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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나올 게 나오고 있다.

지난 27일 최연희 한나라당 의원의 여기자 성추행 사건이 터지고 4일째.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대국민 사과와 최 의원의 당직 사퇴에서 탈당, 지금은 의원직 사퇴가 초읽기에 들어간 상태다. 여론의 힘이 밀려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여야의 정치적 공방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이쯤 되니 '동정론'이 슬슬 고개를 쳐든다. 액면 그대로 보자면 '최연희 감싸기'지만 남성 의원들의 '동업자 인식'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여기에는 여야의 구분도 없다. 논평과 브리핑을 통해서만 최연희 의원 비판에 열을 올린다.

사실 이런 상황은 여기자들은 일찍이 예상한 바다. 한 일간지 여기자는 최연희 사태가 터지자마자 "시간이 지나면 동정여론이 일 것이고, '어디 무서워서 여기자들과 술자리 하겠냐'는 말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면서 "여기자들의 취재 활동이 위축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우려는 현실화되고 있다. 말하자면 '최연희 후폭풍'이다.

▲ '최연희 의원 기자 성추행' 사건이 보도된 27일, 경제분야 대정부질문이 열린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 의원이 의석에 설치된 컴퓨터를 이용해 관련 뉴스를 읽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 풍경1: 농담

"어, 1.5미터는 떨어져야지…" "악수했다가 큰일나는 것 아냐?" "가까이 있지 마세요!" 남성 의원·남성 당직자·남성 기자들은 여기자를 만나 이같은 너스레로 인사말을 대신한다. 2일 열린 한나라당 의원총회장. 평소 점잖기로 소문난 한 의원은 모 여기자 앞을 지나치면서 "이제 소 닭 보듯 해야 하는 것 아냐"라고 한 마디 던졌다.

악수가 업무인 국회의원들은 요새 여기자들을 만나면 순간 멈칫 한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한 열린우리당 의원과 인사하면서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는데 옆에 있던 동료 의원이 "아니, 어떻게 여기자의 손목을 잡아"라고 만류(?)했다. 농담인 양 던진 말이다.

# 풍경2: 동정

삼삼오오 모인 자리에서 농은 보다 진지해 진다. 다음은 열린우리당 한 의원이 내뱉은 말이다. 그 자리에는 여야 주요당직자들이 함께 했다.

(고백컨대, 당시 이 의원은 말을 꺼내기 앞서 여기자인 나를 의식하고 '이거 쓰고 그러는 것 아니죠?'라고 말했고, 나는 '그럼요'라고 약속했지만 얘기를 다 들은 뒤 후회했다. 쓰지 않는 것 역시 '오보'라는 판단에 지면을 통해 그 의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익명으로 인용한다)

"요즘 여기자들은 인물을 보고 뽑나 봐. (앞에 지나다니는 여기자들을 가리키며) 저기 저렇게 여기자들이 인물이 좋은데 그냥 있으라는 건 우리더러 자갈밭에 폭탄 깔아놓고 지나가라는 거나 다름없어."

의원은 한 발 더 나아갔다. "부산신항에 왜 배가 정박하지 않는지 아냐"고 물었다. 답은? '홍등가'가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러면서 이 의원은 "신항이 시설도 좋고 물류기지로서 조건을 다 갖췄지만 결정적으로 선원들은 구항에 배를 댄다"며 "사람이 물만 먹고 사나, 공기도 마시고…"라고 덧붙였다.

이 의원뿐만 아니었다. 둘러앉은 의원들은 최연희 의원이 거주하는 동네에 "이사가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린 것에 대해 "너무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의사 출신인 정의화 한나라당 의원이 "급성 알콜중독으로 인한 행위"라며 최 의원의 성추행에 의학적 해명을 한 것에 대해선 "일리가 있다"고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한 법사위원은 살인자의 사례를 들며 "살인도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충동에 의한 것"이라고 거들었다. 이 자리에선 여야 구분이 없었다.

▲ 2일 오전 여기자를 성추행한 최연희 전 한나라당 사무총장의 서울 평창동 자택 입구에 <평창동 주민일동>의 이름으로 된 '딸자식 걱정되서 못 살겠다. 성추행범 최연희는 이사하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 풍경3: 소신 혹은 무의식

정의화 의원에 이어 열린우리당에서도 '소신'을 드러낸 의원이 나왔다. 한광원 의원은 2일 오후 자신의 홈페이지와 당 홈페이지에 '봄의 유혹'이란 제목의 칼럼을 내고 "언제부터였을까? 우리 사회에서 '성추행'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무서운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 직장동료에게 가벼운 농담 한마디를 던지거나, 힘내라며 손을 내밀기도 어려운 이 사회적 분위기는 또 언제부터였을까"고 물음을 던졌다.

이 칼럼에서 한 의원은 "봄은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유혹의 손길을 뻗친다"며 "왠지 모를 설레임으로, 때로는 견딜 수 없는 그리움으로, 고독한 남자의 외로움으로, 또 때로는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눈꺼풀의 무게로 말이다"라고 온갖 낭만적 미사여구를 동원했다.

사실 한 의원이 동원한 논리는 반박하기에도 지루하다. 성폭력 사건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갈 때면 으레 '성폭력'과 '성본능'을 뒤섞어 문제를 무화시키는 수법에 다름 아니다. 한 마디로 여성은 꽃이고 꽃은 유혹의 대상이므로 언제든지 꺾어도 된다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남성의 시선이다. 한 의원은 그 얘기를 너무 길고 지루하게 늘어놓았다.

한 의원은 "명백한 '성폭력'의 범주를 제외하고"라는 단서를 달아 "인간의 에로스적 사랑의 욕구를 무력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성추행'이나 '성희롱'에 관한 우리의 인식이 그 어떤 명확한 함의를 찾지 못한 채 다소 감정적인 군중심리의 파고를 타고 행위자의 인권과 소명을 무시하며 무조건적인 비판만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 의원이 성폭력의 개념을 알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혹시 '강간'만을 성폭력이라 생각하시는지? 성폭력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다. 물론 성추행이나 성희롱도 성폭력에 포함된다. 상대의 감정이나 생각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들이 원하거나 호감이 있으면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 그것이 거부당했을 때 '왜 과민하게 반응하냐'는 식의 사고는 '머릿속의 성폭력'으로 언제든 현실화될 수 있는 성폭력의 출발점이다.

유감스럽게도 한 의원은 '용기(?)'도 없었다. 논란이 일자 서너 시간만에 칼럼을 내렸다. 그리고 대체된 칼럼은 '전여옥은 사퇴하라'는 것이었다. 최연희 의원에 관련해선 "전대미문의 성풍(性風), 최연희 의원의 마지막 결단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며 "더 이상 버티기에는 그 자신도, 피해자도, 이를 지켜보는 국민 입장에서도 매우 힘든 일"이라는 내용을 슬며시 끼워넣었다.

하지만 '소신'을 바꾼 이유는 없다. '국민'의 이름을 팔았지만 '복잡하고 짜증나니 어서 덮자'는 요구같이 들린다.

사례들 들자면 끝도 없다. 이계진 한나라당 대변인은 "(최 의원은) 딸 같은 기자에게 사죄를 했다,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 했고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고 해명했다. '딸' 같다는 표현이 왜 나오는지. 기자면 기자지, 딸 같은 여기자는 또 뭔가. 최연희 의원의 은연 중에 튀어나온 해명 "식당주인인 줄 알았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자를 기자아닌 그 무엇으로 보았다는 점에선 그렇다. 여기자는 딸이고 식당주인이고 꽃이었다.

아, 이쯤 되면 차라리 정치권은 성폭력에서 손을 떼라고 권하고 싶다. 이번 최연희 사무총장 성추행 사건의 경우 피해자가 현장 고발하고, 가해자가 이를 시인했음에도 헷갈려 하는데, 그렇지 않은 (가해자가 가해사실을 부인하는) 다수의 사건들을 국회가 어찌 감당하겠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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