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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소월 시 문학상을 수상한 정일근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 <오른손잡이의 슬픔>(고요아침 펴냄)이 약 두 달 전 나왔다.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이후 2년만의 일이다.

▲ 정일근 시집-오른손잡이의 슬픔
ⓒ 고요아침
그는 1984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평균 2년에 한 번 꼴로 시집과 시선집, 산문집을 발간해 왔다. 필자는 우리 한국문단에서 정일근 시인만큼 문학하는 일(글쓰기)에 헌신과 열정을 다하는 사람을 아직 본 적이 없다.

그는 이른바 전업 시인이다. 8년 전 전신 마취의 큰 수술을 받는 아픔을 겪은 후 그는 번잡한 도회지 생활과 직업을 내던지고 산간(山間) 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그의 새 거처는 ‘은현시사(銀峴詩社)’라 불려지는 울주군 웅촌면 은현리 135-31번지이다. 그 즈음에 나온 시집이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 한다>(시와시학사, 2001)이다.

"죽음 직전의, 아픔의 우물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와서 정일근 형의 시는 이렇게 한세상을 얻어 깊어졌다. 바야흐로 무르익은 절정이다."(안도현)

안도현의 지적처럼 활달한 불교적 상상력과 깊은 서정을 뿜어내는 그 시집에 나는 당시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그리고 산간마을 은현리 자기 집에서 이른바 '마당으로 출근하여 자연의 말씀을 받아쓰기'한 시집이 그에게 소월 문학상을 안겨다 준 일곱 번째 시집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문학사상사, 2003)이다. 내게 시 쓰기의 교과서로 등재되어 있는 시집 가운데 한 권이다.

정일근의 새 시집 <오른손잡이의 슬픔>은 앞서 언급한 시집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와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에서 보여준 짙은 서정성의 세계와는 좀 차별성을 띤다. 이번 시집에서는 현실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의 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오른손잡이도 왼손잡이도 슬픈 사람인 것이다/손은 둘이 하나다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두 손을 모아야 기도가 되듯이'(<오른손잡이의 슬픔>)에서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듯 하나가 되지 못하고 편 가르며 나누고 구분 짓는, 길을 끊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분단의 철조망을 용서하는 것이
신의 고독한 일이라면
아아, 룡천의 눈물 피눈물
따뜻한 손을 내밀어
더욱 따뜻하게 닦아주는 것은
사람의 뜨거운 일이다, 이제
팔짱 끼고 있는 손을 풀어라
주머니 속에 숨긴 손을 꺼내어라
머뭇거리지 말고 손을 내밀어라

- '손을 내밀어라' 부분


인용한 시 '손을 내밀어라'외 '울란바토르 행 버스를 기다리며' '자연법' '장생포에서 청진까지' 등의 작품이 조국(민족) 분단의 현실과 아픔, 통일을 염원하는 작품이다. 그에 반해 '쌀'과 '서울' 연작시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아름다운 사랑의 참된 만남이 되지 못하고 서로 상처만 안겨다주는 우리들 삶의 처세를 풍자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시집 맨 뒤편에 실린 장시 '그 눈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죽음에서 생명을 길어 올리는, 정일근 시인이 시로 추는 한바탕 생명 춤판이다. 울산 앞 바다 짐승의 눈을 닮았다고 목도(目島)라고 불려지는 아름다운 섬이 울산 공단의 공해로 죽음의 지경에 이르렀다가 다시 생명의 붉은 등을 피워 올리는 것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시인의 말대로 '시는 몸으로 쓰는 글씨' 같은 것인가. 정일근 시인이 몸으로 쓴 글씨(시) 한 묶음을 다 읽으면서 필자가 가장 감동적으로 읽은 시편은 '마지막 항해' '엠마오 가는 길' '냄비우동'이다. 세 편 모두 정일근 시인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노래다.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김성식 시인과 박희섭 시인을 그리워하는 정일근 시인의 젖은 눈빛이 흥건하게 젖어 있는 시, 이렇다.

꿈에 그를 만났다 반가워 껴안고서 펑펑 우는데
그를 안고 울면서도 그가 보고 싶다 말했다
죽어 부활한 예수와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일처럼
나는 그를 만나고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보고 싶다 말했다
그는 여전히 캡틴 모자 쓰고
가방 가득히 희망봉 바다 담고 돌아왔는데
나는 엠마오 가는 길 위의 제자처럼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의 바다가 어디인지 물어보지 못하고
그의 배가 무엇인지 물어보지 못하고
언제 다시 떠나고 언제 다시 돌아오는지
손을 잡고 세세히 물어보지 못하고
눈물 젖은 꿈을 깨고서야
꿈에 그를 만난 것을 알았다
나에게 바다를 선물한 그 사람
나에게 바다가 무엇인지 가르친 그 사람
나에게 바다로 가는 길을 일러준 그 사람
지금은 홀로 엠마오로 항해하는
선장 김성식, 시인 김성식

- '엠마오 가는 길' 전문


그렇다. 정일근 시인, 그는 역시 서정 시인이다. 가난하지만 '아 모도들 따사로히' 함께 사는 것을 그리워하고, 그런 마을을 언어로 그림 그리는 일을 잠시도 손놓지 않는 사람.

오른손잡이의 슬픔

정일근 지음, 고요아침(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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