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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3년, '조선왕조실록'의 전산화가 완료되자 국사학자들은 열광했다. 연구를 위해 더 이상 규장각 서고에서 수천권의 사서를 뒤지며 고생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은 500여년에 걸쳐 완성된 세계 최고 수준의 사서다.

민족문화위원회의 임승표 전문위원은 당시 실록 CD롬을 처음 접한 감동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떨리는 심정으로 기증받던 당일 실행해 본 실록 CD는 그야말로 '서말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절로 실감나는, 정말로 기대 이상의 결과를 내 눈 앞에 펼쳐 보여주고 있었다…각종 연산자를 활용하여 검색 조건으로 입력하니 총 4000여 건이 넘는 관련 항목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왕대·권·년·월·일·간지·기사제목' 형태의 정리된 목록으로 나타났다…4~5년 동안 손으로 직접 찾아 일일이 정리한 자료를 몇 초만에 검색하고, 이를 통하여 필요한 자료를 전거까지도 정리된 카드 형태로 디스켓에 저장하거나 복사, 출력하는 데 며칠만에 완벽하게 해낼 수 있었다."

이제 컴퓨터 한 대만 있으면 학자들은 얼마든지 조선사에 대한 심층연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문헌에 대한 접근권이 연구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역사학계에서 실록의 전산화는 그래서 국사학 연구의 혁명으로까지 받아들여졌다.

2억1천만자의 조선왕조실록을 낱낱이 검색한다

▲ 사이월드 모니터센터 모습. 이 곳에서는 네티즌들의 검색행태를 비롯해 인터넷 상의 각종 트래픽을 실시간으로 모니터할 수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하지만 검색 엔진의 놀라운 잠재력에 더 관심이 있는 기자 입장에서 볼 때 조선왕조실록 전산화의 가장 흥미로운 효과는 2억1천만 자에 달하는 실록의 자구들을 종횡으로 갈무리해 볼 수 있는 검색 기능에 있었다.

만약 실록을 시대별로 나누어 분야별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들을 면밀하게 추적한다면 주류 역사관에 치여 드러나지 못했던 조선시대의 진정한 모습을 유추해 내는 것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그 동안 당연하게 여기던 조선사 시대 구분 자체가 검색어 추적을 통해 새로이 바뀌는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이 모두 엄청난 자료를 빠른 시간 내에 갈무리하고 추적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와 검색의 힘이다.

기상학자들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실시간으로 수집되는 방대한 데이터 속에서 일정한 패턴과 경향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 실록의 전산화는 막강한 데이터 검색이 전제되어야 해 기상학같은 자연과학 분야에서나 가능했던 귀납적 연구를 역사학에서도 시도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그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이 앞으로 최신의 데이터마이닝(데이터 가운데 숨겨져 있는 유용한 상관관계를 발견하는 것) 기법과 결합한다면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조선사의 놀라운 모습이 새록새록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처럼 문헌을 통해 한 시대의 정신, 즉 자이트가이스트(Zeitgeist)을 규명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요즘 가장 각광받는 방법론이 바로 각종 문헌의 '의미소' 확산 경로를 추적하는 것이다. 서점의 베스트셀러 리스트가 한 사회의 지적 유행을 측정하는 바로미터이듯 주류적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각 시대의 경향을 편견없이 드러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바로 의미소 추적이다.

하지만 인터넷 시대인 요즘 의미소의 추적은 이제 실시간으로 이루어진다. 주요 포털의 인기 검색어 추이는 시간 단위, 혹은 분 단위로 변하는 그날의 시대 정신이자 우리의 자화상이다.

네티즌들이 자주 찾는 인기 검색어를 추적하는 것은 그래서 요즘 기자들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인기 검색어 감시에 소홀한 기자는 '뒷북을 치는' 창피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독자의 찰나의 관심에 기사가 죽고사는 인터넷 매체에서 네티즌들의 관심사가 어떻게 변하는 지 알고 있다는 것은 기자의 큰 무기다.

종이 신문이 요즘 곤경에 빠진 것은 무엇보다 시간대별로 변화무쌍한 흐름을 보이는 인터넷상의 뉴스 사이클을 하루에 한 번 인쇄해 배달하는 현재의 체제로는 태생적으로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세계의 시간대별 인기검색어, 시대의 정신

▲ '구글 자이트가이스트' - 구글의 주간 최다 검색어를 국가별로 통계 내 보여준다. 글로벌 네티즌의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최신지표다.
ⓒ Google
그러나 주요 포털의 인기 검색어가 시대정신을 실시간으로 읽는 막강한 도구라고 해도 결국은 한글을 사용하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한정된 것이다. 세계 최대의 검색 업체 구글의 본사가 있는 캘리포니아주 마운틴 듀에는 각 국의 인기 검색어 추이를 24시간 들여다 볼 수 있는 모니터 센터가 있다.

구글은 영어뿐 아니라 프랑스어·독일어·스페인어·일본어·중국어·한국어 등 세계 주요 언어별로 검색 서비스를 운용하고 있어 세계적인 수준에서 세계 네티즌의 인기 검색어 동향을 모니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업체다. 구글 모니터 센터에 24시간 상주하며 지구촌의 검색행태를 지켜본 <와이어드>의 마이클 맬론은 그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스크린 상단에는 지구의 낮과 밤을 동시에 보여주는 세계 지도가 떠 있다. 대륙에 걸쳐 점점이 박힌 미세한 원색의 불빛은 그 한 개가 동시에 수 천건의 검색이 현재 각 언어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유럽·일본·이스라엘·한국 그리고 북미지역 태반은 불빛이 매우 조밀해 마치 은하수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아프리카·중동·남미 지역은 불빛의 수가 적어 거의 도시 하나 하나를 정밀하게 구분할 수 있을 정도다. 구글의 이 세계 지도는 구글 사용자의 분포도일 뿐 아니라 지구촌의 기술과 부의 분포를 보여주는 지표이며 더 나아가 언론자유의 현황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세계 네티즌의 관심사와 의식의 흐름을 실시간으로 모니터할 수 있다." 이것은 실로 신의 능력과 비견될 만 한 전대미문의 권력이다. 기상학자가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내일의 날씨를 예측하듯 검색 포털은 네티즌들의 인기 검색어 추이를 분석해 장차 미래를 주도할 트렌드를 도출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패턴과 트렌드 분석의 가장 큰 유용성은 바로 미래 예측력에 있고 일정 시간에 걸쳐 안정된 경향성을 보이는 특정 지역과 인구군의 모습은 바로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확실한 지표가 된다.

조만간 각 포털들이 예측하는 내년도 세계의 인기 색상·디자인·패션·소설·전자제품 등의 리스트가 발표될 날이 오지 않을까?

지구촌의 네티즌 수가 10억 명도 채 넘지 못했기에 웹의 움직임이 세계의 모습을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단정하기는 아직 이르다.

하지만 언젠가 세계인 모두가 웹에 접속해 네트워크를 통한 정신세계의 교류가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날이 오면, 수천만개의 서버로 링크된 인터넷은 그 자체가 살아 있는 거대한 두뇌가 되어 인류의 자이트가이스트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창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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