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위폐 의혹을 제기하며 북한을 압박해 온 미국이 추가 대북 제재조치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10일자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미 행정부 고위 관리들은 위폐 압력이 "그 누가 꿈꿨던 것보다도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 증명됐다"고 자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문은 또 "이 조치가 (북한의) 신경을 강타했다"는 한 고위 관리의 득의양양한 발언도 소개했다.
지난 6개월간 전개해 온 위폐 압력을 성공적이라고 자평하고 있는 미국이 그와 유사한 성격의 추가 제재를 가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 역시 '반격 카드'를 위한 명분을 축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북한의 신경을 강타?
지금 북한 지도부는 미국의 핵 포기 요구와 위폐 의혹 제기를 본질적으로 동일한 사안으로 파악하고 있다. 핵 포기 압력이나 위폐 압력 등이 표면상으로는 다른 것 같지만 두 사안 모두 대북 압박을 위해 구사되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 지도부는 두 가지를 동일한 사안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므로 북한 지도부는 단순히 말 몇 마디로 미국의 위폐 압력을 물리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일의 뉴욕 접촉에서 북한이 위폐 문제 해결을 위한 북-미 간 협의기구 설치를 제안한 것은, 미국이 그러한 제안을 수용하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 아니다. 북한은 처음부터 그런 기대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 방법으로는 미국을 물리칠 수 없음을 북한은 이미 오랜 경험을 통해 매우 잘 알고 있다. 북한을 압박하기 위해 위폐 의혹을 제기하는 미국이, 아무런 '대가'도 없이 북-미 간 협의기구를 만들고 문제를 실질적으로 종결할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위폐 협의기구 설치, 북한은 처음부터 기대도 안해
그러므로 7일 접촉에서 북한이 미국에 제안한 내용은 일종의 명분 축적용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 무엇을 위한 명분 축적인가? 그것은 바로 미국의 대북 압박을 종결짓기 위한 '모종의 카드'를 말하는 것이다.
미국은 지난 1993년 제1차 '핵 위기' 때에 무엇 때문에 자신들이 갑자기 고분고분해져서 제네바 합의서를 체결하게 됐는지를 다시 한 번 기억할 필요가 있다.
1993년 5월 25일 미 국무부가 대북 제재 가능성을 시사하자, 4일 뒤인 29일 북한은 2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태평양을 향해 발사했다. 1발은 6000km를 비행하다가 하와이 앞바다에 떨어졌고, 또 1발은 3000km를 비행하다가 괌의 앤더슨 미 공군기지 앞바다에 떨어졌다. 위의 사실관계는 2001년 4월 27일 미 하원 군사위원회에서 마크 커크 의원의 진술로 확인되었으며, 같은 날짜 AP 통신 보도에 의해서도 알려진 바 있다.
미국이 압박 강화하자, 북한은 ICBM 발사
제1차 핵 위기 때에 드러난 바와 같이, 미국이 대북 압박의 강도를 높이면 높일수록 북한 역시 대응의 강도를 높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미국은 경제 측면에서 북한을 압박할 수 있지만, 북한은 미국을 상대로 그런 경제 카드를 구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북한이 미국에 던질 수 있는 카드는 '비(非)경제 측면'의 카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북한이 미국에 대해 구사할 수 있는 '비(非)경제 측면'의 카드가 무엇인지 추론하려면, 최근 북한 내의 권력 동향을 살펴보면 된다. 그 점을 보여 주는 것이 작년 12월 19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의 상보다. 당시 상보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부시 행정부는 신뢰할 만한 협상 파트너가 못 된다.
둘째, 평북 영변의 50MW 흑연감속로와 태천의 200MW 흑연감속로 건설을 재개하겠다.
셋째, 우리식 경수로를 자체 개발하겠다.
넷째, 조선은 미국과 개념상의 전쟁 상태에 있으므로 조선이 미국에 맞서 핵무기로 자위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같은 대미 강경 발언이 어떤 형식으로 발표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이것이 '외무성 대변인 성명'이 아닌 '조선중앙통신 상보' 형식으로 발표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북한측은 외무성 대변인을 통해 자국의 대외 의견을 발표한다. 그러나 인민군, 즉 군부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때에는 전통적으로 조선중앙통신을 활용한다. 그리고 위 상보도 바로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발표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는 북한 군부가 이미 작년 하반기부터 대미관계에서 주도권을 회복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북한 지도부 내에서 대미 협상 가능성에 대한 회의론이 이미 강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북한 군부 최근 주도권 장악
또 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미국과 국제사회에 보내는 메시지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정일 위원장은 조선중앙통신 상보를 통해, 미국이 대북 제재를 한층 더 강화할 경우에 어떠한 행동을 취할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외무성보다는 군부의 손을 들어 주고 또한 군부의 의사를 중앙통신을 통해 공개했다. 이는 북-미 간 긴장이 적정 수준을 넘어서 과도한 정도로까지 발전하면 북측도 그에 맞서 '모종의 카드'를 쓸 수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최근 군부가 김정일 위원장의 신임을 얻고 있다면, 그 '모종의 카드'가 무엇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이 미국까지 찾아가서 위폐 협의기구의 설치를 제안했다 하여, 미국이 교만해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북한이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를 국제사회에 보여 주기 위한 '명분 축적용'에 불과한 것이다.
북한 지도부의 의중도 파악하지 못한 채 "위폐 압박이 북한의 신경망을 강타했다"는 자평을 하는 미국의 성급한 행동은 자충수를 두는 것일 수도 있다. 미국은 차분하고 신중해져야 한다.
덧붙이는 글 |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