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수안상수(手眼相隨) 수지안도(手至眼到)의 경지였다. 손과 눈이 서로 따르고, 손이 이르면 눈이 이른다는 몸과 마음이 합일된 경지. 심안(心眼)에 눈뜨기 시작한 것이었고, 이번 위기에서 무의식중에 얻은 깨달음이었다. 광무선사가 준 화두의 심공(心空)이나, 태극산수의 형과 격을 벗어난 운용, 만검의 중중무진(重重無盡)과 마찬가지로 현심경의 무시무종(無始無終)은 서로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심안이 뜨이면서 어느 무공 하나만이 아닌 다른 것 역시 새로운 경지의 깨달음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 자신은 의식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가 익힌 만검이나 태극산수 역시 전에 비해 새로운 경지에 오르게 된 것이다.

파파파---팍---!

상엽은 재차 맹렬하게 양발을 사용해 공격해 왔다. 그것은 마치 물러날 공간도 없이 벽에 기대어 있는 사람을 무차별로 패는 것 같은 형상이었지만 담천의는 여전히 가부좌를 풀지 않았다. 다만 처음으로 자신의 무릎 위에 놓여져 있던 손을 들어 슬쩍 밀어내는 듯했다. 그것은 피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뒤에 있는 백결을 보호하려는 움직임이었다.

파팍---!

담천의의 부드러운 손길에 방향을 잃은 상엽의 발이 미끄러져 나가면서 옆 벽을 차자 바위로 보이는 벽이 쇠뭉치에 맞은 듯 움푹 파이며 돌조각이 가루로 변해 우수수 부서져 내렸다. 막강한 공력이 실려 있는 발이어서 정통으로 맞는다면 머리통이 으깨져 버릴 터였다.

담천의의 쌍수가 가볍게 허공을 그으며 연속되는 상엽의 발차기를 막는 듯 싶었다. 그의 손놀림으로 보아 태극산수를 펼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잡아채고, 미는 것이 현묘해 상엽의 공격은 마치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을 휘젓고 있는 것 같았다.

스으---

상엽은 기회를 노리다 담천의의 겨드랑이를 노리며 필살의 공격을 가했다. 더 이상 뒤로 물러날 수 없는 담천의로서는 막지 않으면 피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공격이었는데 막는다면 아마 충격이 클 터였다. 허나 담천의가 슬쩍 상체를 비틀며 오른팔로 원을 그리며 비껴 돌리자 공격하던 상엽의 몸이 밖으로 튕겨 나가며 빙그르 몇 바퀴를 돌았다.

"헛…!"

헛바람을 뱉으며 몸의 중심마저도 흐트러져 비틀거렸다. 무인으로서 자신의 몸 중심을 잡지 못했다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었다. 더구나 담천의가 공격한 것도 아니어서 제풀에 그런 흉한 꼴을 보인 셈이었다.

상엽의 얼굴에 수치스러운 기색과 함께 한줄기 두려움이 떠올랐다. 상대는 자신의 힘을 이용해 자신을 공격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어떻게 한 것일까? 점점 자신이 상대하기 어려운 고수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일순 그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검을 뽑아들며 폭갈을 터트렸다.

"네놈이 무인이라면 쥐새끼처럼 구석에 박혀있지 말고 썩 나서라."

그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는데 이를 악문 그의 모습은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담천의가 미소를 베어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담천의는 가부좌를 풀었다. 태극산수의 현묘한 공부가 한층 더 깊어진 느낌이었고 이상하게도 몸은 지쳐있지만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는 이곳이 답답해 일어나려던 참이었소."

그는 웬일인지 허리에서 만검을 풀러 백결에게 주었다. 자신이 더 이상 돌보지 못하는 가운데 검을 잃어버린 백결이 혹시나 누군가 기습을 해온다면 상대하라는 배려였다.

"자네…?"

"괜찮소. 사실 나는 지금 검을 휘두를 만큼 완전치 못하오."

나직한 말이었지만 상엽과 그 형제들은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자신의 약점을 적이 있는 앞에서 말하는 것을 보니 아무리 무공이 높다 해도 풋내기였다. 하지만 천천히 걸어 나오는 담천의는 더욱 더 이해하지 못할 말을 던졌다.

"이왕이면 한꺼번에 덤비시오. 어차피 누군가 불리해지면 합공할 것 아니었소?"

광망스럽기는 했지만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상엽 역시 얼굴이 잠시 붉어졌지만 이미 상대해 본 그로서는 자신 혼자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더구나 그들 형제는 개개인이 절정고수이기도 하지만 철저하게 초범입성의 고수를 상대하기 위해 연수합격을 익혀왔던 터였다. 둘째가 없어 완전치는 않겠지만 남은 삼형제의 합공을 버틸 수 있는 인물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관을 보아야 후회할 자로군. 젊다는 것은 확실히 무모한 만용을 부리게 하는 독소지."

상엽의 두 형제 역시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것을 본 담천의가 피식 웃으며 금색 면구를 쓰고 있는 인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도 거들지 않겠소? 어차피 같은 패거리 아니오?"

그 말은 금색 면구의 사내를 자극하는 말이었다. 본래 같이 합공할 생각이 아니라 기회를 보아 백결을 공격하려 한 것인데 그것을 우려한 담천의가 충동질한 셈이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은 백결을 따로 공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고, 또 한 가지는 그가 같이 합공하게 함으로서 상엽 형제들의 연수합격을 더욱 불완전하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본래 연수합격이란 마음이 통해야 하고 오랜 기간 동안 손발을 맞춰야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정말 미친놈이로군."

순간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발검(拔劍)과 동시에 신형이 흐릿해지며 담천의를 향해 쏘아왔다. 그의 움직임은 놀랄 만큼 빨라 이장이 되는 거리가 마치 바로 앞에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그의 검날은 송진가루를 발라 구웠는지 빛을 발하지 않아 그저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세 줄기 검기가 일순간에 담천의의 상중하를 긋고 있었다.

"헛…!"

다급한 신음은 담천의가 아닌 백결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분명 금색면구를 쓴 사내의 검이 담천의의 가슴과 허리, 그리고 허벅지를 벤 것 같았다. 사내의 검은 섬전과 같이 쾌속하여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담천의는 서 있는 곳에서 뒤로 물러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분명 검은 담천의의 몸을 그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누구나 예상했던 핏줄기는 터져 나오지 않았다. 단지 손바닥 정도 크기의 옷자락만이 팔랑거리며 허공에 떠올랐다가 떨어져 내렸다. 그 뿐이 아니었다. 담천의의 가슴과 허벅지 역시 베어져 있었는데 핏방울 하나 흘러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단지 옷만 벤 것 같았다. 만약 한 치만 더 깊이 휘둘렀다면 담천의는 피를 뿌리고 쓰러졌을 터였다.

"멋진 쾌검이오. 정말 훌륭했소."

칭찬인가? 비웃음인가? 담천의는 운 좋게 위기를 모면한 사람답지 않게 담담하게 말했다. 반드시 칭찬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비웃음 같지는 않았다. 허나 금색 면구의 사내는 동작을 멈추고 담천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자신의 검을 피한 것은 운이 아니었다. 저 천방지축으로 보이는 저 젊은 놈은 자신의 검로를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고, 극히 움직임을 절제한 채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검을 피한 것이다.

"으… 음…."

상엽 역시 침중한 신음을 흘렸다. 그 역시 그러한 사실을 알아 본 것이다. 정말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금색면구의 사내는 쾌검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기습적으로 발검해 죽이지는 못했어도 최소한 상처 하나 주지 못한 것은 처음이었다.

상엽이 자신의 두 형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검을 세우고는 담천의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어차피 혼자로는 안 될 상대였다. 승부를 빨리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시간을 지체하면 지금 바로 깨어난 백결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다.

"……!"
"……!"

네 인물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치고 그들의 신형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 86장 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와 저 인생의 후반기를 풍미하게 될지도 모를 무협작품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천지는 만인의 것이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