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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4 장 위기중첩(危機重疊)

아주 짧은 순간순간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그의 몸은 세찬 물살에 휩쓸려 좁은 동혈을 타고 아래로 내리 꽂히고 있었다. 동혈 벽에 부닥치면서 여기저기 심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인간의 힘이란 얼마나 나약한 것일까?

이윽고 어딘가로 떨어진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려 애썼지만 눈을 뜰 수 없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몸이 물에 반쯤 잠겨있는 듯 했지만 숨은 쉴 수 있다는 점이었다. 얼마나 많은 물을 먹었는지 알 수 없었다. 온 몸이 늘어지고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진기 한 올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백형은… 어디…?)

사고가 마비되었는지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는 혼절한 것과 마찬가지 상태였다. 잠시 정신이 들었다 금방 깜빡 잠이 든 것 같았고 다시 정신이 들기를 반복했다. 살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과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다.

“이번에는 두 놈이로군.”

어디선가 굵고 거친 음성의 사내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의 귀로는 물이 흐르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말이 들렸다가 끊어지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일들을 어떻게 처리하기에 외부인들을 여기까지 들어오게 하는지 모르겠군.”

불만이 섞인 카랑카랑한 다른 사내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는 이런 일들이 매우 귀찮다는 기색이 담겨있었다.

“불만 갖지 말게. 이제 시작인 모양이네.”

“우리까지 움직일 때가 되었단 말인가?”

“내가 자세한 내용까지 어찌 알겠는가마는 그런 것 같으이…. 열흘 전 칠로단(七路團) 단주(團主)들이 모두 모였다가 사흘 전에 모두 나갔네. 오존(五尊)께서는 물론 우리 금룡기(金龍旗)를 제외한 사행기(四行旗) 전부가 모두 그제 저녁 출동(出洞)했다네.”

“그래서 이곳이 텅 빈 것처럼 보였군.”

“어쩌면 우리야 이곳에 남을지 모르지. 이곳을 지켜야 할 인원이 필요할 테니까 말이야. 하여간 일단 이 놈들이나 손봐서 유항소저에게 인계해 주자구.”

“이 자식은 숨넘어가기 직전인 것 같군. 심하게 부상을 당한데다가 물을 하도 처먹어 정신 차리려면 사나흘 족히 걸리겠어.”

이삼 장 정도까지 가까이 다가 온 사내의 목소리였다. 아마 근처에 자신과 함께 물에 휩쓸려 온 백결을 보고 하는 말 같았다.

“오히려 잘된 일이지. 물이나 토하게 해봐.”

꾸륵… 끄르륵….

어떻게 했는지 물이 토해지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순간 의식을 놓치는 가운데 담천의는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이들의 대화로 미루어보아 남궁산산이나 다른 무림인들도 자신과 똑같은 처지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더구나 유항이란 이름을 거론하는 것을 보니 백련교도들과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헌데 백련교의 십대제자 중 넷째인 유항을 알면서 어찌 백결은 모르고 있는 것일까? 이상한 일이었다. 허나 그 생각보다는 가물가물해지는 정신을 붙잡는 것은 우선이었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진기를 끌어 올리려했다. 너무나 지쳐있어 체내에 진기가 단 한 줌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이것은 내상을 입은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기력이 완전히 고갈되어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그런 상태였다. 정신을 놓치지 않고 가물가물 유지하고 있는 자체만으로도 사실 초인적인 정신력 덕택이었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일이 아니었다.

저들의 정체가 무엇이던 간에 천마곡에 있는 백련교와 연관이 있는 자들이고, 저들에게 붙잡혀간다면 그 결과가 어찌될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자신이 허락했던 아니던 간에 자신의 신분은 제마척사맹의 맹주다. 더구나 그들과는 한 하늘 아래 같이 공존할 수 없는 초혼령주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는 사부로부터 배운 세 가지 무공 중 현심경(玄心經)의 심법을 떠올렸다. 도가(道家) 계열의 내가심공(內家心功)으로 생각되었지만 선천지기(先天之氣)를 유지하고 배양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내공심법이었다.

사부는 현심경이 극에 달하면 호풍환우(呼風喚雨)할 수 있고, 자연의 이치를 깨달아 귀신들까지 부릴 수 있다고 했지만 법술(法術)을 익혀 신선이 되려는 도사(道師)들이나 익히는 것이라 치부했던 심공이었다. 복수를 하고자 하는 그에게는 천중무극결로 알고 있었던 만검을 익히는 것이 우선이었고 현심경의 심법은 그저 내공을 쌓는 심공이었을 뿐이었다.

“당분간 깨어나지 못하겠지만 수혈을 짚어 놓게.”

어느 정도 물을 토해내게 만든 모양이었다. 말을 한 사내가 담천의에게 다가오는 듯 했다. 철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손에 물결이 느껴졌다. 그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미약하나마 단전에서 가까스로 한줄기 진기가 생성되어 가슴을 타고 돌기 시작했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단 한번의 기회….)

만약 자신에게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것으로 끝내야 했다. 만약 실패한다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죽는 것은 자신일 것이었다. 생사가 달리고, 다급해지자 우선 진기를 도인(導引)하면서 감각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꾸…륵… 꾸르륵….”

배에 묵직한 기운이 느껴지며 입으로 물이 토해졌다. 다가 온 사내가 발로 담천의의 배를 짓누르고 있었다. 기도가 막히면서 기침이 나올 것 같았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자신이 깨어난 것을 알면 점혈을 하든지 제압하려 할 것이다.

“이 자는 내상까지 입은 모양이군.”

아마 혀끝을 깨물어 입안에 고였던 핏물이 물에 섞여 나오자 내상을 입은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다행스런 일이었다. 상대가 오판하면 할수록 좋은 기회가 올 터였다. 하지만 다른 한 사내까지 다가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왼쪽 허벅지에 깔려있는 만검의 느낌이 전해왔다. 물살에 휘말리면서도 왼쪽 허리에 차고 있는 만검이 떨어져 나가지 않고 그대로 매달려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기혈이 막힌 것도 같은데….”

물을 토하며 기침을 필사적으로 참게 되자 얼굴이 붉게 달아 오른 것을 본 모양이었다. 얼굴색이 변한다는 것은 기혈이 순조롭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한줄기 진기는 머리를 지나 다시 척추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척추를 타고 돌아 온 진기가 단전으로 스며들어 흩어진 진기를 유발시켜 다시 흘러나와 전신의 대맥(大脈)을 타고 흐른 뒤 단전으로 되돌아와야 겨우 한번의 기회를 제대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대충 하고 올려 보네세. 숨만 제대로 쉬면 되지.”

나머지 한 사내마저 다가온 모양이었다. 담천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조금만 시간이 주어진다면 어찌해 볼 터인데 더 이상 시간을 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담천의의 배에 올려진 사내의 발이 힘껏 내리 눌렀다. 마지막으로 물을 토해내게 할 생각인 것 같았다.

“우억--- 컥----!”

더 이상 기침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물을 토해내면서 기침을 하는 것과 동시에 눈을 떴다. 그 순간 그는 상체가 튕기듯 일으키며 왼손으로 만검을 뽑아 나중에 다가왔던 사내의 가랑이부터 위로 그었다. 동시에 자신의 배를 발로 밟고 있다가 자신이 상체를 일으키는 바람에 기우뚱했던 사내의 목줄기를 노렸다. 왼손으로 검을 거꾸로 들고 있는 역검(逆劍)의 자세였지만 바로 잡을 시간도, 오른손으로 옮겨 잡을 시간도 없었다.

“헉…!”

다행히 그가 원하는 결과가 이루어졌다. 두 사내의 입에서 신음성이 터져 나왔지만 그것은 시간적으로 차이가 없이 한 사람의 신음성으로 들렸다. 복부가 그어진 사내의 배에서 내장이 흘러내리며 꼬꾸라졌고, 담천의의 배를 발로 누르고 있던 사내는 눈이 부릅떠진 채 뒤로 넘어갔다.

철퍼덕----!

발목이 잠길 만큼의 물로 넘어가자 물이 튀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 순간 담천의의 입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우 왝----!”

무리였다. 진기가 고갈되어 제대로 유통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육지책으로 진기를 격발시킨 것이 심각한 내상을 입게 한 것이다.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은 고통과 함께 눈앞이 캄캄해왔다. 기혈이 역류되고 바늘로 내부를 찌르는 듯한 고통이 이어지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져들 가능성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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