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우리의 인생에서 학생의 신분으로 있는 시기는 최소한 16년이 된다는 얘기다. 대학 졸업장을 받고 나서도 석사와 박사 과정을 밟느라고 더 공부를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보다 더 긴 세월을 학생으로 지내야 한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공부하고 또 공부해야 하니, 학생이란 신분은 얼마나 지긋지긋한가!
그런데 여기 이미 고희를 넘긴 사람이 아직도 "나는 학생이다"라고 스스로를 칭하고 있으니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바로 루쉰 이후 중국의 최고 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왕멍(王蒙)으로, 그는 수 차례나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을 정도로 문명을 떨치고 있으며 대중적으로도 현재 중국에서 가장 사랑 받는 작가라고 한다.
그런 그가 "나는 문학가"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학생"이라고 스스로를 칭하고 있으니, 여기에는 단순한 겸양 이상의 의미가 숨겨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중국의 대문호 왕멍이 굴곡 많았던 자신의 삶에 비추어 쓴 인생철학서 <나는 학생이다>에서 우리는 그 의미를 세세하게 읽을 수 있다.
2.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나는 '생존'이요, 다른 하나는 '배움'이다. 삶에 대한 걱정이 없는 인생은 인생이라 말할 수 없다. 때문에 무턱대고 물욕을 비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때로는 희생이 필요한 경우도 있으나, 생존의 권리를 박탈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인권이다. 우리는 개개인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겨야만 한다. 그러나 생존이라는 것은 단순히 산다는 의미가 아니다. 당신이 어떠한 일을 하느냐가 생존의 가치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배움이다. (25쪽,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따라서 "나는 학생이다"라는 왕멍의 선언에는 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평생을 통해 배움을 멈추지 않았던 자신의 삶에 대한 자긍심이 담겨 있다. 배움은 언제나 그에게 힘을 주었으며 특히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역경에 처했을 때 그가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매달릴 수 있는 구명 부표가 되어 주었다.
이것은 그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역정에서 그대로 드러나기에 더욱 진실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14살의 어린 나이에 공산당에 입당하여 승승장구하다가 당내 관료주의를 고발한 단편소설 한 편으로 하루아침에 우파로 몰린 왕멍은 인생의 황금기인 삼십대와 사십대 초반을 사막의 땅인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유배 생활로 보내야 했다.
창작조차 금지 당한 16년에 걸친 이 모진 유배 생활을 견디게 해준 것은 다름 아닌 위구르어를 배우는 일이었다. 배우기가 매우 어렵다는 위구르어를 그는 지금도 유창하게 구사하고 번역하고 통역할 수 있다고 한다. 그가 이렇게 완벽하게 위구르어를 익힐 수 있었던 이유는 책이 아니라 바로 위구르 농민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 즉 생활 속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 바로 학습이며, 인식이 바로 학습이며, 사상이 바로 학습이라는 점이다. 인식론의 시점에서 볼 때 모든 실천은 인식 과정의 필요한 요소이다. 때문에 이는 학습이다. 인식론에서 출발하여 사회실천 활동을 고찰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학습에 능숙한 사람이며,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다. 즉, 그는 사상가이다. 실천을 통해 지식과 인식을 획득하고, 구체적이며 세세한 활동을 사상의 경지로 승화시키는 사람이 바로 사상가 아닌가?
최신 번역서 두세 권을 읽고 사상이 있는 체 하는 사람을 사상가라고 할 수는 없다. 실천 중에 사상을 얻어, 관점과 원칙 그리고 방법을 익히는 사람이 사상가이다. 인생의 변화와 역경에서 밝은 지혜를 얻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사상가이다. 때문에 우리는 경험과 감각을 모아 사상으로 승화시키는 능력 있는 사람을 사상가라고 해야 한다. (60쪽, 나는 학생이다)
인생을 배움의 과정이라고 할 때, 우리가 교실로 삼아야 할 것은 생활이며 우리가 스승으로 삼아야 할 것은 실천이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가 배운 바는 창백하고 공허한 지식에서 생생하고 활기 넘치는 사상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왕멍이 위구르어를 배우면서 언어뿐만 아니라 위구르 농민들의 생활방식과 습관, 더 나아가서 그들의 사유방식과 문화까지도 배우게 되었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얻은 사상을 세상에 드러내놓고 자랑하는 것은 배우는 자, 곧 학생으로서의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다. 배움은 자신의 몸을 낮추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왕멍이 중국 전통 철학 중의 하나인 도가(道家)의 중심 사상인 '무위(無爲)'를 우리가 지녀야 할 삶의 자세로 강조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큰 소리를 치거나 떠들썩하게 자기를 포장하거나 자기의 주장을 남에게 억지로 설득시키려 하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순간순간 즐기고 누리면서 그저 묵묵히 해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무위'이다. 배움이란 모름지기 이런 자세로 한 평생을 추구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무위'의 자세는 인간관계, 이른바 처세술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삶의 원칙이기도 해서, 혈연ㆍ학연ㆍ지연 등 온갖 끈으로 인간관계를 엮어 자신의 삶에 이용하려고만 드는 현대인들의 약삭빠른 태도에 경종을 울리고 있기도 하다.
올바른 인간관계는 애써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무심히 이루어진다. 그것은 하나의 학문이나 기교라기보다는 하나의 수양이다. 필승불패라고 하기보다는 이길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라는 것도 있을 수 없고 실망이라는 것도 없으며, 때문에 투쟁에 참가하지 않아도 승리하는 것이다. 기어이 이기려고 한다면 오히려 이길 수 없다.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때, 자연스럽게 성공하는 것이 인간관계이다. (143쪽, 노자가 부르는 무위의 노래)
<나는 학생이다>에는 이외에도 성공, 우정, 건강, 취미, 노년, 가정 등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가치들과 또한 그로 인해 고민거리를 안겨주는 많은 인생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대답이 담겨있다. 그런데도 <나는 학생이다>에서는 인생철학을 논하고 있는 많은 책들이 빠지기 쉬운 관념성이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것은,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경험을 통하여 터득한 진리와 지혜를 책에 담았기 때문일 것이다.
3.
<나는 학생이다>를 다 읽고 나 스스로를 돌아보니,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뭔가 배웠노라고 내세울 게 하나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아니, 대학교를 다닐 때에도 나는 시쳇말로 '먹고 대학생'이었으니,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나는 한번도 '학생'이었던 적이 없었던 셈이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왕멍은 말한다. '학생'은 나의 신분만이 아니고 나의 세계관이자 인생관이라고. 그렇다. 자기가 풍부해야 세계의 풍부함을 만끽할 수 있고, 자기가 배우기를 좋아해야 삶의 풍요로움도 즐길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우리는 인생이라는 학교를 졸업하기까지는 누구나 다 학생이기를 그쳐서는 안 될 터이다.
덧붙이는 글 | <나는 학생이다>
ㅇ왕멍(王蒙) 지음
ㅇ임국웅 옮김
ㅇ도서출판 들녘 펴냄
ㅇ2004년 10월 20일 초판 1쇄
ㅇ정가 9,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