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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이는 보스포루스 다리
멀리 보이는 보스포루스 다리 ⓒ 이태욱
두 개의 다리 중 루멜리 성 옆을 지나고 고속도로와 연결된 다리의 이름이 '정복왕 술탄 메흐메드 2세 다리'이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메흐메드 2세는 이렇게 정복왕으로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메흐메드 2세가 술탄으로 등극했을 때만해도 철딱서니 없는 군주에 지나지 않았다. 자나 깨나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을 꿈꾸는 어설픈 야심가이기도 했다. 잘해야 선대 술탄이 남긴 영토를 현상유지하면 다행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던 그가 우애곡절 끝에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성공하자 일순간 일세를 풍미한 영웅으로 바뀌었다. 톱카프 궁전 안에 걸려있는 인물화 앞에서는 사진 찍는 것조차 금지되어있다. 어찌 보면 성공한 '오다 노부나가'라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메흐메드 2세는 1432년에 술탄 무라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천한 기독교도 노예였다. 술탄은 아들을 낳아준 이 여자 노예를 별로 총애하지도 않았다. 이슬람국가에서는 율법에 의하여 이슬람을 믿는 사람은 노예를 금하고 있었으므로 실질적으로 황실 가족이 거주하는 하렘의 노예들은 외국인만이 존재했다.

이들은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거나, 부모로부터 싼 값에 팔려왔거나, 세력가들의 선물로 전달된 노예 소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보니 여기에서 자연스레 왕자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던 메흐메드 2세는 그가 5살 때 맏형이 세상을 떠났다. 1443년에는 신원불명의 암살자에 의해 둘째 형이 살해당했다 그 덕택에 어부지리로 열한 살의 나이로 술탄 무라드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 다음 해 아버지는 마흔 살밖에 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열두 살 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줘 버리고,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는 멀리 은거해 버렸다. 엉겁결에 왕위를 물려받은 메흐메드 2세는 어린 나이지만 자기 나름대로 인정받으려고 노력했다. 배경이 약한 메흐메드 2세는 그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커다란 작업으로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계획하였다.

이런 무모한 작전에 불안을 느낀 아버지 술탄은 열네 살 아들이 사냥으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술탄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아들에게 멀리 칩거를 명했다. 자존심이 강한 메흐메드는 굴욕감과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서 난행에 빠진다.

이런 생활이 5년에 접어든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한다. 이슬람교의 가르침을 거스르고 술을 무척이나 많이 마셨던 무라드는 돌연 졸도하여 혼수상태에 빠진 다음 나흘 만에 숨을 거두었다. 메흐메드가 사실을 통보받은 것은 부친이 죽은 지 사흘 지나서였다.

그는 소식을 듣자마자 '나를 따를 자는 따라 오라!'라는 말만 던지고 수도 아드리아노폴리로 향해 쉴새없이 말을 달렸다. 수도에는 명문출신인 배다른 동생이 또 하나 있었다. 그는 천천히 행동에 옮기다가는 자기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었다.

밤낮없이 말을 달리고 가능한 방법을 총동원한 덕분으로 그는 최대한 빠른 시간에 수도에 도착하였다. 그리고는 곧 정식으로 술탄 자리에 올랐다. 동시에 그의 동생은 하렘의 욕조에서 죽임을 당했다. 동생살해는 훗날 투르크의 제국의 관습이 되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계획한다. 자신의 운명을 건 도박이었다.

톱카프 궁전에서 바라본 보스포루스 해협
톱카프 궁전에서 바라본 보스포루스 해협 ⓒ 이태욱
여태까지 50여 년 동안 콘스탄티노플 공략이 몇 번 있었지만 난공불락의 유명한 콘스탄티노플의 3중 성벽과 천하무적의 기사 덕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슬람의 침략이 잦아지자 동로마의 학자, 문인들은 이를 피해 서유럽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성직자 중심으로 지식인층의 이탈리아 망명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12, 13세기부터 유럽의 학자들은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져온 그리스와 아랍의 과학문헌들을 라틴어로 옮기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여기에는 그리스시대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보물같은 책이 많이 있었다. 이로인해 아라비아로 이어져 오는 그리스시대의 문명이 생생히 유럽에 전달되었다.

이를 번역해 본 결과 서유럽은 야단이 났다.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끝나 성직자의 권위가 실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책들은 새로운 시대를 의미하는 르네상스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러한 책을 번역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이 시기를 '번역의 시대'라고 말한다. 이로써 유럽 인들은 5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쳤던 과학의 암흑기를 벗어남과 동시에 자신의 연구업적을 축적해 나갈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급증하는 인쇄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나온다. 이것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이것은 지난 천년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세계 최초의 우리나라의 금속활자가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에 비해 우리의 인쇄술은 세계에 끼친 영향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생각하면서 콘스탄티노플 공략의 전초기지가 된 루멜리 성을 길 위에서 아래로 보면서 메흐메드의 이름이 붙은 다리를 건너 아시아 사이드로 넘어갔다.

세월은 지나 그때와 같은 긴장감은 느낄 수 없지만 그 배경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메흐메드를 생각하면서, 특히 동양사상에 젖어 있는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면에서 도덕이 뭔지, 인격은 뭔지, 악이 뭔지, 운명이 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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