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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전북 정읍 출신의 손 세실리아 시인이 첫 시집 <기차를 놓치다>를 도서출판 애지에서 펴냈다. 2001년 <사람의 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손 세실리아 시인의 첫 시집 <기차를 놓치다>에는 2005년 3/4분기 문화예술위원회의 우수시와 '2006 오늘의 시'(도서출판 작가)로 선정된 '얼음 호수'를 비롯한 모두 55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한국 시단에서 그는 좀 특별한 존재다. 천주교 세례명 세실리아라는 이름을 필명으로 쓰고 있는 것도 그렇고, 신춘문예나 유명 잡지의 신인상이라는 화려한 등단도 없고, 시집 한 권도 없는 시인임에도 회자(膾炙)하는 대표작이 많은 시인이란 것도 그렇다.

현재 한국 시단에서 그를 모르는 시인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이제 손 세실리아 시인의 첫 시집 <기차를 놓치다>가 세상에 나와서 그의 시를 좋아하는 많은 독자는 한동안 심심하지 않으리라. 지치고 힘든 인생살이에서 삶의 힘과 위안을 얻으리라.

제 몸의 구멍이란 구멍 차례로 틀어막고
생각까지도 죄다 걸어 닫더니만 결국
자신을 송두리째 염해버린 호수를 본다
일점 흔들림 없다 요지부동이다
살아온 날들 돌아보니 온통 소요다
중간중간 위태롭기도 했다
여기 이르는 동안 단 한 번이라도
세상으로부터 나를
완벽히 봉封해 본 적이 있던가
한 사나흘 죽어본 적 있던가
없다, 아무래도 엄살이 심했다
- '얼음 호수' 전문


손 세실리아 시인은 '시인의 말'에 표기된 것처럼 "호수가 있는 마을 일산에서" 살고 있다. 시에 나오는 얼음 호수가 시인이 살고 있는 일산의 호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추운 겨울날 호수가 꽝꽝 얼어버린 것을 "자신을 송두리째 염해버린" 것으로 본 데서 이 시의 의미는 시작되고 있다.

"일점 흔들림 없"는 "요지부동"의 얼음 호수는 시적 화자의 자아 성찰의 매개물이다. 시적 화자는 "위태롭기도" 하고 "온통 소요"였던 지난 삶을 뒤돌아보니 "세상으로부터 나를/완벽히 봉封해 본 적이" 없다고, "아무래도 엄살이 심했다"고 자성(自省)한다.

자기 삶의 깊은 성찰을 통한 참된 자아 찾기는 이 시의 화자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의 궁극적 삶의 목적이다. 어쩌면 음악가, 화가, 시인들이 세상에 내놓는 숱한 예술 작품들도 그들 나름으로 이 참된 자아(삶) 찾기의 과정에 나온 결과물로 볼 수도 있겠다.

위에서 살펴본 시'얼음 호수'는 시집 <기차를 놓치다> 맨 앞머리에 배치되어 있는데, 그 위치나 내용 면에서 시집의 '서시(序詩)'나 '자서(自序)'의 성격을 띠고 있다. 시집 <기차를 놓치다>에 편재된 55편의 작품은 손 세실리아 시인이 참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부닥친 신산한 세상살이와 내면 응시에서 얻은 것들이다.

그의 시 세계를 한 마디로 아우르는 말은 가이없는 어미의 품, 바로 모성(母性)이라 할 수 있겠다. 그 모성은 "평생 장승처럼 눕지도 않고 피붙이 지켜온 어머니" "희멀건 국물/엄마의 뿌연 눈물"('곰국 끓이던 날')에서 이어져 온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온 곳이 어미의 품이고, 어리고 애처로운 생명을 길러내는 눈빛이 바로 어미의 그것이다.

시집 <기차를 놓치다>에 드러난 손 세실리아 시인의 모성은 가없고, 다양하다. 그것은 수협 공판장 일용직 잡부 곰소댁의 넋두리에 가 닿기도 하고('곰소댁'), 말복 날 "말끔히 지워져 버린 수태의 흔적"을 갖고 있는 냉동 닭('말복'), 선교사역을 꿈꾸다 이라크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한국 청년의 외마디('장미를 노래하고 싶다'), 지쳐 잠든 새벽 영등포역 노숙자('기차를 놓치다'), 방콕 빈민촌에서 태어나 변산반도까지 흘러든 악어 조련사 드완의 식은 땀('악어새'), 미 장갑차 무쇠바퀴에 뭉개져 죽어간 소녀, 그 어미의 통곡('베옷을 입다')에까지 닿아 있다.

이렇듯 세상의 상처와 상처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끌어안는 손 세실리아 시인의 모성은 공간과 시간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다양하고 깊게 확장되고 있다.

깊은 서정성과 삶의 현실감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손 세실리아의 시가 갖고 있는 또 하나의 미덕은 시적 상황에 대한 과도한 엄살이나 과장없이 진지하게 그려내는 진정성이다. 현란한 수사를 거부하고 이 세상의 환부(患部)를 찾아가 상처를 어루만지며 생명을 다독이는 그의 시를 두고 이경림 시인은 "수세기 수탈의 역사를 업고 안고 젖 빨리다 몸피 야위고 뼈에 구멍 숭숭 났으나 누우런 조선호박의 펑퍼짐한 엉덩이같이 놀랍도록 당당한 납작코 조선 어미들의 슬픈 품" "사랑과 측은지심으로 퉁퉁 불은 젖물을 뽀얗게 분사하고 있다"고 평한다.

노모의 칠순잔치 부조 고맙다며
후배가 사골 세트를 사왔다
도막 난 뼈에서 기름 발라내고
하루 반나절을 내리 고았으나
틉틉한 국물이 우러나지 않아
단골 정육점에 물어보니
물어보나마 암소란다
새끼 몇 배 낳아 젖 빨리다 보니
몸피는 밭아 야위고 육질은 질겨져
고기 값이 황소 절반밖에 안 되고
뼈도 구멍이 숭숭 뚫려 우러날 게 없단다

그랬구나
평생 장승처럼 눕지도 않고 피붙이 지켜온 어머니
저렇듯 온전했던 한 생을
나 식빵 속처럼 파먹고 살아온 거였구나
그 불면의 충혈된 동공까지도 나 쪼아먹고 살았구나
뼛속까지 갉아먹고도 모자라
한 방울 수액까지 짜내 목축이며 살아왔구나
희멀건 국물,
엄마의 뿌연 눈물이었구나
-'곰국 끓이던 날'전문

기차를 놓치다

손세실리아 지음, 애지(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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