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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이유로 기차를 놓쳐 본 일이 한 번쯤은 있기에 시집 제목이 가슴에 들어왔다. 또는 그 기차를 타지 않았더라면 만나지 않았을 사람, 멀고 가슴아픈 기억 때문에 이 시집을 손에 넣게 되었다. 그러나 시, "기차를 놓치다"는 나의 이런 여린 감성을 부수고 추운 바깥의 풍경을, 현실의 풍경을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관념에서만 머무르며 허덕여온 나의 시 작업에 일침을 놓고 있지 않은가!

▲ 시집 <기차를 놓치다>
ⓒ 도서출판 애지

골판지 깔고 입주한 지 얼마 안 되는
말수없고 어깨 심히 휜 사내를 향해
눈곱이 다층으로 따개비를 이룬
맛이 살짝 간
나 어린 계집의 수작이 한창 물올랐다
농익은 구애가 사내의 귓볼에 가 닿자
속없는 물건은 불끈 일어서고

새벽 영등포역

지하도에 내몰린 딱한 사내와
쫓겨난 비렁뱅이 계집이 눈 맞았는데
기어들어 녹슨 나사 조였다 풀
지상의 쪽방 한 칸 없구나
달뜨고 애태우다
제풀에 지쳐 잠든 사내 품에
갈라지고 엉킨 염색모 파묻은
계집도 따라 잠이 들고

살 한 점 섞지 않고도
이불이 되어 포개지는
완벽한 체위를 훔쳐보다가
첫기차를 놓치고 말았다

고단한 이마를 짚고 일어서는
희붐한 빛,
저 철없는 아침
ㅡ"기차를 놓치다"


'시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회의가 머리를 치켜드는 이 시대에 살뜰하게 보여 주는 바깥의 풍경이, 정감어린 시선이 미사여구로 장식된 그 어떤 시보다 더 깊이있게 다가왔다. 시인은 차가운 현실을 차갑다고 말하지 않으면서 현장을 사진 찍듯이 보여 주었는데 가슴에 뜨거운 불덩이 같은 것이 올라왔다.

평화운동가로 이라크에 건너가
인간방패를 자청한 한국인 청년을
또래의 현지 방송기자가
취재하는 자리였다
먼저 아랍인 기자가 묻고 청년이 답했다
"왜 이곳에 왔니?"
"네 조국의 평화를 위해!"
뒤이어 청년이 묻고 기자가 답했다
"이번 전쟁에 대한 네 생각은?"
"나쁘지 않아
일자리를 얻었거든
부모님께는 텔레비전을 사드리고
내 방엔 침대를 들여놨어
......
이십팔 년만에 처음"
ㅡ"대화"


시인은 이 시에서 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다. 생생하다. 삶의 이면에 놓인 것들이 그리 간단하고 명백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는 것을 그저 담담하게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고단한 삶에 힘을 실어주기도 하는 그런 따뜻한 시들이 이 시집 한 권에 꽉 들어차 있다.

엄동설한에 한 번도 바깥에 나앉아 본 일이 없는 내가 힘들다고 엄살 떨며 살아온 것 같아 많이 부끄러웠다. 꽃잎 같은 야들야들한 시만이 시가 아니고, 자연 속의 유유자적함만이 서정이 아니고 이웃의 지난한 삶이 서정이 되는, 우리가 얼싸안고 있는 이 삶에 이토록 녹진한 힘이 있으며 쓰라림에도 힘이 있다고 일러주는 시!

시인 손세실리아는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으며 2001년, <사람의 문학>을 통해 등단한 신인이다. 신인다운 패기가 시 곳곳에 넘쳐남을 발견할 수 있어서 기뻤다. 산문정신이 우세한 요즘, 하나의 상황으로 절박한 삶을 비춰주는 운문정신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시를 읽는 기쁨은 바로 이런 것 아닌가.

옥돌 몽돌 차돌뿐 아니라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자갈을
콘크리트에 꼿꼿이 박아놓고 맨발로 걸으란다 고장난 오
장육부의 막힌 혈을 뚫으려면 어지간한 고통쯤은 참아낼
줄도 알아야 한단다 옹이 박힌 발바닥 내딛는 부위마다
비명이다 그새 또 병이 깊어진 게다 자갈의 둥근 이마를
짚고 맨발마당을 한 바퀴 돌아나오는 동안 발바닥 신경분
포도 옆 공용신발장에서는 밑창 닳고 뒤축 꺾인 신발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제히 등 돌려 서 있다 어느 한군데
성한 곳 없는 생의 환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듯 정면
으로는 차마 쳐다보지 못하겠다는 듯
ㅡ"압점"


일침을 놓는다는 것이 또 그런 것 아닌가.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이 시점에서 대학시절에 무엇엔가 심사가 잔뜩 뒤틀린 은사님의 말씀이 요긴한 물건처럼 갑자기 생각났다. "교수가 점수도 맘대로 주지 못한다면 뭐하러 교수하겠어!" 이 가당치도 않은 협박(?)의 말씀이 여기에 꼭 들어맞는 이치에 닿는 말은 비록 아닐지라도, 이 시대에 시로서 시대의 가슴을 치지 못한다면 시인은 뭐하러 시를 쓰는가. 막힌 혈을 시원스레 뚫어주는 시, 그런 시를 쓰고 싶다는 열망이 이 시집 한 권을 읽는 내내 용솟음쳤다.

덧붙이는 글 | 손세실리아 시집 <기차를 놓치다>, 도서출판 애지, 2006.


기차를 놓치다

손세실리아 지음, 애지(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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