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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현관과 지하주차장 출입구에 설치된 오토도어시스템
ⓒ 김정은
"딩동~."

홈 오토메이션 장치에 있는 통화버튼을 누르니 화면 가득 낯선 표정을 한 한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

"누구세요?"
"그릇 가지러 왔으니 현관문 좀 열어주세요."

"현관 밖에 내다 놓았다"고 하려다가 '아차'하고 급히 버튼을 눌렀다. 아파트 공동현관의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또 깜박해 버린 것이다.

배달시켜 먹은 빈 그릇 하나를 수거하기 위해 아파트 공동현관에 붙어 있는 낯설고 차가워 보이는 디지털 장치를 향해 문을 열어줄 것을 호소하고 있는 배달맨들. 새 아파트 이사 후 생긴 새로운 풍속도이다.

홈 오토도어 시스템의 득과 실

언제부터였을까? 아파트단지마다 현관 출입구를 지키던 경비원의 수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새로 짓는 아파트에는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 외에는 들어갈 수 없는 보안 자동문이 설치됐다. '홈 오토도어 시스템'이라는 이름의 이 시스템은 늘어나는 인건비 절감 및 공동주택가구 구성원의 사생활 보호는 물론이고 보다 과학적으로 체계화된 보안요구가 디지털 기술과 결합된 것이다.

이 새로워진 시스템으로 인해 사람들은 집안 구성원을 속속들이 잘 알아 부담스러웠던 경비아저씨가 없어진 것을 환영했고 매일같이 들락날락해서 벨을 울리거나 아니면 보다 점잖은 방법으로 스티커나 광고 전단지를 현관문에 붙이고 유유히 사라지는 잡상인의 출입을 통제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의 출현으로 인해 경비아저씨들의 일자리는 줄어들었고 이 동네의 배달맨들 또한 자장면 하나, 치킨 하나를 배달해도 일일이 공동현관 출입구부터 호수를 눌러 통화를 하는 바람에 많이 피곤해졌다. 운이라도 좋아 공동현관 앞에서 그 안으로 들어가는 출입카드를 가지고 있는 구성원들을 만나면 껄끄러운 기계에 대고 소리치지 않아도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영락없이 배달통을 든 채 기계 앞에서 통화한 후 문 열어주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그렇지만 이처럼 외부인을 철저하게 차단하는 이 시스템 또한 문제가 있었다. 이 시스템의 맹점은 바로 외부인만을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출입카드를 가지고 있지 않는 모두를 차단한다는 것.

그러다 보니 정작 그곳에 혼자 살고 있는 구성원들도 카드를 깜박하고 잊어버리면 카드를 가진 또 다른 이가 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경비실의 확인을 받은 후 들어가야 하는 번거로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가장 불만인 사람은 바로 어머니였다.

"난 아무래도 영 정이 안 가고 무서워. 너 없는 시간에 쓰레기 버리려고 잠시 밖으로 나가려고 해도 출입카드를 가지고 나가지 않으면 내 집에 들어오지조차 못하잖니 나는 그런 것들이 너무 어색하구나."

"디지털 오토도어장치가 구성원의 지문이나 음성을 인식할 수 있을 만큼 똑똑했으면 좋으련만 아직까지 그러지는 못하니 별 수 없이 카드를 가지고 다녀야겠지요. 익숙해지면 나름대로 어색함이 사라지실 거예요."

기계가 사람에게 맞추지 않고 사람이 기계에 맞춰야 되는 디지털 세상, 어색하면 안 쓰면 되었던 디지털이 이제는 쓰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는 정도로 어느새 우리의 코앞에 근접해 있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한동안 어색했던 어머니와 디지털 오토 도어와의 만남은 한 달이 지났고 이제는 어느덧 서로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이기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지는 것

"문 열어달라"는 배달맨의 소리에 깜짝 깜짝 놀랐던 어머니는 화면 속의 사람과 짤막한 통화를 하고 여유 있게 '문열림' 버튼을 열어줄 줄도 아셨고 열쇠를 가지고 다니지 않고 비밀번호만 눌러도 열려지는 디지털 도어록의 편리함(?)에도 어느덧 길들여지셨고 동네 외출 시에도 습관적으로 출입카드가 든 지갑을 꼭꼭 챙길 줄도 알게 되셨다.

▲ 광고지와 잡상인들이 줄어들었다고 좋아했던 순간도 잠시, 나름대로 이 시스템에 적응(?)된 배달맨들에 의해 다시 수북이 쌓인 광고 전단지들
ⓒ 김정은
어머니가 디지털 오토 도어 시스템에 익숙해진 만큼 배달맨들 또한 빠른 속도로 이 시스템에 적응한 것 같다. 광고지와 잡상인들이 줄어들었다고 좋아했던 순간도 잠시, 또 다시 아파트 현관 앞에 지겨운 광고전단지와 광고자석은 나름대로 이 시스템에 적응(?)된 배달맨들에 의해 다시 수북이 쌓이기 시작했다. 쌓여가는 광고전단지에 짜증이 나다가도 뭔지 모르지만 안심이 되기도 했다.

'기술은 언제나 사람에게 지고 만다'는 모 휴대폰 CF의 감동적인 카피처럼 아파트의 디지털 오토도어시스템도 드디어 우리 동네 배달맨들에게 지고 만 것일까?

그러나 외견상으로는 그렇게 보이겠지만 불행하게도 사람이 기술을 이긴 게 아니라 기술에 사람이 치열하게 길들여져서 더욱 영악해졌을 뿐이라는 데 또 다시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휴대폰 동영상도 볼 줄 모르는 복학생을 희화화한 CF를 만든 그 회사가 '기술은 언제나 사람에게 지고 많다'는 감동적인 문구를 뽑아낼 만큼 영악해진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얼마나 더 디지털에 길들여지고 영악해질까? 길들여짐의 끝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끝을 알 수 없기에 아직 가지 않은 길에 대해 더욱 더 불안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아날로그형인간의 디지털 분투기 59번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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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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