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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 냉전의 종식 이후, 국제질서가 어떻게 재편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에서 주목을 끌었던 책이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었다. 헌팅턴은 냉전시대 세계질서를 좌우하는 핵심 변수가 이데올로기였다면, 탈냉전시대에는 문명이 새로운 변수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질적인 문명들간의 갈등과 충돌이 국제분쟁을 촉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 로버트 콕스, <다수 문명에 대한 사유 외>
ⓒ 책세상
진보적 국제정치학자 로버트 콕스는 문명의 충돌 이론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한다. ‘책세상’에서 최근 출간된 <다수 문명에 대한 사유 외>에서 콕스는, 문명은 헌팅턴이 말하는 것처럼 서로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와 관련 그는 기독교 문명을 사례로 제시한다. 기독교 문명은 시작부터 ‘일종의 전쟁 상태’에 있었는데, 무수한 갈등을 통하여 새로운 사고방식이 진화했고, 인권이나 보편적 가치 같은 관념이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서로 다른 문명이 대결하면서 다양한 사유의 방식으로 진화하는 것이지 충돌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콕스가 보기에, 문명간의 적대와 충돌을 강조하는 것은 보편성을 내세워 기존의 질서와 위계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해왔다.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 이슬람을 서구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새로운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비판받았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콕스는 문명을 역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구성되고 진화하는 문명은 결코 단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서로 적대적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서로의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인권 개념을 도출하는 데 있어서도 같은 맥락이 적용된다. 유럽 계몽주의 전통에서 보자면, 권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모두에게 주어지는 보편적인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유 양식에서 보면, 권리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의 산물이다. 인간 본성 또한 보편적인 것이 아니고, 역사적으로 서로 다르게 형성되는 것이다.

즉, 여러 문명은 각각의 문명을 만들어가는 갈등 과정에서 서로 다른 인권 개념을 역사적으로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인권의 확립은 한 문명의 규범을 다른 문명에 강제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신 “각각의 사회 내에 인권을 확립하기 위해 투쟁하는 민중 세력들을 고무”함으로써 이를 도울 수 있게 된다.

콕스에 의하면, 서로 다른 문명들이 각자의 차이를 존중하고 인정하면서, 합의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 함께 행동함으로써 재난들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이 때 문명의 기반이 되는 시민사회의 강화, 문명간의 상호 인정을 엮어낼 능력을 갖춘 핵심 집단의 존재는 이러한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여기서 핵심 집단이란 그람시가 제시했던 ‘유기적 지식인’을 의미한다. 콕스는 교사들, 언론인들, 평화운동가들, 환경운동가들 그 외 다수의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가진 것과는 다른 형태의 상식이 공존한다는 관점을 갖고 행동할 능력을 갖춘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들이 자신의 일상 업무와의 관련성 속에서 서로 네트워크함으로써 경쟁력 제일주의를 해체하고 지구화에 반대하며 연대정신을 재생시키는 ‘연결 고리’의 몫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조심스럽게 전망한다.

다수 문명에 대한 사유 외

로버트 콕스 지음, 홍기빈 옮김, 책세상(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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