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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폐(僞幣) 문제로 인해 북핵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이 표류 중이다. 미국이 벌이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참여정부 외교안보팀의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전략적 판단의 결여가 근본원인 중 하나이다.

미측의 태도 변화가 없는 한, 제재는 여전히 제재일 뿐

먼저 주목할 점은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에 대한 미 재무부의 조치가 '제재' (sanctions)가 아니라 '순수 법집행 차원에서 취한 방어적 조치'라고 설명하는 미국의 태도 변화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억지스러운지는 며칠 전의 신문만 뒤적여봐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지난 6일 국무부 출입기자단 조찬 연설에서 한 발언이다(괄호안은 원문).

"북한의 불법 행동들에 대한 우리의 제재는 부시 대통령이 그런 행동을 수수방관하지 않기로 해 취해진 것이다." (Their illegal activities have drawn sanctions from us because the President is not going to let North Korea count American money without action.)

같은 날 라이스 장관은 '북한은 매우 위험스런 정권'이며 이러한 제재 조치가 '부시 미 대통령의 지시'임을 명확히 했다. 이미 미국은 북한산 '슈퍼노트'(100달러짜리 위폐)를 유통시킨 혐의로 지난해 체포된 북아일랜드 노동당 당수 숀 갈랜드에 대한 고소장에서 "100달러짜리 정교한 위조지폐가 정부의 지시에 따라 북한에서 만들어져 전세계로 운반됐다"며 북한의 혐의를 직접적으로 명시하기까지 한 바 있다.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도 얼마 전까지 북한정권을 '마약 밀매와 돈 세탁 등 불법행위를 일삼는 범죄정권'이라고 규정했다. 이 발언은 여러 기대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철회된 바 없다.

단순한 용어선택의 차이가 북한의 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의 정치적 배려임을 인정하더라도 미국의 북한에 대한 근본적 태도 변화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개인 차원의 범죄'로 절충하더라도 위기는 여전하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6자회담 당사자국들 사이에 '위폐제조 및 유통'이 '정권 차원'이 아닌 '개인차원'의 범죄로 규정하는 절충안이 거론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나름대로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 외교 당국자들의 희망사항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 또한 미국의 근본적인 전략변화, 북한에 대한 태도 변화가 전제되지 않는 한 결코 쉽지 않을 것 같다.

첫째, 미 정부의 대외적 신뢰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 '국가 차원의 범죄'라고 수차례 공언하고 거기에 따라 제재 절차를 진행 중인데 이제 와서 '개인 책임'으로 돌리기에는 지나친 무리가 따른다.

대량살상무기를 핑계로 이라크전을 감행했다가 결국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해 거짓말을 한 선례를 되풀이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크다.

둘째, 외교 당국자들의 희망사항대로 북한과 미국이 '개인 책임'이라는 절충안을 수용한다고 하자.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논란의 시작이다.

먼저 미국은 범죄행위를 저지른 범인들의 신병인도를 요구할 것이다. 다음으로 위폐를 찍어낸 인쇄판과 잉크, 장소 등에 대해 미국은 증거를 직접 확인하고, 재발방지 약속과 국제기구 가입 등의 이행을 촉구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미국의 '네오콘'들이 이런 상황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북한 또한 자존심을 꺾고 미국의 간섭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북한 정권이 어떻게 신병인도 요구와 사실상의 사찰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어느 누구보다도 강경한 미 의회조사국 래리 닉쉬 박사도 같은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나아가 닉쉬 박사는 금융제재에서 벗어나기 위한 절차도 6자 회담에서 볼 수 있었던 힘겨루기로 시간을 허비하거나, 오히려 강경파에서 유리한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최근 거론되는 일종의 절충안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 한계이다. 미국과 북한간의 신뢰회복이 전제되지 않는 이상, 단계마다 위험 요소는 잠복해 있다.

북핵문제 해결되면 모든 북·미 갈등 해소된다는 전략적 판단오류가 위기 원인

주한 미대사관은 24일 보도자료를 통해 "대니얼 글래이서 미 재무부 테러자금 및 금융범죄 담당 부차관보는 방한 기간중 대량살상무기(WMD) 확산 대응체재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한국이 WMD 확산 주범과 그들을 돕는 지원망을 재정적으로 고립시키는 데 더욱 힘을 써달라고 요청했음"을 확인했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요청이다. 새삼스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

미국의 반테러 전략에는 네가지 정책 원칙이 있다. 그 중 세번째는 '테러지원 국가들의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해 그들을 고립시키고 압력을 가한다'이기 때문이다.(미 국무부, 참조).

동 보고서는 미국이 대통령 명령과 외국테러단체(FTO) 지명 등을 통해 테러자금 조달을 차단시키고 다른 국가들도 이와 같은 일을 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2004년 한해만 하더라도 397건에 달하는 FTO 지명이 있을 정도이다.

미국은 이미 6자회담팀뿐만 아니라 제이 레프코위츠의 북한인권특사팀, WMD 자체에 대한 통제를 담당하는 핵 비확산팀은 물론, WMD 개념을 확장시켜 이를 바탕으로 한 PSI(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를 근거로 북한의 위폐를 장기간 추적해온 미 재무부의 금융범죄조사팀 등을 동원해 북한에 대해 거의 융단폭격 수준으로 여러 정책을 가동시켜 왔다.

즉, 미 정부는 북한 문제를 북핵 문제 하나로만 바라본 것이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제기하고 관리해온 것이다. 반면 한국 정부는 북·미 갈등은 곧 북핵 개발이고 이는 6자회담만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단선적 해법만을 고집해온 잘못이 있다.

부시 1기 행정부에서 북한의 불법행동방지대책을 전담했던 데이비드 애셔 전(前) 국무부 북한실무그룹팀장도 "미국은 그간 북한은 물론 한국에도 북한 위폐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왔으나 북한은 부인하고 한국은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테러리즘을 척결하기 위한 반테러리즘 정책을 '북한에도' 적용해온 이상 이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미국의 대 테러전쟁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비극이었다.

PSI 참여, 미국과 공동발표 해놓고 국내에선 아니라고 국민 속이고 있다

2006년 이후 4년간 미 국방전략이 담긴 QDR(4개년 국방전략 보고서)이 곧 발표될 예정이다. 미 언론들이 입수해 공개한 QDR 초안에 따르면 테러와의 전쟁을 '장기전'으로 규정하면서 '국제 테러리즘 분쇄와 테러로부터 미국 보호, 대량살상무기 확산 차단' 등을 우선시 할 것이라고 한다.

결론적으로 6자회담은 여전히 표류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북핵 문제 해결이 곧 모든 북한 모순을 해결해줄 수 있다고 믿는 단순함 때문이다. 여기에서 엄중히 되물어야 한다.

PSI와 관련, 어제 외교부가 보도자료나 반기문 장관 브리핑을 통해 PSI 정식 참여가 아니라고 얘기하는 것은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이다. 1월 19일 제1차 한·미 장관급 전략대화 공동 선언문을 보면 이렇게 돼있다.

"테러와의 전쟁에 있어서의 협력강화 및 대량살상무기와 그 운반수단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국제 안보협력체제의 준수와 이행을 위한 공동노력을 경주(Strengthened cooperation on fighting terrorism, and exerting common efforts for the observance and implementation of international security cooperation regimes for the prevention of the proliferation of Weapons of Mass Destruction and their delivery means)"
▲ 최재천 의원

이렇게 미국과 공동 발표를 해놓고 국내에서는 아니라고 국민을 속이고 있다. 미국이 이에 대해 항의라도 할 경우, 정부는 무엇이라고 해명할 것인가. 이것이야 말로 한국외교의 수치다.

참여정부 대미·대북 외교를 '기획'하고 '조정'해온 NSC의 석명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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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김대중평화센터 고문으로, 연세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이화여대, 영남대, 전남대 로스쿨 및 광운대 겸임교수로 재직중입니다. 홈페이지는 www.e-sotong.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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