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서울가정법원 김귀옥 판사.
ⓒ 오마이뉴스 조경국

"가정폭력은 인간의 존엄성을 빼앗는 범죄죠. 단순히 집안문제가 아니에요. 사회의 기본단위인 가정이 깨지면 사회가 무너집니다. 부부간의 폭력은 개인, 가정, 사회, 국가를 위해서 근절되어야 할 최대악입니다."

서울 서초동 가정법원 판사실에서 만난 김귀옥(43) 판사는 시종일관 가정폭력의 심각성을 강조했다. 그는 10여 년간의 법원생활 중 만 3년을 가정폭력 사건 처리에 매달려왔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범죄 중 검찰이 형사사건으로 기소하지 않고 가정법원에 보내오는 '가정보호 사건'은 한 달에 1백 건 정도인데, 부부간의 폭행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지난 2년간 서울 시내 2천여 건의 가정 폭력 사건은 모두 김 판사의 손을 거쳐갔다.

법원 내에서 김 판사는 가정폭력 사건의 전문가로 꼽힌다. 김 판사는 재판을 진행하면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현행 가정보호 재판의 실무상 문제점과 관련법의 보완을 위해 논문을 발표하고 각종 토론에 참가하기도 했다.

김 판사는 "통계에 의하면 전체 가정폭력 중에 법원까지 오는 경우는 10%도 되지 않는다, 정말로 심각한 사안들은 아직도 음지에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이제 사회와 국가가 발벗고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10일 낮 김 판사를 만나 가정폭력의 실상과 제도적 해결방안을 들어보았다.

가정폭력은 인간의 존엄성 파괴하는 중범죄"

ⓒ 오마이뉴스 조경국
- 사회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가정도 변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가정폭력이 아직도 심각한 수준이라는 건가.
"그렇다. 나도 가정법원에 오기 전까지는 이 정도인지 잘 몰랐다. 대부분의 사건은 겉으로 보기엔 사소한 폭언·폭력에 불과한 것 같지만, 문제는 그게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이다. 사건을 구체적으로 조사해보면 폭력의 강도나 상습성에 놀라게 될 때가 많다.

한 예로 60대 노인이 부인을 수십 년간 구타해온 사건도 있었다. 가해자를 두 달간 구치소에 보냈는데 반성하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본인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피해자도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당하고만 있었다. 이게 현실이다.

양적으로도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어느 여성상담소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부부의 1년간 폭행 발생 비율이 일본 부부의 평생 비율보다 높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 그렇다면 가정폭력이 왜 줄어들지 않는다고 판단하는가.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사고와 풍토가 가장 큰 원인이다. 내 마누라 내 새끼는 내 맘대로 할 수 있다, 내가 먹여 살리니까 법적으로 내 것이라는 관념이 아직도 통한다. 가족을 내 소유물로 생각하니 범죄라는 의식이 없는 것이다."

- 주로 남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
"그런 경우가 많다. 부부가 싸우더라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대등한 관계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국가가 간섭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정폭력은 경제적, 육체적인 힘의 불균형 속에서 발생한다. 강자가 약자에게 폭력을 쓰는 방식이다. 힘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쪽은 거의 남자다."

- 여성이 폭력의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가해자인 경우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물론 그런 경우도 있다. 서로 자기 주장이 강하다보니까 평행선을 그리다 부딪히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화가 아닌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해서는 안된다. 여자가 잔소리를 하면 여기에 맞서 남자가 폭행을 하고, 그 결과 싸움이 잠잠해지는 행동패턴이 전형적인 모습인데,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다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한편으론 여성이 가해자인 사건도 늘고 있는 추세이다. 크게 두가지 형태를 띈다. 첫째, 평상시 당하기만 하다가 맞싸움을 하게 되는 경우, 둘째, 흉기가 등장하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 자칫 살인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부부간 성폭행도 심각한 범죄... 강하게 처벌해야"

가정폭력 사건 어떻게 처리하나

부부싸움을 하다가 남편이 부인을 때렸다. 수사기관에 신고를 하면 어떻게 처리될까?

우선 경찰은 기본적인 사실을 조사하여 혐의가 인정되면 검찰로 보낸다. 검찰은 사건 중에서 살인·중상해와 같이 무거운 범죄는 일반 형사사건으로 기소를 하지만, 상당수의 사건은 집안에서 일어난 특수성을 감안하여 가정법원으로 송치한다.

가정법원으로 넘어온 사건은 형법이 아닌 가정폭력 처벌에 관한 특례법(가정폭력법)에 따라 가정보호 사건으로 심리를 하게 된다. 가해자는 판사가 직권으로 구치소에 유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징역, 벌금형과 같은 형벌을 받지 않는다.

대신 최장 1년간 ▲ 피해자에게 접근금지를 명하거나 ▲의료․상담시설 위탁 ▲보호관찰, 사회봉사와 같은 보호처분을 받게 된다. 가해자의 처벌보다는 가정의 회복에 우선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가정보호 사건은 서울 지역의 경우 가정법원에서 나머지 지역은 각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담당한다.
- 민감한 문제이긴 하지만, 법원은 그동안 부부강간 등 성적인 폭행은 처벌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여성단체 등에서는 부부간의 성적 학대도 처벌하라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
"사람마다 입장이 다를 수 있다. 사견임을 전제로 말하겠다. 부부간의 강간, 성추행에서 주목할 부분은 배우자에게 폭행이나 상해를 가한 후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 배우자를 성적인 도구로 전락시킨다는 점이다. 자신의 지배 욕구를 과시하는 것이다. 굉장히 심각한 폭력이다. 여기까지 왔다면 이미 깨진 가정이다. 법을 정비해서라도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가정보호 사건을 오래 담당했다. 가정보호 재판은 전과가 남지 않고 가해자에 대한 제재수단도 많지 않다. 차라리 형벌로 강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찮다.
"처벌이 능사가 아니다. 경찰, 검찰은 범죄수사에 역점을 둔다. 다시 말해 당해 범죄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뒤에 있는 심각한 폭력은 해결할 방법이 없다. 또 징역, 벌금형으로는 폭력이 근절되지도 않는다. 가정폭력이 왜 발생했고, 어떻게 발전했으며, 또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에 주목해서 그에 맞는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 그렇다면 가정법원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상담과 치료가 필요하다면 기관을 연결해주고, 불가피하게 당사자들이 이혼을 한다면 피해자를 보호하고 잘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법원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해줘야 한다. 그래서 가정보호 사건으로 처리하는 것이 낫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가정의 회복을 구실로 가정폭력을 묵인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인 가정폭력이 가정법원에서만 관심을 갖는다고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사회 전체의 인식이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닌가.
"몇개월 재판해서 몇십 년의 삶을 바꿀 수 있겠는가. 제일 중요한 것은 개인과 사회가 가정폭력을 범죄로 인식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피해자들은 신고할 엄두를 못내고 있다. 이웃과 친척들이 대신 신고를 해주어야 한다. 남의 일이라고 외면하면 할수록 사회 전체가 병들어가게 된다.

수사기관도 좀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일반 형사사건보다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아무도 모르게 사람의 목숨이 왔다갔다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국가 역시 가정폭력을 예방할 의무가 있다. 성교육과 마찬가지로 국민들이 어릴 때부터 가정폭력 예방 교육을 받게 해야 한다."

ⓒ 오마이뉴스 조경국
"법원뿐 아니라 국가 사회와 함께 나서야"

김 판사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는 법원 뿐 아니라 수사기관, 여성단체, 상담소, 위탁시설 등 모든 단체가 긴밀한 협조를 해야 가능한 일"이라며 이들 기관의 협의체를 구성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김 판사는 가정보호 사건의 실효성을 거두기 위해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대법원에 이미 개정안도 제출했다. 이 개정안은 ▲법원의 사실조사, 심리검사 강화 ▲접근금지, 병원치료, 상담 등의 처분기간을 최장 2년까지로 연장 ▲경찰·교도관의 집행의무 명시 ▲가해자감시 피해자 보호 강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김 판사는 2월 정기인사로 서울고등법원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다양한 사건을 경험하고 2년 후 가정법원으로 다시 돌아올 계획이다. 김 판사는 마지막으로 "사회의 행복지수를 높이는 차원에서도 가족간의 폭력은 근절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덧붙이는 글 | 김용국 기자는 법원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