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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입학 열흘 만인 2000년 9월 29일 영국 캔터베리에서 숱한 의혹을 남긴 채 사망한 고 이경운 군 시신 2차 부검이 사건 발생 6년 만인 오는 23일 국과수 해외파견으로 이뤄진다. 영국 당국은 이경운군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발표했으나, 유가족 측은 각종 의혹을 제기하며 의문사라고 주장해왔으며 <오마이뉴스>도 이를 몇차례 보도한 바 있다. 2차 부검을 앞두고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들을 몇회에 걸쳐 다시 정리한다. 이글은 두번째 글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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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 사진 6장의 의혹을 다룬 첫 번째 기사에 이어 이번 기사에서는 이경운군 유가족이 아들의 사망소식을 전해 듣고 10개월 만에 시신 전신을 확인하기까지 가족들과 경운군의 시신을 둘러싸고 영국에서 어떤 의아한 일들이 벌어졌는지 소개하려고 한다.
영국 경찰 측은 이경운군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지만 그들의 사고처리는 통상적인 '교통사고' 처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유가족의 증언과 몇 가지 자료를 토대로 이른바 '시신 숨바꼭질'이 벌어졌던 상황을 살펴보자.
스페인 성당 미사에 찾아온 경찰, "경운이가 죽었다"
2000년 10월 1일 스페인 라스팔마스. 성당 미사에 참석 중이던 경운군의 모친 정승미씨에게 스페인 경찰이 찾아온다. 영국에서 유학중인 아들 경운군이 사망했다는 것.
다음날 정승미씨와 경운군의 동생 경진군은 스페인 마드리드 경유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스페인 본토 출장 중이었던 경운군의 부친 이영호씨는 황급히 마드리드 공항으로 출발하여 공항에서 뜬눈으로 지새운 후 10월 2일 새벽에 온가족이 마드리드 공항에서 만나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사고발생 장소인 캔터베리에 도착해 캔터베리 경찰서에서 대기 중이던 검시보조관 데이비드 케어로부터 간략한 상황보고를 들은 뒤, 곧바로 시신이 안치된 켄트 앤 캔터베리병원(이하 캔터베리 병원) 영안실에 도착해 아들의 신원을 확인했다.(얼굴만 확인) 이영호씨에 따르면 당시 케어는 "아직 부검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고, 유족측은 부검일에 시신을 확인키로 케어와 구두 합의했다.
| | | 왜 유가족에게 대학 숙소를 제공했을까 | | | 영국 신부의 이상한 제안 "유품을 달라" | | | | 스페인에 거주 중이었던 유가족은 영국 현지 상황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영국 검시관측의 숙소 제의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중에 이영호씨는 "왜 구태여 대학 구내 숙소로 안내한 것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유가족을 사건과 유리시키는 전략 아니냐는 것.
당시 대학 관계자는 경찰이 찾아 올 테니 숙소를 떠나지 말고 대기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또 켄트 대학이 대도시 대학이 아닌 지방 소도시 캔터베리에 있었기 때문에 외출이 용이치 않았다.
2000년 10월 7일, 유가족이 머물고 있던 켄트 대학 교수숙소로 한 영국인 성공회 신부가 찾아와 유가족에게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러나 그 신부는 그 자리에서 이상한 제안을 한다. 경운군의 유품을 건네달라고 요구한 것. 유가족은 그 신부가 어떤 이유에서 유품을 요구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때까지도 시신도 확인하지 못하고, 사건 관련 서류도 확인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거절했다.
유가족이 강력히 거절하자 그 신부는 "이 대학 숙소에는 '마스터키'가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며 사라졌다고 한다. / 박성진 | | | | | 캔터베리 경찰서는 유가족에게 다음날인 10월 3일 오전에 사고현장으로 안내하고 그 다음 날 사고 전반에 대한 브리핑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검시보조관 케어는 이들에게 켄트대학교 내 숙소를 제공했는데, 이씨 부부를 숙소로 안내한 대학직원은 이들을 숙소로 안내한 뒤 경찰로부터 연락이 올 수도 있으니 숙소를 떠나지 말고 대기하라고 전했다.
그러나 다음날 오후가 되어도 경찰은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려도 경찰이 오지 않자 유가족은 꽃과 묵주를 들고 병원을 찾아가 아들의 명복을 빌고, 준비해간 카메라로 경운군의 얼굴을 촬영했다. 이들이 다시 숙소로 돌아왔을 때까지도 경찰은 찾아오지도, 연락을 주지도 않았다. 10월 4일 사건 전반을 브리핑해주겠다던 약속 또한 지켜지지 않았다(경찰이 유가족을 사건 현장으로 인도한 것은 그로부터 2주 가까이 지난 10월 14일이었다. 또 유가족이 경운군 사망에 대해 종합상황을 접한 것도 경찰이 아닌, 지역신문 <켄티시 가제트> 10월 6일자를 통해서였다).
영국 경찰의 거짓말이 계속되자 유가족은 영국 경찰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유가족은 10월 5일, 영국 당국에 경운군의 장례를 유보하겠다고 결심하고, 특수 위생 처리를 상의하러 갔다. 그리고 그 다음날 이경운 여권과 특수 위생처리 비용을 포함한 각종 비용 중 선금 1000파운드(한화 약 2백만 원)를 장의사에게 지급하러 갔다가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된다.
이어지는 영국 경찰의 거짓말, 이상한 서류들
경운군의 시신이 이미 장의사(C. W. Lyons & Son Ltd.) 영안실로 옮겨졌다는 것. 유가족 측에는 아무런 사전 협의나 공지도 없었다. 시신이 장의사로 옮겨졌다는 것은 곧 유가족이 시신을 인수해 장례를 치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경운군 유가족은 이때까지 시신 확인도 하지 못한 상황이었을 뿐더러 제대로 된 의료서류, 사망 관련 서류도 접하지 못한 상태였다.
유가족은 경찰 및 병원 측에 사건 관련 서류인 앰뷸런스 보고서, 각종 의료 서류, 경찰 조사 보고서, 증인 진술서 등 관련 자료 일체를 요구하며 강력하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0월 13일, 장의사로부터 사망관련 4건의 서류를 입수했다. 검시관 리처드 스터트가 발행한 '이경운 사망 통보 편지'(정식 사망확인서가 아닌 검시관 개인자격으로 작성된 문서), 부검의 압둘카디르가 발행한 '사체 세균 비전염 확인서', 부검시관 테레사 애슐리가 발행한 '잉글랜드 외부로 시신방출 허가서(Out of England Order)', 장의사 레이밍이 발행한 '염방부 확인서'가 그것이다.
그런데 서류들이 이상했다.
검시관 리처드 스터트가 발행한 문서는 정식 '사망확인서'나 '임시 사망확인서'가 아닌 검시관 개인이 유가족에게 개별적으로 보낸 편지에 불과했다. 문서에는 이경운의 사망일자가 2000년 9월 29일이며 '다발성 손상(Multiful Injuries)'이 '정확한 사망 원인'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10월 2일 유가족이 도착하기 전에 부검의 압둘카디르에 의해 부검이 진행되어 밝혀진 내용이라는 것이다. 또, 이 문서로 이경운 사망을 알리니 보험 등 기타 사망관련 일 처리에 이용해도 좋다는 내용도 덧붙여져 있었다.
10월 2일 유가족이 영국에 도착했을 때 "아직 부검을 하지 않았다, 부검할 때 시신을 확인하자"고 말했던 검시보조관 케어의 말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던 것.
특히 유가족은 장의사에서 발행한 '염방부 확인서'를 본 뒤 경악했다. 이경운 사망일이 2000년 9월 29일이 아닌 2000년 9월 30일로 적혀 있었던 것. 같은 날 받은 2장의 서류에 쓰인 사망일자가 어떻게 다를 수 있었던 걸까. 그뿐만 아니라 '염방부 확인서'에 쓰여진 날짜와 이름 등 몇몇 항목은 필체 및 볼펜 색깔조차 달랐다.
유가족은 더는 일반적인 교통사고에 의해 경운이가 숨졌다고 믿을 수 없었다. 서류의 내용도 의심스러웠지만 서류발행일자가 10월 4일임에도 열흘이나 지나서야 유가족에게 공개한 이유도 알 수 없었다. 더욱이 이때까지도 병원 측은 유가족에게 경운군의 시신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영안실에서 장의사로, 다시 영안실로 옮겨다니는 시신
그러나 경운군의 시신을 둘러싼 비상식적인 상황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2000년 11월 9일, 유가족은 장의사 영안실에 보관중인 경운군 시신을 보기 위해 찾아갔지만 경운군의 시신은 그곳에 없었다. 다시 캔터베리 병원 영안실로 옮겨졌다는 것. 역시 유가족 모르게 진행된 일이었다. 이에 대한 이씨의 말을 들어보자.
"상식적으로 영안실에서 장의사로 넘어간 시신이 어떻게 다시 영안실로 돌아올 수 있겠는가? 그럴만한 아주 특별한 이유 없이 가능한 일인가. 어떻게 아무 이유도 없이 장의사에 있던 시신이 병원 영안실도 다시 되돌아갈 수 있나."
유가족은 11월 18일 나이젤 클라크를 유가족 변호사로 선임하면서 영국당국에 공식 대응키로 결심했다. 아울러 경찰에 민원을 제기하고, 병원의 의료관련 기록 열람도 요청했다. 그러나 의혹은 줄지 않았다.
유가족의 민원에 대한 경찰의 답신은 동일 인물이 보낸 편지였음에도 서로 다른 서명이 적혀 있었고, 켄트 앰뷸런스 협회에서 보낸 앰뷸런스 환자 기록 차트에는 호출 번호(call sign)가 제각각이었다.
2001년 1월 16일, 이런 혼란스런 와중에 영국법에 따라 경운군의 사인을 최종적으로 심의하는 공식 모임인 사인 심의회가 열렸다. 이 사망심의회에서 경찰, 부검의, 증인 등의 진술을 종합 검토한 검시관 리처드 스터트는 경운군의 사인을 '교통사고에 의한 사고사'라고 결론 내렸다.
공식자리였음에도 교통사고 도면도, 부검사진도 없이 손으로 대충 상처부위를 그리며 사인을 결론지은 것. 유가족은 사인 심의회 결과에 승복할 수 없었다.
강제 매장 협박과 2차 부검 시도
사인 심의회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며 장례를 미루고 해결책을 찾던 유가족에게 2001년 2월, 이들을 바짝 긴장시킨 편지 한 통이 배달된다.
"향후 28일 내에 시신을 인수하지 않으면, 경운군을 임의대로 매장할 수 있다." - 2001년 2월 2일자, 윌리엄 하비 병원의 분쟁 조정관 스티브 오닐
아직 시신도 확인 못 했는데 임의매장이라니! 유가족은 당시까지 얼굴을 제외한 시신을 확인하지 못했을 뿐더러, 일반 교통사고로서 납득할 만한 증거도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유가족은 그 어떤 것보다도 경운군의 시신을 우선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가족은 변호사와 상의하여 서둘러 2차 부검을 하기로 했다. 부검을 하게 되면 시신도 확인할 수 있고, 정확한 사인도 밝힐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유가족은 3천 파운드(한화 약 6백만 원)에 이르는 모든 비용을 변호사를 통해 선지급하며 긴박하게 부검 준비를 시작했다. 수소문 끝에 윌리엄 하비 병원을 찾아 스티브 오닐과 면담하고 2차 부검 시까지 경운군의 시신을 온전하게 보관해 줄 것을 약속받았다. 유가족 변호사 앤드류 샤나한은 영국 내 저명한 부검의 이언 힐을 부검의로 선정한 뒤 "부검 전 시신 확인은 당연할 것이고, 부검 입회도 부검의만 허가하면 전혀 문제가 없다"고 유가족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실제로 벌어진 상황은 전혀 달랐다. 부검 당일인 2001년 4월 10일, 유가족은 시신도 볼 수 없었으며, 부검자체도 취소됐다.
2차 부검 무산... 시신도 볼 수 없고, 유가족 입회도 불허
2차 부검 당일, 유가족 일행은 서둘러 길을 나섰다. 변호사에게 부검시각 2시간 전인 오전 9시에 부검의 이언 힐과 시신확인 및 유가족 부검 입회 등에 대해 논의키로 했다고 전해 들었기 때문.
그러나 고속도로에 진입하기 직전 유가족이 타고 있던 차의 엔진이 고장 났다. 긴박하게 주변 지인들을 수소문해 부검 예정시간인 오전 11시를 넘겨 캔터베리 병원에 도착했다. 그러나 오전 9시에 만나기로 했던 부검의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11시 30분경, 곱슬머리에 체크무늬 양복차림을 한 부검의 이언 힐이 나타났다. 유가족이 먼저 시신을 확인하게 해달라고 요구하자 부검의 힐은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이영호씨는 "당시 이언 힐은 옆에서 줄곧 감시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던 검시보조관 케어를 흘끔흘끔 쳐다보면서 제대로 답변을 못하는 듯했다"고 말했다.
시신 확인을 허락하지 않자 유가족은 부검 입회를 강력하게 요청했다. 그러나 유가족의 거센 요청에도 부검의는 유가족 입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씨에 따르면 부검의는 "부검에 입회하게 되면 유가족이 정신적 충격을 받을 수 있다" "부검시 발생할 수 있는 병원균에 감염될 위험이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며 유가족 부검 입회를 거부했다.
당시 부검의 힐은 유가족이 앉아 있는 좌석 앞에 서 있었는데 사진 몇 장을 들고 있었다. 경운군의 전신이 촬영된 시신 사진이었다. 이영호씨는 순간적으로 사진을 낚아채듯 빼앗았다. 정복 경찰이 대기 중이고 부검을 앞둔 만큼 사진을 밖으로 들고 어디론가 갈 수 있는 상황이라고 판단한 이씨는 그 자리에서 직접 손으로 사진을 스케치했다. 실제로 본 것은 아니었지만, 경운군 사망 후 유가족이 처음으로 아들의 전신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이씨는 당시 그 사진을 보고 경운군 시신 부검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을 더욱 강하게 갖게 됐다고 말했다.
"7개월 만에 처음으로 전신사진을 보았는데 경운이 복부 위를 절제한 흔적이 전혀 없으며, 또한 통상적으로 Y자 형식으로 몸통 흉부를 절제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전혀 Y자 절개 흔적이 없었다. 배꼽 기준으로 위 아래쪽만 절제하고 봉합한 것이 보였다."
하지만 결국, 유가족은 2차 부검을 할 수 없었다. 시신 확인도 시켜주지 않고, 유가족 입회도 거절하는 비상식적인 부검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
"우리 측 변호사가 부검의를 섭외했고 변호사도 우리가 시신을 확인하는 것은 아무 문제없을 거라고 했다. 유가족이 전적인 권리를 갖는 2차 부검인데도, 또 유가족인 우리가 모든 비용을 선지급하며 마련한 것인데도, 시신마저 볼 수 없다는 건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병원 측은 시신확인도 안 시켜주고, 부검 입회도 거절하면서 대신 사진을 보여주고 그걸로 갈음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10개월 숨바꼭질 끝에 시신확인... 도대체 왜?
2개월여 뒤인 2001년 6월 27일, 검시관 측은 2차 부검 무산 이유와 관련해 주영대사관 측에 해명 팩스를 발송했다. 그러나 팩스 내용 또한 황당 그 자체였다.
검시관은 팩스에서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심화 냉동 보관중이 시신을 해동시키고 준비하는 과정이 필요하며, (부검 당일 유가족의 시신 확인과 입회를 거부한 이유는) '부검 준비를 위해 이경운 시신을 해동하고 일부 장기를 미리 밖으로 꺼내 놓아 유가족이 이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덧붙여 "유가족의 시신확인 요청을 거절한 경우는 2차 부검 당시 단 한 번뿐"이라는 '거짓' 해명도 덧붙였다. 사망 후 2001년 7월까지 유가족의 시신 확인 요구를 한 번도 수용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냉동보관 중인 시신을 보기 위해서는 꼭 시신을 해동해야만 하는 걸까? 유가족이 2001년 7월, 사망 10개월여 후 처음 시신을 확인할 때도 냉동상태로 확인했다. 부검 이전에 이미 장기를 꺼내 놓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할까. 이씨는 "부검 전에 준비를 위해 이미 장기를 밖으로 꺼내 놓았다니? 부검 준비를 한다면서 이미 부검을 했다는 것인가"라고 상기된 목소리로 반문하고 있다.
결국,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한 상태에서 2001년 4월, 모친 정승미씨와 경운군의 동생 경진군은 건강 및 학업 등의 문제로 스페인으로 되돌아갔다.
영국에 홀로 남아 진실 규명을 위해 싸우던 이영호씨는 2001년 7월 한국에서 모 방송사 취재진이 찾아오자 이 기회에 이들과 함께 시신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이씨는 스티브 오닐에게 전화를 걸어 분노를 터뜨리며 시신을 확인시켜 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고, 이후 오닐은 4명으로 확인자를 제한한다는 조건을 달고 유가족 변호사측에 시신 확인을 허락하겠다고 응답했다.
| | | 그 후로도 계속된 '시신 숨바꼭질' | | | | 이영호씨가 아들의 시신전신을 확인한 뒤에도 '시신 숨바꼭질'은 계속됐다.
2004년 10월, 캔터베리병원에 있던 이경운군 시신은 윌리엄 하비 병원(애시포드 소재)로 이송됐다. 역시 일체의 통보도 없었다. 당시 시신 이송 사유는 영안실 냉동 결함. 영안실내 여분의 냉동고가 있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던 유가족으로서는 쉽게 수용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며칠 앞으로 다가온 국과수 부검단의 2차 부검은 윌리엄 하비 병원이 아닌, 여왕 모후(the Queen Elizabeth Queen Mother) 병원
(마게이트 소재)으로 옮겨져 실행된다. 시신은 사망 초기부터 부검일까지 계속 옮겨 다니고 있다. / 박성진 | | | | | 신분을 감춘 모 방송사 취재진과 한인 교회 김순영 목사가 동행하여 사망 후 최초로 전신 시신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물론 냉동된 시신 그대로인 채였다. 이영호씨는 2005년 다시 한 번 시신을 확인할 기회를 가졌는데, 이 때도 역시 냉동 상태였다).
그러나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었다. 이경운군은 인도 보행 중 차도에 들어섰다가 뒤에서 오던 버스에 치여 사망했다는 게 영국당국의 발표내용이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교통사고에 따르는 증거, 즉 사고 현장, 사고 차량, 피해자를 모두 아무런 지체없이 순조롭게 공개됐어야 한다. 그러나 교통사고에 대한 일반 처리와 달리, 유가족은 시신 한번 보기 위해서만 10개월을 바쳐야 했다. 그나마 육안으로 확인한 시신은 과연 교통사고에 의한 사망인지 더 헷갈리게 만들었다.<1편 참조> 그리고 나머지는 아직 하나도 풀리지 않은 것이다.
이제 관심은 사고 당일 현장으로 모아진다. 사고 당일로 알려진 2000년 9월 29일, 영국의 유서 깊은 도시 캔터베리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교통사고가 정말 발생하긴 한 걸까. 다음 기사에는 교통사고라는 점에 주목해 교통사고라면 마땅히 존재해야 할 피해자, 사고 차량, 사고 현장 등 교통사고 '증거'를 둘러싼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 | | 영국의 검시제도 | | | | 코로너(Coroner, 검시관) 제도 : 영국은 사망 사건사고의 경우 검시관이 총책임자가 되어 경찰과 의사의 도움을 받아 사인을 밝혀낸다. 검시관은 명백한 자연사 또는 병원에서 의사가 사망을 명확히 확인하고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망을 제외하고는 모든 시신을 부검해 사인을 명확히 밝혀내도록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영국 검시관 관계법(Coroner's Act)에 따르면, 사망심의회(The inquest)가 시행되기 전이라도 장례가 가능하다. 단, 부검이 실시된 이후 유가족이 2차 부검을 요청하지 않을 경우에만.
참고로 검시관은 공무원으로(의료, 경찰계 인물이 겸직하는 경우도 드물게 볼 수 있음) 부검이나 사건 수사를 직접 실행하지 않고 과정 전체만 총괄한다. 실무는 병원과 경찰이 담당한다. 검시관은 부검 후 사망자의 사인을 종합적으로 심의하고 최종 사인을 결론짓는 사망심의회를 총 주관하는 일종의 재판장 역할이다.
사망심의회(The Inquest): 사망 사건 발생시 사망자가 어떻게 사망에 이르게 됐는지를 의학적인 차원과 정황적인 차원(언제, 어떻게, 왜)에서 포괄적으로 검토하여 검시관이 사인에 대한 최종 판결을 내리는 자리로 경찰, 의료관계자를 비롯해 증인도 참석한다.
부검을 한 후에 사망심의회가 열리게 되며 사망심의회 이전에도 장례는 가능하다. 부검을 통해 밝혀낸 의학적 사인은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또한, 사망심의회가 열리기 전에 사인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충분한 증거가 수집되지 않으면 사인심의회는 계속 연기되기도 한다. 고 다이애나 공주는 2001년 사망했으나 아직도 사망심의회가 열리지 않고 있다. / 박성진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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