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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이사를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구석에 꽁꽁 숨겨진 진귀한 물건들을 꽤 발견한다. 지난번 기사에서 소개된 60년 된 어머니의 혼수저고리가 신혼 시절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라면, 이번에 소개할 '어머니가 차곡차곡 모아둔 아버지의 월급봉투'는 선친에 대한 추억이다.
아버지의 월급봉투에 담긴 끈끈한 추억
누런 갱지로 만들어진, 오래 전 부친의 두툼한 월급봉투 뭉치를 보니 깨알같이 손으로 일일이 적어놓은 급여 명세 내역이 낯설었다. 또한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공제한 금액이 300원이라는 사실이나, 봉투에 인쇄된 '매월 25일은 저축의 날' 내지는 '쓰고 나서 후회 말고 쓰기 전에 절약하자'라는 매우 직설적인 표어문구가 매우 흥미로웠다.
마치 외계에서 온 물건을 바라보듯 아버지의 급여봉투를 한참 보고 있자니 점점 예전 어렸을 적 기억이 떠올랐다. 누가 훔쳐갈세라 꼭꼭 숨겨놓았던 월급봉투를 양복 안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꺼내 어머니에게 건네주시던 월급날 아버지의 낯익은 모습이 조각조각 이어졌다. 되살아난 기억 속에서 본 아버지의 월급봉투는 지금과는 달리 너무나 친숙하고 정겨운 모습이었다.
급여봉투는 비록 투박하지만 거기엔 한 달 한 달 최선을 다해 열심히 생활했던 아버지의 땀방울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그 땀방울의 의미를 어머니도 잘 알고 계신 것일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4년이 되어가건만 아직까지도 당신의 명주저고리보다 오히려 좋은 상태로 보관된 급여봉투를 본 순간, 아버지의 땀방울과 그 땀방울의 소중함을 고이 간직해 놓은 어머니의 애틋한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아버지의 투박한 급여봉투는 요즘 월급날이 되면 책상 위에 달랑 던져진 급여명세서 한 장을 보는 둥 마는 둥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했던, 그동안의 내 건방진 행동을 되돌아보고 반성하게 만들었다.
만 원짜리 현금을 인출해서 월급봉투에 담던 선배
그렇지만 내가 건방지게 된 원인을 따져보면 직장인에게서 월급날의 행복을 빼앗아간 '디지털'이란 괴물이 있다. 급여명세야 언제든지 사내 전산시스템에 접속해서 확인해 보면 과거의 급여명세까지 언제나 알 수 있다. 돈이야 어차피 통장으로 자동입급되는 데다가 통장 또한 인터넷이나 전화로 입금내역을 확인하면 될 테니 월급날 배분되는 한 장의 급여명세서는 이미 효용가치를 상실한 지 오래 되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디지털은 편리라는 미명 하에 우리 생활 속에 들어와, 평범한 샐러리맨들의 월급날 추억을 야금야금 빼앗아 간 지 오래다. 우리는 어느덧 그러한 시스템에 잘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자연스럽게 적응되어 버렸다.
물론 어디에서나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는 괴짜들은 있기 마련이다. 대표적인 예가 월급날만 되면 급여명세서가 마음에 안 든다며, 자동 입금된 급여를 굳이 만 원짜리 현금으로 전액 인출해서 빈 봉투에 두툼하게 담아 집으로 가져가던 선배였다.
"이렇게 월급봉투에 돈을 두둑하게 채워 넣어야 마누라가 월급의 고마움을 알지. 아껴 쓰라고 큰소리치며 월급을 건네줄 수도 있고 말이지. 월급날이 되면 아내가 맛있는 음식 해놓고 고생했다고 무릎 끓고 인사하고 월급봉투를 받는 기분을 어찌 알리요."
당시만 해도 가장이라는 미명하에, 모든 살림을 책임지는 아내에게 마치 아랫사람에게 용돈을 주는 식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선배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흰 봉투에 만 원짜리를 수고스럽게 두툼하게 담는 심리의 바탕에는 누가 뭐래도 본인 스스로 월급날 행복을 억지로라도 만끽하겠다는 고집스러운 몸부림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그 선배는 여전히 월급날 만 원짜리로 꽉 채운 가짜 월급봉투를 억지로 만들고 있을까?
세상이 디지털화 될수록 점점 인간의 상상 속으로 내 몰리는 월급봉투의 존재. 만약 전산 출력된 급여명세서를 지금이라도 차곡차곡 모아두고 세월을 보내면 과연 아버지의 오래 된 월급봉투처럼 그 속에서 인간의 땀방울과 생활의 흔적을 느낄 수 있을까?
불행히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급여액수를 단순한 숫자로만 인식하여 전산 출력된 급여명세서 한 장은 인간의 정성보다는 오로지 편리와 정확성에 더 관심이 있을 테니까 말이다.
결국 시간이 흘러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 과연 아버지의 월급봉투처럼 지리하고도 긴 내 직장생활의 흔적이 남아 주기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느낀 순간 아버지의 월급봉투 뭉치와 아버지가 한없이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직장생활 자취가 남아 있는 오래된 월급봉투, 디지털 시대에는 가질 수조차 없는 것이기에 더더욱 이 봉투가 사랑스럽고 소중한지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아날로그형 인간의 디지털 분투기 57번째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