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1949년 8월 소련의 원자탄 개발 성공과 국공내전에서의 중국공산당의 승리가 소련에게 미국과의 대결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는 것이다. 1948년 베를린 봉쇄와 1949년 4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결성 당시만 해도 미국에 위협을 느껴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던 스탈린 서기장이 위와 같은 정세 변화를 계기로 적극적 대결로 선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소-중 관계에 이상 조짐이 생김에 따라 스탈린 서기장으로서는 중국을 단속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중국은 새로운 소-중 동맹조약(중소동맹조약)의 체결 과정에서 소련에 '대들었을' 뿐만 아니라, 1950년 1월 26일에는 장춘철도 무상반환과 소련군의 뤼순 철수(3년 기한)를 요구하는 등 당시로서는 '꽤 대담한' 행동을 보였다.
이러한 중국의 태도 변화가 미국-중국 연대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스탈린으로서는 미국과 중국을 상호 대립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필요에 안성맞춤으로 부응하는 것이 바로 한반도에서의 전쟁이었다고 위 논문은 주장하고 있다.
셋째, 미국이 친중국 노선을 취함에 따라 스탈린 서기장으로서는 미중관계를 어떻게든 갈라놓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1950년 1월 5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대만(중화민국, 타이완)에 대한 무기 제공을 중단하고 대만을 중국에 반환하며 중국 내전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요지의 새로운 정책을 발표했다. 같은 달 12일에는 애치슨 국무장관이 "한국과 대만은 미국의 직접적 방위선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소위 '애치슨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처럼 미국의 친중국 노선이 두드러지자, 소련으로서는 미-중 연대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양국의 연대를 차단하려면 한반도에서 양국이 전쟁을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게 스탈린 서기장의 발상이었다는 내용을 위 논문은 담고 있다.
스탈린, 미-중 접근 차단 필요성 인식
넷째, 마샬계획(미국의 유럽 원조계획)과 NATO 성립 등으로 유럽 무대에서 미국에 밀리고 있던 소련으로서는 미국의 관심을 아시아로 돌림으로써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벌이는 동안 유럽 무대에서 힘을 회복하겠다는 것이 스탈린 서기장의 전략이었다는 것이다.
위의 4가지 필요에 안성맞춤으로 부응하는 것이 바로 한반도 전쟁이며 ▲ 한반도에서 남북한이 전쟁을 개시하면 ▲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미국과 중국이 충돌할 수밖에 없으며 ▲ 그러한 충돌이 시작되면 미국과 중국은 자연스럽게 적대적이 될 것이기 때문에 ▲ 그 사이에 소련은 유럽무대에서 힘을 충전할 수 있다는 것이 스탈린 서기장의 계산이었다고 김동길 교수는 강조하였다.
토론자로 나선 서상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도 인정한 바와 같이, 중국 및 소련의 당안(공문서 보관소)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전쟁을 연구한 김동길 교수의 논지는 거의 다 사실관계에 부합하는 주장이다.
그런데 서상문 연구원은 "중국측의 전쟁책임을 축소하는 김 교수의 주장이 중국 학자들의 입장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냐?"면서, 마오저뚱 주석이 한국전쟁 직전에 인민해방군 소속 조선인 병사들을 북한으로 대거 송환한 사실 등을 들면서 중국 역시 전쟁 개전에 대해 적극적 책임이 있다고 반론을 제기하였다.
다시 말하면, 스탈린 서기장이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득실계산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소련측의 '야심'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중국측의 전쟁책임이 묻힐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참고로, 마오저뚱이 북한으로 송환한 인민해방군 병사의 숫자에 관하여,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7~10만 명이라고 주장한 반면, 김동길 교수는 3만 6천 명에서 4만 명을 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중국군 소속 조선인 병사가 북한으로 대거 이동
서 연구원의 반론에 대해, 김 교수는 "당시 중국측의 정책을 고려함에 있어서 마오저뚱과 중국 지도부를 분리해야 한다"면서 마오저뚱 주석은 한국전쟁 개전에 적극적이었을지 몰라도 다른 지도자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재반론을 제기하였다. 그러므로 중국정부 자체는 전쟁에 대해 큰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서 연구원은 "최고 권력자인 마오저뚱이 전쟁 개전에 대해 적극적이었고 또 현실적으로도 중공군이 대거 참전하였는데, 중국 지도부가 스탈린의 전략에 휘말려 억지로 참전한 것이라는 논리가 성립할 수 있겠느냐?"는 재반론을 제기하였다.
위와 같은 학회 토론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지금 중국정부는 한국전쟁 당시 자국의 역할을 가급적 축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중국정부의 방침에 따라, 현재 많은 중국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자국의 역할을 가급적 축소시키는 내용의 글을 발표하고 있다.
그리고 김 교수도 밝힌 바와 같이, 현재 중국에서 한국전쟁 관련 논문을 발표하려면 공산당뿐만 아니라 인민해방군의 심사까지도 받아야 한다. 설사 한국인 학자라 할지라도, 중국에서 학위를 받고 교직 생활을 하려면 중국 당국의 방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서두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북한과는 정치적 협력을 하면서 한국과는 경제적 협력을 추구한다는 기본 입장을 갖고 있는 중국정부로서는 자국이 한국전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한국측에 피해를 입혔다는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든 축소시키고 싶어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정부의 의지는 학문에 대한 통제로 반영되고 있다.
중국정부, 한국전쟁 관련 학문연구 통제
또 위 논문에서는 한국전쟁에 대한 김일성 당시 수상의 의지가 상당히 과소평가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국에서 어떻게 평가하든 간에, '김일성' 자신은 미국의 동북아 패권에 맞서 적극적으로 전쟁을 준비한 측면이 강하다. 한국측 시각에서는 침략전쟁으로 규정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전쟁에 나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소련과 중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전쟁 지지를 요청한 김일성 당시 수상이 스탈린 서기장의 전략에 휘말려 전쟁을 벌인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갖기 힘들 것이다. 김일성 수상의 전쟁 지지 요청에 시달리던 스탈린 서기장이 마오저뚱 주석뿐만 아니라 김일성 수상까지 동원하여 전쟁을 유발했다는 주장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측면이 있다.
이제까지 아시아 민중의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역사 개척을 강조해 오던 중국정부가 한국과의 경제협력을 위해, 한국전쟁에 대해서만큼은 북한·중국 등 아시아 민족의 소극성·피동성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면서, 철저히 자국의 국익을 추구하는 현대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