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졸업이냐
"불안감."
올해 대학을 졸업한 안아무개씨는 서둘러 졸업한 것을 후회하는 가장 큰 이유로 '불안감'을 꼽았다. 졸업예정자 또는 당 학기 졸업자가 아니면 지원서조차 낼 수 없는 몇몇 기업들의 채용공고를 보며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초조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그는 작년 말 자신이 아직 졸업하기 전에 보러 갔던 한 면접장을 떠올렸다. '졸업하고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에 함께 면접을 봤던 기졸업자가 '공부를 하며 더 좋은 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했다'고 답하자 면접관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더 질문하지 않았다.
"대답이 좋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일단 졸업자들은 그런 부분에서 무언가 경력이나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어요."
#2. 유예냐
민아무개씨도 취업준비생이다. 하지만 사정은 조금 다르다. 선배들에게 '일반 사기업은 기졸업자보다 졸업예정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을 여러 번 들은 김씨는 복수전공인 경제학 졸업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졸업을 한 학기 미룰 수 있게 된 김씨는 현재 인턴으로 근무하며 틈틈이 영어와 경제학을 공부한다. 그에게 인턴생활은 '경력'과 '학업'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아직 취업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지 않다면 바로 졸업하는 것보다는 학생 신분을 유지하면서 취업을 위한 내공을 쌓는 게 더 좋은 것 같아요. 소속이 있으니 안정감을 느낄 수 있고, 학생이라는 신분이 어떤 방어벽 같은 게 되어 줄 수도 있거든요."
졸업유예가 취업난 회피 수단?
요즘 대학가에서 '졸업유예'란 단어가 낯설지 않다. '졸업유예'는 충분히 졸업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는데도 취업, 진로 등의 문제로 졸업을 미루는 것을 뜻한다. 한 학기는 예사고 1년을 늦추는 사람도 있다.
학생들이 졸업을 미루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취업. 한국외국어대 경영학과 송일 교수는 "취업 때문에 졸업을 미루는 학생들이 많다. 그 기간 휴학을 하고 해외 연수를 간다든지, 영어, 컴퓨터를 공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라고 말한다.
졸업을 미루기 위해 동원되는 방법도 다양하다. 졸업논문을 내지 않거나 졸업시험을 보지 않는 방법이 첫째. 하지만 졸업 논문이나 시험이 필요 없는 학교에서는 어쩔 수 없이 고의로 이수과목을 철회하거나 교수님께 F학점을 청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학과에 따라 토익 성적표나 컴퓨터 자격증을 제출하지 않으면 졸업이 유예되고 졸업 직전에 복수전공을 신청하면 해당 학점을 이수할 때까지 학교에 다닐 수 있다. 또한 학점취소제를 도입한 일부 대학에서는 성적이 나쁜 과목을 한 학기에 6학점까지 삭제할 수 있는데 많은 학생들이 이를 졸업유예의 발판으로 삼고 있다.
"졸업유예자가 태반이었어요." 현재 연세대에 재학중인 전아무개씨는 지난 학기를 떠올렸다. "워낙 취직이 안 돼서 쓸데없는 과목을 들으며 다니는 사람도 많았고 누가 취직이 돼도 됐다는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일찌감치 영어성적도 준비하고 외교통상부, NGO 인턴 경력도 쌓은 그였지만 취업난이 남 일 같지 않다는 생각에 한 학기를 더 다니기로 결정했다. 교환학생으로 다녀오느라 부족한 9학점을 듣는데 내는 비용은 150만 원 정도. 일찍 졸업하려고 했으면 계절학기라도 들어서 졸업학점을 채웠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한 학기 정도 졸업유예는 괜찮을 것 같아요. 기졸업자로서 피해를 볼 수도 있는 거고 심적으로 위축될 수도 있는 거니까요. 저도 (그런 상황이라면) 기꺼이 한 학기 더 유예할 생각이 있을 것 같아요."
취업 스터디와 인턴십에 유예기간 투자
그렇다면 졸업 대신 유예를 택한 이들의 전략은 무엇일까.
기자직을 지망하는 이화여대 이아무개(정외과)씨는 스터디와 국회 인턴십을 하고 있다. 이번이 10학기째인 이씨는 수요일 오전 한 과목만 수강하고 나머지 시간은 국회에서 보낸다. 정부기관, 의회, 기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피상적으로만 알던 것을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고 경력을 쌓을 수 있는 점은 좋지만 너무나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건 단점이다.
"계속해야 하나 고민 중이에요. 한 석 달 정도 더 일하다가 그만둘 생각입니다."
졸업 직전 경제학 복수전공을 신청해 1년 더 학교를 다니게 된 서울대 양아무개(동양사학과)씨도 마지막 학기에는 9학점 정도 수강하며 본격적인 취업준비를 할 예정이다. 금융 관련 공기업을 목표로 하는 그는 경제학 공부를 더 하거나 논술, 상식 스터디를 할 생각이다. 기회가 되면 방학을 이용해 인턴십을 할 계획도 있다.
"취업하려면 경영 아니면 경제학인데 경제학 쪽이 더 적성에 맞는 것 같아서 선택했어요."
이씨와 양씨뿐만 아니라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졸업을 미루고 스터디나 인턴십을 한다. 문제는 그것이 구체적인 목표나 계획이 밑받침되지 않으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화여대 경력개발센터 과장 이용서씨는 "처음 입학하면서부터 '대학원을 가겠다', '취업을 하겠다' 하는 구체적인 진로를 결정하지 못한 학생들이 졸업을 미루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며 졸업을 미루고 택하는 것들이 실제로 큰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인턴십이라는 것도 4년 재학 중에 하는 게 좋게 평가되지 졸업을 미루고 하는 거면 직무나 기관이 상당히 훌륭하지 않으면 안 되죠. 차라리 졸업을 제대로 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게 훨씬 나을 수 있습니다."
인턴제도를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곳이 드물다는 점도 학생들이 섣불리 졸업을 미루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인턴십 경험자들은 특히 무급 인턴을 주의하라고 충고한다.
연세대 전아무개씨는 "지인들이나 제 경우를 보면 오히려 너무 일을 안 시켜서 문제가 됐다. 돈 안 받는 건 둘째 치고, 제대로 일을 준다든지 적극적으로 활용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복사시키고 잡일 시키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라며 아쉬워했다.
이화여대 민아무개씨도 "인턴제도가 직장 분위기라든지 대략적인 업무 흐름, 조직도 등을 파악하고 자신이 원하는 나름의 직장상(像)을 그려볼 수 있는 좋은 기회지만 동시에 '인턴'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업무가 매우 한정적이고 정직원이 아니라서 느끼게 되는 미묘한 것들이 있다"면서 단지 인턴으로만 끝나는 제도가 아니라 정식 직원으로 채용하기 위한 전 단계로서 활용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인턴제를 일찍부터 도입한 국내 기업이나 외국계 기업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외국계 기업인 T사 인사과 함요한씨는 "인턴에게 중요하지 않은 일을 시킨다는 인식을 깨기 위해 매일 매일 회사에 필요한 일들을 맡긴다. 인턴 이수자의 97%가 취업에 성공하고 만족도도 높은 편"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인턴을 했다고 해서 자사 취업에 가점 요인이 되지는 않는다.
국내 대기업인 K사에 근무하고 있는 김아무개씨는 "인턴들이 각 부에 배치되기는 하는데 큰 신경을 못 쓰는 것이 사실이다. 신상품 기획안 같은 거 한 번 만들어보라고 하고 끝내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뚜렷한 목표없이 졸업 미뤘다간 '인생 유예'
취업·인사 전문 포털 '인크루트' 홍보팀 강정화 연구원은 "단지 취업난을 피하거나 뚜렷한 목표 없이 '졸업유예'를 택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아직까지도 연령이나 졸업연도를 제한하는 기업들이 많고, 대부분 기업들이 나이 많은 신입사원을 부담스러워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졸업을 미뤄야 한다면 뚜렷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휴학 등 공백 기간은 면접의 단골 질문입니다. 분명한 사유와 그 기간 무엇을 이뤘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취업·전문가는 불필요한 휴학이나 졸업유예를 막기 위해서는 1, 2학년 때부터 체계적으로 경력개발을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인크루트의 강 연구원은 "요즘은 가방끈 긴 사람보다는 경력자를 선호하므로 눈높이를 낮추고 보다 작은 기업에서 경력을 쌓은 후에 원래 들어가고 싶었던 기업에 재도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조언한다.
졸업유예를 표현하는 정식 용어는 '캠퍼스 모라토리엄'. 하지만 보다 친숙하게 와 닿는 단어로 'No Graduation', 졸업유예자는 'NG족'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대학 예비졸업생들의 통과의례처럼 돼버린 'NG족'. 하지만 자칫하다간 인생 유예, 인생의 NG(No Good)가 될 수도 있다
| | 취업에는 정도(正道)가 없다? | | | 여성 졸업자의 또다른 벽 '남녀차별' | | | | 구직자들을 가장 힘겹게 하는 것은 취업에는 '정도'(正道)가 없다는 것. 대학성적이 좋다고 다 취직이 되는 것도 아니고, 사회활동을 다양하게 한 것이 어느 기업에서나 플러스 요인인 것도 아니다.
실제로 연세대 전아무개씨는 "한 친구는 인턴경험도 전혀 없는데 대기업 S사에서 뽑았다. 남자선배들 같은 경우는 학점 3.0이 안 넘는 사람도 취직 잘 하고, 여자선배들은 3.5~3.7이 돼도 취직하기 어려운 것 같다"고 평했다.
민아무개씨도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게 확실하다며 입을 맞췄다.
"지금까지는 남녀차별이라는 거 느껴본 적 없는데 취업활동을 하면서 많이 느낀다. 더 좋은 학벌, 학점, 사회활동 등을 한 여성 구직자가 있음에도 단지 어떤 구직자가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최종합격했다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다"며 "여성직장인이 결혼 후 일을 그만두는 것 때문이라면 여성구직자를 기피하기 전에 왜 여성이 그만둘 수밖에 없는지 짚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난 2월 인크루트가 기졸업자를 중심으로 이메일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설문에 참여한 남성 806명 중 520명이 취업해 64.5%의 취업률을 보인 반면 여성은 496명 중 284명이 취업해 남성보다 낮은 57.3%를 기록했다. 취업한 남성 520명 중 정규직은 474명으로 91.2%인데 반해 여성은 284명 중 204명으로 남성보다 훨씬 낮은 71.8%만이 정규직에 취업한 것으로 나타났다. / 황혜경 기자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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