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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입학 열흘 만인 2000년 9월 29일 영국 캔터베리에서 숱한 의혹을 남긴 채 사망한 고 이경운 군 시신 2차 부검이 사건 발생 6년 만인 오는 23일 국과수 해외파견으로 이뤄진다. 영국 당국은 이경운군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발표했으나, 유가족 측은 각종 의혹을 제기하며 의문사라고 주장해왔으며 <오마이뉴스>도 이를 몇차례 보도한 바 있다. 2차 부검을 앞두고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들을 몇회에 걸쳐 다시 정리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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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죽은 자는 동시에 모든 것을 말한다. 누군가 죽었을 때 가장 핵심적인 증거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닌 망자의 몸이다.
여기 6년째 의문에 둘러싸인 아들의 사인을 알아내기 위해 냉동실에 시신을 보관해 둔 채 고통스러운 싸움을 해온 이경운군 유가족이 있다. 이경운 사건은 국내 언론을 통해 여러 번 소개된 바 있듯, 영국 유학중이던 한국인 유학생 이경운군이 2000년 캔터베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뒤 끝없는 의혹이 제기되며 아직까지 해결되지 못한 사건이다.
지금 6년이나 지난 이 사건을 다시 이야기하는 이유는 오는 3월 23일, 이경운 시신이 한국 국과수 부검단이 집도하는 2차 부검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경운 사건이 어떤 의혹을 갖고 있는 건지, 영국 당국의 말대로 일반 교통사고인지 유가족의 주장대로 의문사인지, 이번 부검을 통해 정확한 사인이 밝혀질 수 있는지 등을 알아보기 위해 사건내용을 소개한다.
유가족은 왜 의문사라 주장하는가
사건 발생 당시 영국 경찰과 병원 측이 밝힌 사고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2000년 9월 29일 오후 3시45분~55분경 이경운(당시 17세, 1982년 10월 19일 스페인 출생, 한국국적, 영국 켄트대학 1년 재학 중)이 캔터베리 소재 성 조지스 플레이스(St. George's Place) 거리에서 뉴 도버 로드(New Dover Road) 방면으로 걷던 중 차도로 들어서다가 당시 성 조지스 플레이스 라운드어바웃(원형 교차로)을 돌아 뉴 도버 로드 방면을 향해 시속 15~20마일 정도로 운행 중이던 르헤인 트레블(Lehane Travel) 소속 51인승 (통학) 버스에 오른쪽 상체 부위가 부딪히고 버스의 앞뒤바퀴가 가슴과 엉덩이 부분을 역과하는(완전히 넘어감) 교통사고로 현장에서 사망했다.
상황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경운군이 인도로 보행하던 중 무슨 이유에서든 차도로 들어섰다가 뒤에서 오던 버스에 치여 현장에서 사망했다는 것이다.
일반 교통사고라면 유가족에게는 애석한 일이지만 장례를 치르고 슬픔을 달래야 했을 일이다. 그러나 경운군의 유가족이 아들의 사망 이후 경험한 일련의 상황들은 그의 죽음을 일반 교통사고로 받아들일 수 없게 했다.
문서상 사망일자도 두 가지로 나타나고, 경찰은 사고 위치도 번복했다. 유가족이 받아든 병원, 경찰 등이 발행한 각종 서류들은 서명위조나 직위사칭이 의심될 정도로 발행기관이나 서명주체가 제각각이었다.
| | | 2001년 4월 2차 부검은 왜 무산됐나 | | | | 영국의 검시제도와 부검 관련 문제는 이경운 사건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 중 하나다. 영국이 채택하고 있는 검시제도에 따르면, 명백한 자연사를 제외한 모든 경우에 검시관의 주도하에 부검을 할 수 있다. 이후 의학적 사인을 밝혀낸 후 장례가 가능해진다. 만약 유가족이 부검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면 전적으로 유가족의 권리하에 재부검을 할 수 있다.
일반 교통사고사라는 경운군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유가족은 2차 부검을 준비했다. 당시까지 유가족은 경운군의 시신 전신을 확인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최소한 시신 확인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으나, 부검의 측이 시신 확인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어서 유가족의 권리인 (2차 부검이라면 전권이 유가족에게 있는 만큼) 부검 입회도 거절당했다. 결국 당시 예정된 2차 부검은 무산되고 말았다. 2차 부검 무산 관련한 내용은 향후 기사를 통해 더욱 자세히 밝힐 예정이다. / 박성진 | | | | | 그리고 무엇보다 유가족은 경운군 시신을 확인할 수 없었다. 유가족이 경운군 시신 전신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사망 후 약 10개월여가 지난 2001년 7월이 처음이었다.
사망 초기, 경운군의 시신은 유가족과 상의 없이 병원에서 장의사로 이송되었다가 유가족의 항의 후에 다시 병원 영안실로 되돌아 오기도 했다(시신이 병원으로 되돌아온 사실도 유가족은 나중에 알았다). 유가족을 대신해 경운군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장의사를 찾아갔던 영국인 신부도 시신에 접근할 수 없었다.
유가족의 이의제기에 따라 준비됐던 2001년 4월10일 2차 부검(박스참조) 당시까지도 유가족은 시신 확인을 못한 상황이었기에 부검 전 시신확인을 요청했으나, 부검의는 이를 거절했다. 이어서 유가족이 요청한 부검 입회 역시 거절 당했다.
무슨 이유로 유가족은 경운군의 시신을 볼 수도, 부검현장에 입회할 수도 없었던 걸까.
사망 3년 만에 공개된 시신 사진 6장... 그리고 의문들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경운군의 죽음이 절대 일반 교통사고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굳히고 진실을 캐내던 유가족 앞에 2003년 11월 20일, 거대한 증거물 하나가 도착했다.
영국 켄트경찰 측이 장의사 실내에서 2000년 10월 12일 촬영했다는 경운군의 시신 사진 6장이었다. 그러나 이경운군 사망 후 3년이 지나서야 시신 사진을 볼 수 있게 된 부친 이영호씨의 기대도 잠시, 아들 사망원인에 대한 의혹은 더 크게 굳어졌다.
"일단 보는 순간 몸이 경운이 것이 아니었다. 호리호리한 편인데…. 사진에 보이듯 그렇게 우람한 체격이 아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몸을 모를 리가 있나…."
이씨는 그와 양부 관계에 있던 미국인 고 로버트 웨스트옹(2006년 3월 별세)이 50여 년간 디즈니 애니메이터로 활동했던 이미지 전문가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웨스트옹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의견을 구했다. 웨스트옹의 의견 역시 이씨와 같았다.
생전에 웨스트옹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6장의 사진에 대해 "미스터 리(이영호씨)가 처음 보여줄 때부터 사진이 온전한 게 아니라는 걸 눈치 챘다. 최소한 절반 이상, 70% 정도는 가짜가 분명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어 2004년 3월, 이씨는 사진을 법의학 전문가인 한국법과학연구소에 보내 전문감정을 의뢰했다. 한 달여 뒤 한국법과학연구소에서 보내온 공식감정서도 이씨와 웨스트 옹의 판단과 같았다. 한국법과학연구소는 "모두 합성 또는 조작되거나 합성이나 조작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는 사진"이라고 공식 평가서를 보내왔다. 6장 모두 원본 필름에서 인화한 사진이 아니라 사진을 놓고 재촬영해서 출력하거나 인화한 사진들이라는 것.
연구소 감정서에 따르면, 3장은 명백하게 합성 및 조작된 흔적이 보였고, 나머지 3장은 합성이나 조작 여부를 확증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합성이나 편집된 것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는 사진이었다.
의문에 둘러싸인 6장 사진을 사진감정서 내용과 함께 살펴보자.
<사진1>의 두 사진 비교에서 철제 프레임이 사라진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법의학연구소는 두 사진의 촬영 거리 및 각도 분석 등을 통해서 볼 때 우측 사진의 머리 부분에서 합성이 이뤄졌다는 소견을 냈다.
<사진2>에 대해 법과학연구소는 얼굴 부분과 흰색 물체가 맞닿아 있는 부분에서 불연속과 단절이 발견되어 이 부분이 합성된 것이라는 소견을 냈다. 아울러, 또한 얼굴과 맞닿은 흰 물체는 다른 사진들에서도 볼 수 있는 흰색 물체와 같지 않다는 것도 감정서상에서 지적돼 있다.
<사진3>을 자세히 보면 왼손에 감은 흰 붕대 같은 물질이 엉덩이 아래쪽까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다른 사진에 나타난 왼손 부위와 비교해 보면 현격하게 그 길이가 차이난다(손 부분의 흰색 물질과 그 뒤에 직선으로 보이는 흰 부분도 있는데 유심히 보면 색과 질감의 차이로 둘을 구별할 수 있으니 손 부분의 흰색 물질이 엉덩이 밑으로 길게 이어지는 것을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감정서는 6장 사진 모두 조작 및 합성됐다고 결론을 내렸다. 위의 세 가지 문제점 외에 나머지 사진은 사진을 놓고 카메라로 재촬영한(원본 필름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것) 것들이라는 소견이다. 재촬영했다는 것만 놓고 나머지 사진의 합성 및 조작 여부를 확언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이것들이 조작되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도 없다는 것.
감정 결과를 바탕으로 정리해본 의문들
이와 같은 감정 결과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1) 시신 사진에서 오른손과 오른쪽 허벅지에 붕대나 깁스로 보이는 흰 물질이 감겨 있는 것이 눈에 띄는데 왜 그런 물질이 있어야 하는가. 병원과 검시관 측이 2000년 10월 2일 부검을 했다는 주장을 고려할 때, 10월 12일이라면 부검 이후의 시신이다. 만약 부검을 했다면 그런 물질이 몸에 남아있을 수 없다. 만약 그 부분에 어떤 상처가 있었다면 더욱 집중적으로 부검하고 살펴봤어야 했기 때문.
2) 영국당국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경운군은 현장에서 사망했다. 그런데 현장에서 즉사했다는데 왜 의료행위를 한듯한 흔적(왼손, 허벅지 등)이 남아있는가. 2000년 9월 29일 이경운군이 앰뷸런스에 의해 켄트 앤 캔터베리 병원으로 후송됐을 당시에 생존해 있었던 걸까, 아니면 결정적인 사인으로 밝혀질 만한 상처가 흰색 물질로 가려진 것일까.
3) 감정서 의견대로 뒷머리 부분이 나온 사진이 조작됐다면 머리 부분을 조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대체로 머리에 상처를 입었을 경우, 주요사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후두부 쪽 다른 상처가 있었던 게 아닐지 의심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4) 사진에서도 영국 당국이 주장하는 교통사고 역과 흔적(특히 가슴과 엉덩이)을 볼 수 있어야 하지 않나. 법의학자 한길로 박사는 2004년 11월 이경운 사건을 다룬 MBC <휴먼 다큐 공감>을 통해서 6장 사진에 나타난 시신에는 영국 당국이 주장하는 교통사고 '역과' 흔적이 거의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5) 정말 부검을 하긴 한 것일까? 영국당국의 주장에 따르면, 2000년 10월 2일 오전 10~11시 사이 부검이 시작돼 1시간30분 정도 진행됐다고 한다. 그러나 위 사진에 따르면, 가장 기본적인 복부 부분 절개 흔적이 없으며, Y자 절개 흔적도 없다(부검은 통상 Y자로 절개하는 방식을 따른다). 목 부분에서 복부 상단 부분까지만 일자 절개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6) 영국 경찰은 정작 중요한 부검사진은 없다고 하면서 왜 이런 사진을 찍었을까. 당초 부검의 압둘카디르가 발행한 부검 소견서에는 필수적으로 포함되어야 할 부검 사진이 없었다. 사진 입수 후 공식 감정 소견을 접한 유가족 이영호씨는 "유가족 변호사 측을 무마시키기 위해 사진을 허위로 만들어 놓고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니냐"며 강한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더 문제가 된 것은 시신 사진에 포함돼 있던 편지였다. 발신인 켄트 경찰서, 수신인 유가족 변호사로 되어 있던 그 편지에 유가족에게 사진을 공개하지 말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 변호사 측이 유가족에게 사진을 보내면서 자신들에게 전달된 그 편지마저도 함께 전달한 것이었다.
7) 무엇보다 가장 근본적으로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감정서 소견이 사실이라면, 왜 영국 경찰은 시신 사진을 합성하고 조작해야 했던 걸까.
이영호씨는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끌다가 시신 사진을 공개했다는 사실부터 이미 사진이 정상적인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아니냐"며 "영국 당국이 무언가를 은폐하려는 게 아니냐"고 말하고 있다.
이 글을 다 읽은 당신의 소견은 어떤 쪽인가. 이경운군의 사망을 둘러싼 문제점들은 이 글에서 열거한 것 외에도 여러 가지가 더 있다. 이어지는 기사에서는 시신과 부검을 둘러싼 미스터리, 교통사고라는 주장에 반박하는 근거들, 의심스러운 각종 서류 등을 소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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