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 성향 두드러지는 드라마 속 인물들
신인류의 가장 큰 특성은 경제적인 부를 바탕으로 한 개인주의 추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을 가장 잘 내포하는 것이 '코쿤족'과 '보보스족'이다.
코쿤족의 '코쿤(cocoon)'은 누에고치를 뜻한다. 즉 누에고치처럼 자기만의 안락한 공간에서 칩거하며 자기만의 생활을 즐기는 부류를 말한다. 나홀로족, 마이홈족, 귀차니스트, 폐인족, 방콕족 등도 크게는 여기에 속한다.
TV드라마에 등장하는 코쿤족의 모습을 찾는다면 현재 방영중인 MBC 일일연속극 <사랑은 아무도 못 말려>에 나오는 윤지훈(이현우 분)을 꼽을 수 있다.
극 중 지훈은 거의 집 밖으로는 나가지 않고 집안에서 모든 것을 다 해결하는 인물이다. 집에서 만화를 그리는 일은 물론, 인터넷으로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접하고, 핸드폰으로 만화편집자와 업무이야기를 한다. 식사는 옆집에 사는 후배 은주 집에서 빌붙어(?) 해결한다.
지훈은 '집안에 사람이 북적거리는 것도 싫어'하고 '귀찮아서 대학 강의도 거절'한 인물이다. 그런가 하면 잡지사에서 인터뷰 나온 기자를 따돌려버리기도 한다. 이혼한 경력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결혼이란 귀찮고 번거로운 것이라 생각한다. 굳이 해야 한다면 자기에게 맞는 '적당한' 상대면 족하다고 생각하나 어디까지나 생각일 뿐이다.
'나'에게 아낌없이 투자한다, 보보스족
신인류의 대표적인 특징 중 또 하나는 삶의 여유와 가치를 추구하는데 아낌없는 투자를 한다는 점이다. 이중 대표적인 것이 '보보스(bobos)족'이다. '보보스'는 부르주아(Bourgeois)와 보헤미안(Bohemian)의 합성어로 부르주아의 경제적 부에 보헤미안의 자유로움, 낭만성, 창조를 즐기는 부류를 뜻한다.
재벌 2세 남자와 평범한 가정 출신 여자 캐릭터가 등장하는 요즘 드라마에서는 이러한 보보스족이 많이 등장한다. 그 중 하나가 얼마 전 방영되었던 MBC 월화드라마 <비밀남녀>의 정아미(송선미 분)다.
성형외과 전문의인 아미는 강남에 자기 이름을 딴 개인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여기에 취미로 살사댄스를 배우고 테라피 마사지를 즐기며 주말이면 각종 화려한 사교파티에 등장하는 보보스족.
지난주 종영한 KBS 주말드라마 <인생이여 고마워요>의 윤진수(오지호 분)도 보보스족에 속한다. 유명한 아나운서인데다 출중한 외모, 따뜻한 마음씨, 게다가 능력과 부까지 겸비한 진수는 바쁜 일과 중에서도 틈틈이 테니스, 등산, 암벽등반, MTB 자전거를 즐기며 일탈의 짜릿함과 여유를 즐기는 보보스족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1인 가족의 증가와 인터넷의 보편화라는 사회적 변화에 따라 요즘 젊은 층이 대부분 코쿤족과 보보스족에 해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남에게 간섭받기 싫어하고 자기 방식대로 쿨하게 살기를 원한다. 즉 삶의 가치가 '남'이 아닌 '나'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이러한 신인류의 양상은 오늘날 대학문화에도 잘 반영되고 있다. 10여 년 전만 해도 대학생들은 개인 활동보다는 자기가 속한 단체나 동아리 등의 활동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 또한 예전 대학생들이 좋든 싫든 주위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고 어울리거나 공동의 문제를 고민했던데 반해 요즈음 대학생들은 취업준비와 취미활동, 여행, 아르바이트 등 개인적인 가치에 더 많은 비중을 두게 된 것도 이러한 현상과 무관치 않다.
딩크족, 듀크족, 비혼족...가족 형태도 가지가지
사회의 한 개인의 가치관이 변함에 따라 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족 제도가 급속히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 기존의 핵가족제도의 틀을 깨는 새로운 가족 양상이 등장하고 있다.
아이 없이 맞벌이를 원하는 부부를 일컫는 '딩크족(DINK-Double Income No Kid의 준말)'이 있는가 하면 넉넉하고 안정된 환경을 바탕으로 아이의 양육에 가치를 둔 '듀크족(DEWK-Dual Employed with Kids의 준말)'도 있다.
SBS 금요드라마 <사랑한다 웬수야>에서 권달평(권해효 분)과 하조란(지수원 분)은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갖지 않는 '딩크족'이자 '비혼(非婚)족'으로 나온다.
반면 KBS 일일시트콤 <사랑은 리필이 되나요>의 최상태(변우민 분)와 홍진주(김태연 분)는 비교적 넉넉한 환경을 바탕으로 외동딸 예나를 키우는 '듀크족'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인생이여 고마워요>의 강윤호(김윤석 분)와 한연경(유호정 분) 역시 안정된 듀크족의 전형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듀크족은 대개 그 자녀가 하나 또는 둘이라는 점과 하나같이 넉넉한 경제력에 생활의 여유까지 추구하고 있으며 교육열이 높다는 점이 그 특징이다.
자녀 대신 애완동물을...딩펫족과 론족
그런가 하면 귀찮고 부담스러운 자녀 대신 애완동물을 키우길 원하는 '딩펫족(DINK+pet)'도 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애완동물을 마치 가족의 일원처럼 생각하며 여기에 투자하는데 아끼지 않는 '론족(loan-lover animal의 준말)'도 있다.
SBS 주말드라마 <하늘이시여>의 봉은지(김영란 분)와 구슬아(이수경 분)가 '론족'의 대표적인 예이다. 극 중에서 슬아는 애완견 '돌쇠'를 늘 껴안고 다니면서 좋은 옷을 입히고 정성스레 목욕을 시키고 사람과 얘기하듯 이야기도 나누는 등 마치 돌쇠를 친가족처럼 보살피고 있다. 봉은지도 마찬가지. 학원재단이사의 부인인 그녀는 하나뿐인 아들을 교통사고로 앞세운 뒤 마치 강아지가 아들이나 되는 듯 늘 껴안고 다니며 머리를 쓰다듬곤 한다
이러한 구슬아와 봉은지의 모습은 우리 주위에 론족이 더는 낯설고 희귀한 소수가 아님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애완동물병원, 애완동물 액세서리 가게 등 애완동물 관련 산업이 증가하는 현상은 론족의 새로운 풍속도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반증이다.
이러한 다양한 가치관의 변화 속에 노인층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손자를 위해 봉사해야 했던 기존 노인들의 전통적인 가치관이 차츰 무너지고 그 자리에 부부끼리 자신의 여생을 멋지게 즐기며 보내고자 하는 새로운 부류가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름하여 '통크족(TONK-two only no kids의 준말)'.
<하늘이시여>에 등장하는 모란실(반효정 분)과 왕마리아(정혜선 분)는 연령으로는 60~70대 노인층에 속하지만 마음만은 청춘이다. 비록 남편과는 사별했지만 극 중에서 두 사람은 단짝처럼 어울려 다니며 '이제 우리도 이렇게 맛있고 좋은 것만 먹으면서 살 때'라고 말하면서 맛있고 몸에 좋은 음식을 먹으러 다닌다. 또 건강에 좋은 요가를 하거나 절을 통한 수련방법을 서로 알려주고 배우기도 하며 주말에는 등산을 하고 또 젊은이들처럼 극장에 다니기도 한다.
실제로 이 통크족의 증가는 우리의 실생활에서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요즘 어지간한 아파트 단지 내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게이트볼 치는 노인들의 모습이나 구청이나 문화의 집과 같은 문화기관에서 해마다 늘어나는 노인대상 문화강좌나 행사가 그것이다.
삶의 여유와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요즘 새로이 등장하고 있는 '플라워(flower)족'도 빼놓을 수 없다. 20~30대 강남 지역 여성들 사이에서 시작된 이들은 심미적인 자연스러움과 웰빙을 동시에 지향한다는 점에서 고가품만을 선호하는 기존의 '명품족'과도 구분된다.
꽃꽂이와 과자·빵 굽기, 퀼트, 비즈공예, 뜨개질 등을 배우며 섬세한 안목을 자랑하거나 손수 만들어낸 음식이나 물건을 주변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이들의 특징.
<인생이여 고마워요>에 나오는 나윤숙(고정민 분)의 모습이 여기에 가깝다. 그녀는 동화책 속에 나올법한 그림 같은 집에서 예쁜 정원을 꾸미며 집안 곳곳을 늘 세심하고 세련되게 가꾼다. 비록 남편의 사랑은 얻지 못하지만 집안을 꾸미며 아이들을 예쁘게 키우는 것으로 그 만족을 대신하고 있다.
드라마 속 신인류는 바로 우리 이웃
플라워족이 여성에게 해당된다면 최신 전자제품을 구매함으로써 만족을 느끼는 남성 부류도 있다. 신제품이 출시되면 남들보다 빨리 구입하여 사용하는 이들 부류를 '얼리어댑터(early adopter)족'이라고 한다. 대개 남성들이 이에 해당하며 경제적인 여유가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이들은 대개 전자제품 마니아다.
<비밀남녀>에 등장하는 이문(안재환 분)이 바로 이 얼리어댑터족이다. 피부과 전문의인 그는 노트북, MP3플레이어, 디지털 카메라 등 전자제품 마니아다. 신제품이 나오면 바로 사야 직성이 풀리는 인물이다. 전형적인 얼리어댑터족의 특징이다.
여기에 얼리어댑터와 비슷한 '지름족'이라는 것이 있다. 최신제품에 대한 구매욕구는 얼리어댑터족과 같지만 지름족은 얼리어댑터족에 비해 경제력이 탄탄치않다. 그러나 구매 욕구를 느끼면 돈이 뒷받침되지 않더라도 일단 '지르고(행동하고) 본다'. 그래서 지름족이라 한다. 지름족은 경제력이 없기 때문에 소비의 선택과 집중을 전략적으로 구사한다는 특징이 있다. 얼리어댑터족과 지름족은 13∼24세 '포스트 디지털 세대(PDG)'를 대표하는 부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드라마 속에 비친 신인류의 모습이 더는 낯설지만은 않은 까닭은 우리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모습일 수도 있고 내 가족, 친구, 이웃의 모습일 수도 있다.
실제로 내 주변에는 방송국 작가로 일하면서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는 친구가 있다. 그녀는 바쁜 와중에도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요가와 수영을 배우며 틈틈이 연주회와 전시회장도 찾는다. 뿐만 아니라 바쁜 짬을 내어 퀼트와 비즈공예를 배워 집안 곳곳을 예쁘게 꾸미거나 주위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는 것을 즐긴다.
또 핸드폰 마니아인 그녀는 신제품이 출시되기 바쁘게 신종으로 구입하곤 한다. 그녀는 론족이자 보보스족이며 플라워족, 얼리어댑터족이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서 드라마 속 신인류의 모습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
이 밖에도 성인이면서도 어른 되기를 거부하고 어린이 취향의 문화를 지향하는 '키덜트족'(MBC 수목드라마 <궁>의 신채경)이나 여성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성관계시 남자 파트너를 고르는 '타이거족'(MBC <내 이름은 김삼순>의 김이영) 등의 출현도 새로운 풍속도를 잘 대변하는 신인류들이라 하겠다.
지금까지 살펴본 드라마 속 신인류 모습은 현실과 거리가 있거나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을 수 있다. 신인류 각각의 특성을 기준 삼아 분류했기 때문에 공감을 얻지 못한 면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어쨌든 TV 드라마 속에서 신인류가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부담 없고 산뜻한 드라마 선호하는 시청자들
이들의 출연으로 드라마는 한층 산뜻해지고 가벼워졌다. 예전의 드라마를 지배했던 정서가 눈물과 갈등, 진지함과 심각함이라면 오늘날의 트렌디 드라마는 유쾌함, 발랄함,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정서, 생활정보수집(건강식, 인테리어, 패션 등)면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일편단심 민들레를 외치며 울고 불며 매달리는 인물은 이제 안방 드라마에서 보기 어려운 존재가 되었다. 골치 아프고 구질구질한 사랑은 질색이다. 대신 깔끔하고 부담 없고 유쾌한 사랑이야기가 인기를 모으고 있다. 그리고 대개 그 드라마에는 신인류가 등장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청자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시청자들은 드라마를 보며 대리만족을 얻기도 하고 공감을 표하기도 한다. 그 말은 곧 우리 주변에 신인류 문화가 그만큼 보편적으로 자리잡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드라마는 당대의 문화와 유행을 잘 반영하는 매체 중 하나다. 그만큼 대중의 문화와 기호, 유행을 가장 빠르고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반대로 대중들의 문화에 가장 빠르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기도 하다. 다양한 신인류의 생성과 소멸이 하루가 다르게 이루어지는 요즘, TV 드라마를 통해 그들을 볼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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