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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6 장 수안상수(手眼相隨)
세우(細雨)가 내리고 있었다. 비는 그저 맞아도 참을만한 정도였지만 바람이 산등성이를 타고 세차게 불어오자 가는 빗방울은 얼굴이 따갑게 느껴질 정도로 흩날려왔다. 거추장스럽지 않게 피풍의를 꽉 죄어 입은 상태에서도 심하게 옷자락이 파닥거리고 있었다.
그의 뒤로 좌우산인과 도천수 혁련기, 그리고 오독공자 남화우뿐 아니라 묵연칠수의 모습도 보였는데, 남화우의 모습은 어느 정도 부상에서 회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시선은 한결같이 강명의 전면에 부복하고 있는 한 사내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삼십대 후반의 초부(樵夫)와 같은 평범한 모습이었다. 머리를 묶지 않아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가 바람에 심하게 날리고 있었는데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사부님께서 아직 천마곡에 계신다…?"
강명은 나직하게 뇌까렸다. 그의 손에 들린 서찰의 글씨는 분명 사부의 필체였다. 그것으로 인해 강명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무슨 뜻일까? 사부는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이 자를 통해 서신을 보내신 것일까? 이 자가 자신에게 직접 오게 되었음은 이 일이 매우 중대하고 심각한 일임을 의미하고 있었다.
천마곡 내에서 보잘것없는 화부(火夫)나 하는 이 자는 사부가 진정으로 믿고 있는 세 명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간간이 사부의 가르침도 받은 자였다. 자신과 사형제 간이라 할 수는 없어도 그는 충심으로 사부를 모시는 자였다.
"항인과 종륜이 사부님 곁에 있던가?"
강명은 천마곡 입구에서 유항과 대화를 나눈 뒤 이곳 철혈보를 공격하러 오면서 항인과 종륜에게 사부님을 찾아보라고 천마곡에 남겨두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일행과 갑자기 헤어진 사부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본 적이 없습니다. 노야께서는 무슨 일인지 아무도 만나지 않으시고 은밀하게 움직이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소인 역시 최근에 겨우 두 번을 뵈었을 뿐입니다."
사내는 여전히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연락이 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항인과 종륜이 사부를 찾지 못했을 것이라 짐작은 하고 있었다. 허나 그들에게 아무런 연락이 없는 것도 이상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사부가 보내온 전갈도 도무지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철혈보를 공격하지 말라니…? 사부의 측근을, 사부가 유일하게 친구라고 생각했던 금존불까지 죽인 자들이 철혈보였다. 헌데 사부는 무슨 생각으로 철혈보를 절대 공격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지금 천마곡 내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우교에 대한 정보를 주고 천마곡을 떠나라 할 때 했던 운령의 말이었다. 당새아까지 물리치고 슬픈 눈으로 전하던 그 말.
- 시간이 없어요. 슬픈 일이지만 우리 사형제 중에 다른 마음을 가지고 우리를 이용하는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분은 대사형과 사형, 그리고 섭장천 어른이에요.
- 저는 그 자가 누군지 반드시 알아낼 거예요. 그리고 알아낸다면 사형께 제일 먼저 알릴 거예요.
- 사형은 이제 우리 사형제의 마지막 희망이에요.
사부가 굳이 몸을 숨기고 천마곡에 남은 것은 그 일 때문이었던가? 의혹이 꼬리를 물었다. 도대체 어떤 작자가 형제의 정까지 버리고 그런 짓을 한다는 말인가? 더구나 아직까지 운령으로부터 연락을 받지 못했다.
(누구든… 그 개만도 못한 작자가 누구든 반드시 심장에 검을 꽂아주마.)
강명은 머리를 흔들며 사내로부터 시선을 돌려 멀리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철혈보를 바라보았다.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평상시였다면 힘든 승부가 되었겠지만 주력이 빠져나간 철혈보는 지금 자신이 가진 전력으로 충분히 상대할 만 했다. 묵연칠수(墨煙七首)와 비마대(飛馬隊) 오십 명은 정예 중의 정예였다.
(돌아가야겠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한다.)
누가 자신과 백련교를 이용하고 음모를 꾸미는 것일까? 그는 이미 비에 축축이 젖은 한지를 다시 펼쳐보았다. 글씨는 빗물에 번져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해버렸지만 휘갈긴 그 글씨는 다급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천마곡으로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더라도 한 가지 일은 해결해야지."
강명이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도천수 혁련기와 남화우를 향했다.
"어떤 분부가 계시온지…?"
도천수 혁련기가 가볍게 포권을 했다. 두 사람에게 시킬 일이 있음을 짐작한 것이다.
"지금 철혈보로 가 육능풍을 만나시오. 그리고 정중하게 운학을 돌려달라고 하시오."
"그런다고 그들이…."
남화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단지 두 사람이 가 돌려달란다고 그들이 돌려줄까? 하지만 강명의 얼굴에 서린 굳은 의지를 보는 순간 그는 말을 채 마치지 못했다. 강명은 안 되는 일을 수하에게 고집스럽게 시킬 사람이 아니다. 안 되는 일이라면 수하를 시키기보다 자신이 직접 나서는 인물이다.
강명이 다시 몸을 돌려 철혈보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우리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돌려주겠지. 돌려주지 않겠다면 그대로 돌아오도록…."
"분부 거행하겠소."
도천수 혁련기가 허리를 꺾었다. 아마 그들이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바로 저 거대한 위용의 철혈보가 사라지는 순간이 될 것이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더라도 자신이 모시는 강명이라는 사내는 절대 사형제를 두고 갈 사람이 아니었다.
도천수와 남화우가 복명을 하는 것과 동시에 앞으로 달려 나갔다. 강명의 명은 특별한 부언이 없는 한 즉시 움직이는 게 보통이었다. 뻔히 내려다보이는 철혈보이지만 경신술을 발휘해도 향 한 자루가 탈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그들이 장내를 떠나는 것을 보더니 강명의 시선이 다시 자신의 앞에 부복하고 있던 사내에게로 돌려졌다.
"자네가 지금 천마곡으로 돌아갈 생각이라면 나와 동행하도록 하지."
그저 잠시 기다려 달라는 의미였다. 사내는 사부에게 매우 필요한 사람이었고, 현재로서는 사부를 만날 수 있는 끈을 가진 인물이었다. 허나 사내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는 여전히 강명의 발끝을 주시한 채 말했다.
"아닙니다. 소인은 노야께서 시키신 한 가지 일이 더 있습니다."
사부는 자신의 일 말고 이 자에게 무슨 지시를 내리신 것일까? 굳이 알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부가 지시한 일이라면 알고 싶었다. 그것은 지금 천마곡에서 벌어지는 일과 관련이 있을 터였다.
"무슨 일인지 알아도 되겠나?"
"소인은 지금 곧 잔결방(殘缺邦)으로 가봐야 합니다."
잔결방은 백련교의 전대인물들이 있는 곳. 이미 불구가 되어 은퇴했다고는 하나 아직 백련교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곳이 잔결방이었다. 사내는 잠시 말을 끊고 머뭇거리더니 곧 말을 이었다.
"가서 신주귀안(神珠鬼眼) 어르신께 말씀드리라 하셨습니다. 절대 움직이지 말고 내부단속에 힘쓰시라고…."
아마 머뭇거린 것은 강명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섭장천은 자신에게 분부를 내리면서 강명 이외에는 절대 믿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강명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꽤 있느니만큼 꺼려했던 것이다.
"그렇군. 내가 괜한 것을 물은 것 같으이…."
강명은 의심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특히 자신의 수하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사내의 머뭇거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차 모를 강명이 아니었다.
"가는 길에 조심하게. 자네 정도의 실력이라면 자네 앞을 막을 자도 별반 없겠지만…."
"그럼 이만… 몸 보중하시길…."
사내는 이마를 땅에 대면서 정중히 절을 올렸다. 사내에게 있어 섭장천과 강명은 진정한 자신의 주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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